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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는 사람들(1)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소통의 궁극을 찾아가는 첫번째 이야기(- 이 글은 월간 <신인간>에 연재된다)
[필자주 : 이 기획은 천도교 중앙총부 운용의 3대 핵심 과제인 ‘기본’ ‘소통’ ‘미래 준비’를 좀 더 깊이 이해해 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올해는 ‘소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총부 정책을 소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화두를 매개로 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 더 근본적인 목표이다. 이러한 이야기 나눔을 통하여 ‘천도교인문학’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유통되고, 그것으로써 천도교와 세상이 더욱 풍요롭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1.
중앙총부가 내세운 정책 과제로서의 소통의 틀은 ‘총부와 교구, 교구와 교인, 교인과 교인, 교단과 세상의 소통’이라는 네 층으로 세분화된다. 그 하나하나에 대한 이해에 앞서 현재의 천도교에서 ‘소통’을 중요한 정책 과제로 내세운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특히 그 방법론적인 접근은 별도의 난에서 별개의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 말은 최근 유행하는 몇 가지 단어 중의 하나이다. ‘소통’이나 ‘힐링(healing, 치유)’은 그 부재(不在)나 부족(不足)을 보충.보완하자는 취지로 강조되는 것이고, ‘SNS’ '스토리텔링‘ ‘스마트(폰)’ 같은 것은 사회의 주류적인 흐름과 관련되는 단어로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는 것이다.
일단 천도교에서 ‘소통’을 강조하는 취지는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통이 부족하니 확장하고 심화하자”는 것이다. 중앙총부가 보국안민 포덕광제라는 천도교 목적 실현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혹은 교단 중흥이라는 내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교구(교인)들이 충분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한 축이 된다. 반면에 교구는 또는 교인들은 천도교 신앙의 목적을 충족하는 데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끼는지를 중앙총부(교역자)들이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1차적인 의미에서의 ‘소통의 강화’이다.
이러한 1차적인 의미 실현을 위하여 다양한 제도적, 관습적 시도들이 지난 1년 동안 다양하게 시행되었다. <천도교월보>를 격주간의 <천도교신문>으로 개편하여 재 창간한 일이나, 중앙총부의 일동일정이 집대성되는 ‘주간조회’의 결과물(회의록)을 다수의 교역자들에게 전파하고, 그 전파 범위를 점점 확장하는 것, 교령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구 순회를 월평균 1회 꼴로 시행하면서 일방적인 설교나 강연이 아닌 교인과의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핵심 관건은 바로 ‘소통의 강화’이다. 올해는 그간의 성과를 심화하는 한편으로, 교구장회의를 강화하고 제도화를 서둘러 아래로부터의 소통, 각종 위원회나 부설기관, 부문단체 등의 활성화를 통한 다극화된 소통 경로의 확장 등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년을 평가하건대, 교단 내적인 소통 지수는 상대적인 점수는 높게 줄 수 있다 하더라도(즉, 나름대로 노력이 진행되고 그 성과가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평점은 눈에 띄게 높아지지는 못하였다고 할 것이다. 세상과 교단의 소통이라는 교단 외적인 측면의 소통 지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1년 동안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통’이라는 과제가 교단 차원에서 얼마나 깊은 고질이었으며, 그 치유, 다시 말해 소통의 활황 국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투입이 필요한지를 체감하였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2.
그러나 현재의 천도교에서 소통이 중요한 정책 과제라고 보며 이를 추구하는 본격적인 이유는, 앞서 말한 1차적인 이유를 넘어선 곳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적, 물적 제반 조건이 열세를 면치 못하는 천도교의 상황에서, 천도교의 진리와 가치를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포덕’을 실현할 역량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방법)으로서 소통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도교단의 소통 강화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일종의 집단 지성 상태이다. 말하자면 천도교단, 천도교인 전체를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연대(네트워킹)함으로써 물리적 열세를 영성적(靈性的)으로 보완하자는 것이다. 이를 영성적 소통이라 부르고자 한다.
영성적 소통이란 무엇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소통 부재를 넘어선 불통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소통이라는 말의 오용 상황이다. 지난 연말 청와대 한 당국자는 집권 1년을 자평하는 자리에서 세간의 ‘불통 정부’ 논란에 대해 “원칙대로 하는 것이 불통이라면 그것은 자랑스런 불통”이라며 여론에 대해 오불관언의 태도를 고수했다. ‘여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여기며, 의견이 다른 사람은 곧 적이나 적과 내통하는 자(종북세력)으로 치부하는 의식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그러한 오만한 태도는 결코 정상적인 자세가 아니다. 나아가 소통은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라는 것을 무시한, 무지한 독주요 독선이라는 지탄을 면키 어렵다. 그런데 불통의 전형이라고 할 인물이나 집단이 불통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소통’을 중요성을 강조하고 내세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소통’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혹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하거나 짜증을 내곤 하는 것이다.
둘째는 소통이라는 말의 남용, 혹은 소통의 과잉이다. 예컨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등장은 ‘소통 문화’ 개선에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나날이 확장 일로를 걷고 있다.(‘카페’나 ‘블로그’ ‘트위트’, ‘페이스북’을 넘어 최근에는 ‘카카오톡’ ‘밴드(BAND)’ ‘카카오스토리(kakao story)’ 같은 서비스가 수십만 개의 소통 공동체를 만들어 내며 소통 문화 확산의 총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이전의 인터넷 열풍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되었듯이, 그리고 소통의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된 오늘날에 있어서 더더욱, 소통의 부재나 상대적인 불통감에 대한 병증 호소도 더욱 높아지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소통 공해에 시달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다. 지인이나 ‘페친(페이스북 친구)’ 들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꿈속까지 쫓아올 것 같은 광고나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소통을 강요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 고립을 선망하거나 템플스태이 류의 명상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것이다.
‘영성적 소통’이라는 말은 이열치열과 같이 그러한 소통 과잉과 편집증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진정한 소통, 무위이화, 오심즉여심의 소통의 길을 찾아 가자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 다음 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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