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과 개벽의 길을 찾다, 선산 변중선
■ 이 책은...
상해 임정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독립운동사와 문화사를 강의한 교육자이자 학자로, 양․한방을 겸비한 의료인으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대인(大人)의 삶을 살았던 선산 변중선 선생(1903-1980)의 자서전과 회고록 및 유작들을 모아서 편집한 문집이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 464쪽 I 25,000원 I 152*225 I 2018년 6월 1일
■ ISBN 979-11-88765-16-4 94990
■ 세트 979-11-88765-15-7 94990
■ 문 의 : 02)735-7173
■ 출판사 서평
잇따라 열리면서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다. 지금 한반도의 정세는 “천백세 조상들의 성령[祖靈]이 우리를 뒤에서 도와주시며[陰佑] 전 세계 기운이 우리를 밖에서 지켜주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고 굳게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극적인 성공의 길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초심(우리의 소원의 통일–민족의 평화와 상생)을 잃지 않고, 수인사(修人事)를 계속해 나가는 자세가 요구된다.
특히 민간 차원에서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주장되어 오던 민족통일이나 친일잔재청산 등의 역사적 과제가 현실화되는 길목에서고 보니, 그러한 거대담론의 하위에 도사린 수많은 과제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쳐든다. 남북/북미 간의 정상회담이나 판문점선언 같은 큰 틀의 협정이나 종전선언 등의 과정에서도 큰 틀의 원칙은 정상 간의 약속으로 쉽게(?)합의할 수 있으나‘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나아갈 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비요 함정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과거를 돌이켜,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아, 전도된 역사관을 정립(正立)해 나가는 일이다. ‘독립운동을 하면3대가 망한다’는 말이‘옛말’이 되도록 하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 하나만 하더라도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맥락이 수없이 얽히고설킨 상황이므로, 그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쫄아든 민족정기의 맥락을 찾아내 영양을 공급하여, 튼실하게 되살려 나가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해방 직후에‘혁명적인 방법’으로 해치웠다면 오히려 간편하였을 일이, 그동안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 때문에 몇 십 배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이 가도 결코 간과하거나 우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얼룩진 역사를 맑고 깨끗하게 돌려놓는 일은 훼손된 고전적(古典籍)이나 문화재를 복원하는 작업처럼 지독한 인내와 시간을 필요하다. 한 땀 한 땀 찢어진 부분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유실된 부분을 찾아내어 제자리를 찾아 끼워 맞추고, 갈라진 틈을 메워나가야 한다. 그 핵심은 무엇보다 잊혀진 인물, 혹은 소홀한 역사의 인물, 특히 독립운동사의 빈 구석들을 채워 나가는 일이다. 금번에 “구국과 개벽의 길을 찾다 – 선산 변중선” 문집을 간행하게 된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산 변중선 선생은 1903년에 태어나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2년 상해로 건너가 상해 동제대학 의학부(산부인과 전공)에 재학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선생을 지지하며 의정원 대의사를 역임하고, 산하단체인 청년동맹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의 재판과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출옥한 이후에는 광산업과 의업을 하며 은신(隱身)하다가 해방 이후에는 교육사업과 대학 강의로 본격적인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특히 1960년대에 전남대학교에서 강의한 ‘한국독립운동약사’ 강의록은 해방 이후 ‘최초의 체계화된 독립운동사 자료집’으로 평가되며, 후속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강의록은 당시로서는 자료가 일천한 상황이었음에도 조선 후기 서세동점의 상황과 일제의 국권 침탈과정, 그에 맞서는 한국군(신신국)의 저항과 의병투쟁, 3.1운동 전후의 국내외 사정과 임시정부 내의 제 정파의 대립과 갈등까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체험에 의한 증언 가운데서 기존의 사료와 비교할 만한 새로운 주장들이 적지 않다.
1965년 원불교에 입문한 이후로는 원불교의 제생의세(濟生醫世) 정신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면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설립을 주도하는 한편, 후학과 세인들에게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종교인으로서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열반(1980)한 지 10년 만에 후학들이 발굴한 자료를 기반으로 1990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산 변중선 선생은 1990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애국장이 추서되었지만,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인간적인 풍모는 그저 몇몇 지인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며, 잊혀져가는 인물이었다. 더 이상의 세월이 흐르기 전에 산재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 자리에 모으고, 지인들의 증언을 청취하여 ‘문집’을 간행한 것은 작게는 한 집안 또는 선생이 몸담았던 원불교 교단의 일이지만,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국가와 민족의 일이며, 공공(公共)의 가치를 되살리고 풍부하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선산 선생 한 사람의 사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축되었던 민족 정통의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 정통을 올곧게 세워 나가는 ‘역사적인 사업’에 한 줄기를 보태는 일이라는 데서 더 큰 의미가 있다.
문집편찬위원회와 관계기관에서는 이번 문집 발간을 계기로 선산 변중선 선생은 물론 그 밖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와 조명, 계승을 위한 노력들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 차례
제1부 선산 변중선 선생의 저술
1. 나의 인생, 나의 철학(자서전)
2. 변동화 씨의 기함(편지)
3. 항주순례기(기행문)
4. 한국독립운동약사(강의록)
5.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현대적 응용(강의록)
6. 변극 교수의 한방 명처방집(한방처방)
제2부 선산님을 추모하며
1. 추모의 글(권성도 김춘택 김학인 김현 변성묵 서광원 손흥도 승정우
이법륜 장인원 정수덕 정연석 한길량 한종만)
2. 선산 변중선 전기
3. 선산당(禪山堂) 변중선(邊衆船) 영가 전
제3부 선산님의 걸어온 길
1. 선산 변중선의 삶과 교육실천 그리고 교훈_ 김귀성
2. 일제강점기 선산 변중선의 민족독립운동과 그 성격_ 박맹수
제4부 자료편
■ 책 속으로
--<나의 인생, 나의 철학> 중에서
내가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난 배영운동(排英運動)인 5·30운동(1925년 5월 30일, 중국 상하이에서 일어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편집자 주)에 가담하면서부터였다. 나는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 중국에서 배영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제(日帝)의 손아귀에 떨어진 우리나라의 백성으로서 수수방관적 태도만 하고 있을 수 없다고 보아 재중(在中) 유학생 3백여 명을 규합하여 배일(排日) 독립단체인 ‘해외청년동맹(海外靑年同盟)’을 결성하여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20쪽)
--<나의 인생, 나의 철학> 중에서
나와 김구와의 관계는 대단한 것이었다. 대의사였던 나와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그 지위상의 격차는 컸을지 몰라도 인간적 측면에서는 추호의 격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때 국무위원으로서 내무장관직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가 임정 주석에 취임하기는 1931년 윤봉길 의사 사건이 일어난 이후인 1932년경이었다. (36쪽)
--<나의 인생, 나의 철학> 중에서
(전략) 별다른 고통은 없었으나 감옥 생활 3년 동안 변변치 않은 식사와 작업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작업이라야 그물을 짜고 담뱃대를 만드는 일이었으나 별다른 일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상당한 고통이었다. 그동안 고향에서는 몇 차례 면회를 다녀가기도 했으나 우선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3년 동안의 형을 마친 후 나는 그냥 고향으로 내려와서 며칠간 정진의 기회를 가지다가 네댓 친구의 권유로 금광(金鑛) 채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때가 1932년인가 보다.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자들로서 일경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그것이 싫어 산골을 찾아다니면서 금광 채굴에 나날을 소일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41쪽)
--<한국독립운동 약사> 중에서
국내에서는 적괴(敵魁) 이등박문의 사주(使嗾)로 광무 11년 5월 23일에 참정대신 박제순(한규설은 을사조약 반대한 후 곧 쫓겨나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음)을 쫓아내고 이완용이 참정대신이 되었다가 관제(官制)를 변경하여 의정부를 내각이라 개칭하고 참정대신을 총리대신이라 부르게 하여 후일의 한일합방에 만반 준비를 하던 중 의외에도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이 발생하니 이완용 등 7대신은 이등박문의 명령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사신을 보낸 일이 없다고 회전(回電)하는 동시에 일편으로는 이것을 구실삼아 광무황제를 협박하여 퇴위케 하고 정신이 몽롱하신 융희황제(隆熙皇帝)를 세운 후 소위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으니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75쪽)
--<한국독립운동 약사> 중에서
33인이 다시 상의하기를 자신들은 틀림없이 내란죄(內亂罪)로 중형(重刑)을 받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중단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먼저 후계 기관(後繼機關)을 조직하기로 합의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이승만(李承晩) 박사(중략) 등을 선정하였고, 또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는 김규식(金奎植) 박사를 선정하였으나 이 조직 명부를 해외에 전달하기 막연하였다. 이에 의암(義菴; 손병희) 선생은 당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의 중개인(仲介人)으로서 동척(東拓) 매수토지(買收土地)의 80%를 단독 소개하여 거대한 이익을 얻은 브로커 대왕 한남수(韓南洙, 靈岩人)를 초청하고, (중략) 상의(相議)하니 한 씨는 즉석에서 쾌락(快諾)한 후 임시각원(臨時閣員) 명부를 품에 품고 일로(一路) 상해(上海)로 떠났다.
--<추모의 글> 중에서
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면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교육자인 선산 변중선 선진이 1980년 3월 25일 열반하니 이에 대산종사 말씀하신다. “이분은 독립투사로서 이 나라에 공헌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는 ‘칠보가 보물이 아니라 자기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보물(七寶非眞寶 解脫是眞寶)이라’는 자각에서 재색명리를 다 던지고 출가하였으니 그때
이미 항마로 출가하였다. 독립투사로 이 교단에 전무출신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기록하여 전하도록 하라.” (162-163쪽)
■ 저자 소개_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 사상을 바르고 넓고 깊게 연구함으로써 원불교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74년 7월 4일 설립되었다. 또한 단순히 사상에 대한 연구보다 좀 더 심층적이며 구체적인 원불교학 수립과 사관 수립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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