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평화교실 06
함석헌의 평화론
협화주의적 평화인문학
이 책은 세상사람 누구나 갈구하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를 찾고 구현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함석헌의 언어론, 국가론, 종교론, 인간론, 역사론의 각각의 사고 영역에서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평화의 철학과 실천 강령을 읽어내는 책이다.
김 대 식 지음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평화교실06
■ 192쪽 I 11,000원 I 135*200 I 2018년 7월 20일
■ ISBN 979-11-88765-21-8 9 4300 / 세트 979-11-86502-45-7 9 4300
■ 문 의 : 02)735-7173
■ 출판사 서평
폭력의 시대는 가고, 평화의 시대가 오는가?
촛불혁명은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비폭력 평화 혁명이었다. 비폭력 평화혁명으로 폭력적 적폐정권을 무너뜨리고, 전쟁 직전의 한반도를 ‘평화 무드’가 넘쳐흐르게 만들었고, 폭력의 절절이라고 할 위수령-쿠데타 예비음모조차 백일하에 드러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폭력의 시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가? 평화의 세상은 오는가?
최근 미투 운동 연장선에서의 페미니즘(?) 시위가 점입가경이다. 여성이 한 치의 고통도 겪지 않는 세상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선구적인 여성들의 함성은 피 흘리기를 불사하는 격정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여성들만이 모여 여성문제를 제기하는 ‘불편한 용기’라는 집회에서 벌어지는 언어폭력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 쉽게 사라질 수는 없음을 절감한다.
함석헌은 이미 50년 전에 “자신의 인권이 소중한 만큼 타자의 인권도 소중하다는 생각”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자칫 훈련이 되지 않은 인간이 자신의 인권을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한다.(150쪽)”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나아간 거리가, 여전히 이러한 것이다.
종교는 어떠한가? 80도 중반을 넘긴 노승이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써야 하는 게 오늘의 종교계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요, 복면만 안 썼지 도둑이 들끓는 곳에, 각목이 안 보인다고 폭력이 없달 수는 결코 없다. 학교에서도 학교-학생, 교사-학생, 학생-학생 간의 폭력은 또 얼마 만큼인가? 최저임금이나 임대료 등을 둘러싼 경제 현장에서의 폭력은 또한 어떤가?
함석헌이 “1968년 9~10월에(중략) 민중은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타자를 적대감을 가지고 대하면 안 되며 서로 더불어 살기, 같이 살기라는 인간성에 토대를 두는 삶의 민중, 곧 협화(協和)하는 민중이 되어야 한다(144쪽)”고 한 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도, 민중은 ‘난민’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전진하고 있는가?
평화는 실재하는 물건인가?
폭력이 없는 상태로서, 평화는 신기루와 같은 것인가? 한 인간의 생애로 보아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듯한 나날들 속으로 어김없이 폭력[불행과 불평]은 끼어들게 마련이다.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시공간과 ‘실제로 평화로운’ 시공간의 차이까지 헤아려 따져 보면, 사람의 한평생, 인류 역사에서 평화로운 시공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오직 평화(샬롬)!’ 하자는 이슬람이나, 평화의 사도 예수나 간디와 같은 ‘성현’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물론, 평화를 주장하는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끼리도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를 거스르는 일들을 거듭하여 재생산해 왔다. 여러 종교들과 철학에서 평화와 사랑, 조화라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해 왔음에도 여전히 평화는 먼 미래의 일인 현실은 역설이다.
평화는 ‘같이 살자-협화(協和)’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쯤에서 함석헌의 “비폭력적 저항”에 다시 눈길이 간다. 함석헌은 예수나 간디의 비폭력주의, 불살생의 평화론을 내세우면서 실천적 저항자로 노력해 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저항적 평화론을 끊임없이 운동과 생성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의 지향점이 바로 ‘같이 살기’ 운동이다. ‘같이 살기’는 together나 with만이 아니다. 함석헌은 예수가 지향하는바 ‘전체’(wholesome)를 위한 같이 살기를 제안하며, 그러기 위해서 협화(協和, harmony)라는 것을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방식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의 바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협화는 일원화를 거부한다. 따라서 언어, 역사, 종교, 국가, 자연, 통일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의 평화담론을 위한 개념들과 그에 대한 시각들은 하나 같이, 그것들을 어느 한 자리에 고착화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것 역시 타자에 대한 맹목적인 강요나 강제를 넘어선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 개념, 다양성의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함석헌 사상의 맥을 잡아내기가 간혹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아가 언어의 지체성(遲滯性, 더딘 이해), 역사에 대한 현상학적 태도(현실의 충실한 기술), 종교의 절대성을 벗어나려는 시도,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세계시민적 주체성, 범생명적 인식과 우주적 평화, 중립적 국가론의 가능성 등은 모두 같이 살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평화와 자유로 가는 길,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 점에서 같이 살기와 협화(協和)는 아나키(anarchie)와도 맞닿아 있다. 둘 다, 폭력적인 경쟁을 하지 말고 상부상조하며 살아가자고 제안한다는 점이 닮았다. 한편으로 아나키는 절대자유, 즉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체제, 제도, 국가, 민족에 저항하는 태도로 드러난다. 그래서 아나키는 늘 슬프고, 외롭고, 위험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아나키는 두려움을 불러온다. 안전을 대가로 구조와 틀 안에서 안주하던 사람들에게는 거기에서 탈피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한 번도 구조와 틀을 탈출한 적이 없이 삶의 대부분을 불안/폭력에 노출된 채 간간이 주어지는 안정이라는 징검돌을 밟으며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탈(脫)한 이후의(post)의 평화와 자유를 향한 희망보다는 지금의 노예적 안정이 더 소중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한 평화는 영원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 탈출(ex-hodos)은 여전히 그 목적지인 평화로운 거처(post, positum)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소르본대학 명예교수 자닌 샹퇴르(Janine Chanteur)도 “평화? 그 길은 우리를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 평화는 계곡들 사이를 연결한 높은 외길과 닮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일찌감치 그 탈출을 감행했던 현자가 있었으니, 우리는 그 시대적 현자인 함석헌으로부터 평화와 자유를 향해 걷는 법을 배운다면, 평화와 자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다. 다만 이제 그 탈출기(exodus)를 새롭게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씨ᄋᆞᆯ들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 차례
들어가는 말: 순수한 평화의 시원을 찾아서
제1장 함석헌의 언어평화론: 탈언어적 평화
1. 함석헌의 언어 모호성과 자유로운 사유 확장
2. 언어의 보편성과 타자 인식 범주로서의 ‘바탈’
3. 언어의 탈지배적 비판 기능[지체성]을 통한 평화
제2장 함석헌의 절대자유평화론: 탈국가주의적 평화
1. 민주주의, 과연 평화주의인가?
2. 탈영토적 국가와 탈민족주의
3. 중립적 국가 평화론
제3장 함석헌의 종교평화론: 탈종교적 평화
1. 궁극의 무종교적 세계
2. 상대세계에 대한 저항
3. 무교회주의와 무(無)에 대한 해석학적 평화
제4장 함석헌의 생태평화론: 탈인종적·탈인간중심적 평화
1. 자연, 그 둘러-있음의-세계와 평화
2. 생태적 평화를 위한 상호관찰자로서의 자연과 정신
3. 몸으로서의 전체인 우주의 평화
제5장 함석헌의 역사평화론: 탈역사적 평화
1. 뜻의 보편성과 역사
2. 타자의 시간 체험의 인정과 뜻으로서의 현상학적 역사론
3. 생각, 시간과 역사의 평화를 위한 근본 토대
제6장 비폭력주의와 협화주의
1. 비폭력의 실천철학자로서의 함석헌
2. 폭력의 무화와 삶의 형식으로서의 평-화
3. 평화의 영성을 위한 예수의 비폭력 투쟁과 퀘이커 사상
4. 비폭력의 미학과 함석헌의 아나키즘적 평화의 감성
5. 폭력이라는 언어와 실재에 대한 저항을 넘어 협화의 정신을 향하여
나오는 말: 상보적 주체성과 상부적 주체성
보론: 왜 평화는 아나키여야만 할까?
■ 책 속으로
제1장 : 함석헌의 언어평화론: 탈언어적 평화
함석헌 자신이 근대사를 지나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경험하면서 철학, 정치, 교육, 역사, 통일, 여성, 종교 등 당대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발언을 하였다. 그런데 꾀나 시간이 지난 지금의 맥락에서도 함석헌의 이야기와 언어가 여전히 통용되고 일리가 있는 까닭은 그의 말법이나 논리, 그리고 언어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폭압적이거나 지배적인 언어를 구사하여서 한 사태나 개념, 그리고 언어나 관념을 강제적으로 인식시키고 행동화하려는 의도는 과도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그런 방식으로 누구든 함석헌의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탈 언어적 평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29쪽)
함석헌은 세계와 신을 사물화하려는 폭력에 저항하는 비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세계와 인간,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거대 집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비판으로서의 함석헌의 언어는 철학적,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종교적, 문학적 수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지체성’(遲滯性)의 수사학을 구사한다. 다시 말해 함석헌의 말법은 언어를 지연시키거나 현상 기술에 대해서 더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언어적 지체성은 골똘하게 생각함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33쪽)
제2장 함석헌의 절대자유평화론: 탈국가주의 평화
국가와 민족의 경계선이 개별 인간 존재의 사유와 자유의 제한선일 수는 없다. 그 경계선을 넘어서 세계 인류의 선을 지향하는 사유와 행위를 한다는 것이야말로 세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의식의 전환이다. 습관적 사유, 습성적 이념에 매몰되어서 마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최고의 진리인 양 믿는 순간, 그 진리가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국가의 진리가 아닌 진리의 국가가 더 개별 인간의 자유에 부합한다. 국가의 진리는 폭압으로 강제하지만 진리의 국가는 인간의 자아와 공동체의 체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의 일부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과 자아의 확장이 국가가 될 때에, 국가가 이성적 방향으로 틀지어질 수 있는 것이다. (43쪽)
제3장 함석헌의 종교평화론: 탈종교적 평화
함석헌은 반드시 종교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종교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보편개념으로 종교를 설명한다. 평화를 훌륭한 실현 가치로 여긴다면 보복 대신에 정신, 도덕, 양심을 기초로 하는 사랑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종교적 개념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규정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56-57쪽)
현실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상대세계의 절대화를 타파하는 노력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함석헌은 그것을 위해서 예수와 같이 혁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중략) 예수 혁명을 하려고 하는 소수파의 성격은 상대세계에 대한 철저한 회의이며 그 고유한 행위의 동기는 살림에 있다. 살림은 마음 살림, 종교 살림, 환경 살림이어야 한다. 상대세계의 부당한 죽임의 문화가 가진 정치화된 체제는 반평화적, 반생명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62쪽)
이웃 사랑에 대해서 아무런 사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종교주의, 교회주의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웃과의 평화는 윤리적 과제임을 명시적으로 얘기한 함석헌의 논조로 볼 때, 그와 같은 전체 민중을 포괄하지 못하는 종교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꼬집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중략) 무교회주의라는 이상 언어(理想 言語)가 결국 종교 간의 평화, 비종교인과의 평화, 곧 더불어 살기, 같이 살기와 동일한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74쪽)
제4장 함석헌의 생태평화론: 탈인종적·탈인간중심적 평화
생태계의 평화, 자연의 평화, 생명의 평화, 우주의 평화는 ‘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모든 존재자들을 주변화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중략)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존재자들은 생명적 세계(welt)를 위하여(um) 서로 공생한다. 위하여 있다는 것은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움, 자연적 세계를 위해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함께 있는 것, 더불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움이고, 인간의 지배적 자리만을 탐을 내어서 인위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반생명적, 반평화적 행위이다. (79쪽)
중심과 변방을 운운하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만 자연과 인간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병리적 인간중심적 규칙을 벗어나서 우주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함석헌은 “이 우주는 한 뜻이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환경세계는 인간의 생활세계와 중첩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주적 체계 혹은 우주적 세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뜻이 생명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좋고, 유신론적 입장에서 신이라고 해도 좋으나 중요한 것은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82쪽)
함석헌은 역설한다. “생명은 지속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또 한 번 해보는 것이 생명이다.” 몸으로서의 우주와 몸과 연계된 정신은 인간의 도시 생활세계의 반생태적 제국주의나, 경쟁과 착취와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기주의와는 다른 생명체 구조로 되어 있다. (94-95쪽)
제5장 함석헌의 역사평화론: 탈역사적 평화
역사의 역사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과 의지는 뜻이라는 주체적인 단어로 모아진다. 뜻이 없는 국가, 민족, 부족, 지역은 없을 것이다. (중략) 뜻은 특정한 존재자에게 부여되거나 소유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존재자가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하는 보편적인 힘과 의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뜻은 한 번도 소유된 적이 없다. 오히려 뜻은 항상 민중의 편에서 역사적 실천을 통해서 골고루 잘 살도록[평-화] 보살폈기에 다시 역사 이후의 역사, 시간 이후의 시간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105쪽)
역사는 인간이 벌인 사건들의 종합이다. 함석헌은 그 사건을 사실(事實)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객관성을 중요한 준거로 삼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관적 삶이다. 다만 사실의 객관성과 주관적 삶이 만나서 살림을 지향한다. (중략)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사색’이다. 달리 말하면 생각이다. 시간과 사건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색하는 주체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기술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의 역사요 이성에 의한 해석의 역사적 주체로 살아간다. (113쪽)
오늘날 폭력은 정신적 외상으로서 개별적 존재를 넘어 다수의 타자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급기야 사회적 신경증이나 정치 테러 형식으로 출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폭력의 승화는 은밀하게 법과 질서, 그리고 권력으로 위장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말로는 폭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폭력성을 어떻게 무화(無化)시킬 것인가 하는 논의와 실천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폭력 혹은 폭력성을 완전히 무화시키지 않는다면 음성적 발화만으로는 폭력을 막을 수 없다. 무화시킨다는 것은 무력화시킨다는 것과는 다르다. (중략) 그것을 실천적 이론으로 접목시킨 인물이 바로 한국의 현대사상가이자 실천철학자 함석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21-122쪽)
제6장 비폭력주의와 협화주의
“비폭력이란 모름지기 폭력을 사용할 수 없는 약자의 무기가 아니라 충분히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을 사용하는 강자의 무기”이다. 김삼웅은 시종일관 비폭력의 언어와 감성을 실천적으로 펼쳐 왔던 함석헌을 평화주의자라고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모든 탐구, 실천, 도전, 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에 있었다. 국가주의와 국수적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일체의 권위주의를 배격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전적 평화정신으로 현대의 ‘무장된 평화체제’를 반대했다.” 156쪽)
(함석헌이 주장하는바) 서로 더불어 살기, 협화하는 정신을 통해서 서로 돕고 격려하는 사회를 만드는 그런 비폭력적인 사회, 비폭력적인 윤리 공동체를 구체화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비폭력적 저항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anarcho-individualist가 되었든, 아니면 anarcho-communist나 anarcho-syndicalist가 되었든 삶의 자유와 자율성을 지배하는 모든 체제와 지배, 심지어 국가에 대한 저항과 반성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본다. 그것이 곧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자기 생각’, ‘자기 정신’으로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 (160쪽)
우리는 세계의 평화, 그리고 국가 간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 종교 간의 평화, 종차 간의 평화, 성별 간의 평화 등 여러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상존적, 상보적, 상부적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을 함석헌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협화주의적 평화’이다. 협화는 학습된 의식이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생각, 자기 사상을 가지고 사는 삶이며, 절대적 자유를 통한 같이 살기 운동과 다르지 않다. 협화주의의 근본 토대는 민중으로서의 씨의 주체적인 생각이다. (167쪽)
■ 저자 소개 _ 김대식
종교학과 철학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은 후 비정규직 대학 강사로 있으면서 한국종교연합(URI-Korea) 지도위원,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예수와 신앙 언어』,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한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해석, 현상학적 인식론과 존재론, 환경철학과 정치미학, 해체구성적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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