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말하다: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김선희_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개벽신문 79호(2018년 11월 15일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정치, 사회, 지적 분화를 촉발한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였던 ‘서학’ 즉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지식을 통해 조선 후기의 사상적 변화를 검토하기 위한 시도이다. 주지하듯 16세기 말에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중국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신학, 철학, 천문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구 지식들을 한역했다. 그 결과물인 서학서들은 18-19세기 조선 지식장을 입체화하고 다변화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이 서학서에 담긴 서양 지식을 ‘서학’ 혹은 ‘천학’이라고 부른다. 서학은 조선 후기의 지적 상황을 조망하는 하나의 창이자, 내부의 변화를 촉발시킨 하나의 변수로 작용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경전들을 연구한 예수회원 마테오 리치는 유럽의 학문적 우수성을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중국인들을 기독교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과정에서 세계 지도, 천문학, 수학 등의 실용적 지식과 자명종, 대포, 악기 등을 중국에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반응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달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통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개방적인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테오 리치로 대표되는 서학의 스펙트럼은 본래의 경로를 벗어나 중국과 조선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물론 조선에 파장을 일으킨 동아시아를 향한 예수회의 지적 도전이 몇 세기에 걸쳐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파장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를 단순히 ‘발전된 서양 지식’이라고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발전시켜 오던 형이상학과 인간론,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의 체계 위에,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로 서양의 지식을 보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지식의 유입은 타자로부터의 일방적 계도나 주입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의 형질 변화에 가깝다. 중국과 조선인들은 외래의 지적 자원을 통한 자극을 자신들의 전통에 다면적으로 적용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자기 이론의 틀을 돌파하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 논리의 혼란을 겪으며 변화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단순히 서양 학술을 학습한 학습자나 모방자로 평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전제가 있다. 서학이 동아시아에 유입되고 조선 지식인들이 그로부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과 정통을 파괴할 위험성을 경험하던 시기에 조선 사회가 나름의 독자적 발전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이러한 인식은 ‘근대성’이라는 말에 막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우리가 서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특정한 ‘근대성’을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세운다면 조선 후기에 이루어지고 있던 독자적 발전의 경로는 그저 폐쇄와 정체로 보이기 쉬울 것이다. ‘근대성’을 검사의 지표로 사용하는 한 조선은 언제나 실패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서구 근대를 ‘진보된 것’, ‘발전된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조선은 영원히 ‘정체된 것’ ‘낡은 것’으로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후기는 나름의 지적, 사회적 변화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보통 실학으로 명명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사상적 전환을 검토하고 평가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자 틀은 ‘실학(實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는 공리공담으로 치우져 있던 주자학과는 달리,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한 다양한 분야의 실용적 지식이 등장했던 시대 즉 ‘탈주자학을 지향했던 실학의 시대’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 실학은 아직까지도 그 범위, 경계, 특성, 대상이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는 개념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 새로운 학문적 시도가 없었다거나, ‘실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현재 실학이라고 부르는 모종의 학풍이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같은 형태였는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체제 교학이던 성리학을 흔든 작은 흑점은 ‘실학’이 아니라 ‘서학’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실제적인 학문의 파급력이나 영향력과 관계없이 단지 함께 모여 관련 서적을 읽고 공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피의 숙청을 당할 정도로 초기의 서학 수용자들이 조정과 지배층의 강력한 비판과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서학이 지금 우리가 실학자로 부르는 인물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 지식인들 중 일부가 서학을 받아들였다 해서, 이들의 사상적 지향을 쉽게 ‘근대성’의 관념 안에 넣고 평가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서학에 반응한 조선 지식인들은 사실상 서학이라는 새로운 사유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서학을 통해 자기 안의 새로운 영토를 찾고 이를 넓히고자 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경향은 사실 일부 남인이나 실무에 종사하는 중인들만이 아니라 상당히 폭넓은 지식인들이 관여한 일반적 상황이었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다양한 서학서들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시헌력(時憲曆)’, 즉 서양식 역법이 국가적으로 공인되는 과정에서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에 관한 관심도 높아져갔다. 특히 중국의 새로운 문물과 지적인 방향에 큰 관심을 두었던 조정이 적극적으로 중국 서적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서학서 역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조선 조정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중국으로 파견하던 북경 사행(使行), 즉 연행(燕行) 역시 서양과 그들의 문물, 지식, 서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러나 서양 문물과 서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의 정도와 관계없이 서학을 실제로 학술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한 학자들이 숫적으로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리학을 정통 즉 정학(正學)으로 여기는 유학자들 사이에 서학이 여전히 이단(異端)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교적 거부 반응이 적은 자연학과 수학, 기술적 측면은 당대 주류 학자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관련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던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서학을 연구한 학자들의 비중과 관계없이 조선에서 서학이 남긴 파장의 비중은 대단히 강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에 유입된 다양한 서학서들은 조선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의존을 넘어서 스스로를 독자적인 문명의 주체로 자각하도록 새로운 지적 통로를 제공했다. 새로운 지식을 담고 있는 서학서들과 지도 등은 중국의 이민족 정권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중적 감정, 즉 소중화로서의 문화적 자신감과 오랑캐로 부르던 만주족의 중원 통치에 따른 정치적 불안감이 만든 일종의 사상적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중요한 지적 자원이었다.
본래 조선의 상층부는 외래문화 수용 자체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후 조선은 오랑캐의 나라라는 이유로 청을 멸시하면서 명의 진정한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소중화 의식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점차 중원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된 강대국 청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청에 대한 복합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관계없이, 적어도 학술의 측면에서 조선의 상층부와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지식과 문물에 언제나 시야를 열어 두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지적 개방성 속으로 한문(漢文)으로 번역된 서양의 학술 지식들이 수용되기 시작한다.
서학서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학술 언어로 낯선 타자의 사유와 세계관, 학문적 담론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수광부터 이익, 정약용, 홍대용, 최한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선 유학자들이 서학의 사상적 도전에 응답한다. 종교와 철학, 자연학과 수학, 심지어 음악과 미술 등이 다양한 영역이 뒤섞인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학술 체계, 서학 앞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의 세부들을 평가하고 수용과 배척을 결정한다. 이 수용과 배척에서 중심과 기준이 되었던 것은 언제나 자신들의 전통적인 지식 체계인 유학이었다.
이들은 유학을 토대로 새로운 지적 자원과 관점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조건과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서학이 수용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는 중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한 청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와 동시에 조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중의 과업이 주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서학을 통해 중국과 대등한 강력한 문명의 등장이자, 중국을 능가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보유한 위협적인 타자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낯선 경험 속에서 어떤 이들은 중국을 상대화하며 조선의 가능성을 최대로 확장한 반면, 어떤 이들은 중국의 그늘 아래서 온건한 방식으로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연행에 다녀온 뒤 자신들이 경험한 서양 문화와 지식을 연행록에 남긴 유학자들과 서학을 포함하여 중국 지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학론자들이 전자에 가깝다면 이단이라는 관점에서 서학을 비판했던 안정복, 신후담, 이기경 등의 남인들 그리고 서학-천주학을 강력하게 탄압하고자 했던 노론들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서학은 조선 후기에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방식으로 내부와 외부에 흔적을 남겼다. 서학을 접한 지식인들 중에는 실용적 차원에서 서학의 자연학과 수학 이론을 수용한 성호 이익, 홍대용, 최한기 같은 학자는 물론 정약용과 같이 서학에 담긴 철학적 논리와 구도를 유학 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창조적 자기 철학을 구성한 학자도 있다. 신후담, 안정복 등이 보여주는 척사의 태도 역시 서학이 발생시킨 중요한 긴장 중 하나다. 이들은 모두 목적을 위해 어떤 사상적 자원도 편견 없이 사용하며 결정적으로 자기 철학 안에서 완전히 소화하는 강력하고 밀도 높은 통찰력의 소유자들이다.
서학이 조선 지식인들에게 지적 자극이 되었던 것은 서구 지식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양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학서에서 강조하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 지성적이며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는 성리학에서도 핵심적인 연구 주제였고 더 나아가 국가 운용에 필수적인 천문 역법과 수학에 관한 지식 등은 ‘치인(治人)’ 즉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유학자들에게 요구되던 기본적인 분과 지식이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유학의 학술 주제들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관점의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던 서학에 접근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낯선 서학에서 자기들의 절실한 문제의식과 관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거울’이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본다면 조선 지식인들과 서학의 만남은 외부의 관점을 통해 자기 언어를 재검검하고 이론적 세부를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통한 진정한 문명을 향한 유학자의 자기 반성이자 확장의 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세계관의 조우를 일방적인 전달이나 거부가 발생했던 닫힌 영역이 아니라 상호 간의 논쟁이 발생했던 사상적 개방 공간으로 보고 이들의 대응과 변용을 철학적 논리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났던 시대가 그려내는 그림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형상을 띤다. 어차피 각각의 문화적 자연적 조건이 만들어내고 성장시켜온 세계관의 산물들을 상대에게 이해시킨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일종의 관념적인 전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서양의 만남을 학문적 엄밀성이나 정합성의 차원이 아니라 심층적 의식과 학문적 신념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강렬한 신념과 동기는 정오 판단, 시비 판단, 결과론적 평가에 담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서학을 만난 조선 지식인들의 신념과 동기에 접근하는 하나의 조망점이 되기를 바란다.
→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도서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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