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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오기영 전집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5. 16. 15:01

동전 오기영 전집(전6권)

■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공간까지 신문기자 및 문필가로서 왕성한 취재 및 시사 논평을 투고하였던 오기영 선생의 생전 단행본과, 기고문 등을 모아 새로 역은 책 등 전6권의 전집이다. 이 책들은 한 가족의 투쟁-고난사, 한 기자의 취재기를 넘어 민족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서사시요, 민족의 정신과 문화, 생활의 보고요, 통일독립 미래의 귀중한 길잡이로서 살아 숨 쉬는 고전이다.

 



  • 분야 : 역사, 인물
  • 저자 : 오기영
  • 기획 : 오기영 전집 편찬위원회
  • 발행일 : 2019년 5월 18일
  • 가격 : 140,000원
  • 페이지 : 총 1988쪽
  • 제책 : 전권 양장, 케이스 포함
  • 판형 : 152×225mm
  • ISBN : 979-11-88765-40-9 (04080)

 

전집은 아래와 같이 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 제1권 『사슬이 풀린 뒤』272쪽(화보 24쪽 포함) / 신국판(152×225mm) / 20,000원
  • ▲ 제2권 『민족의 비원』296쪽(화보 16쪽 포함) / 신국판(152×225mm) / 20,000원
  • ▲ 제3권 『자유조국을 위하여』224쪽(화보 8쪽 포함) / 신국판(152×225mm) / 20,000원
  • ▲ 제4권 『삼면불』356쪽(화보 16쪽 포함) / 신국판(152×225mm) / 25,000원
  • ▲ 제5권 『3면 기자의 취재-일제강점기 기사』/ 472쪽 / 신국판(152×225mm) / 30,000원
  • ▲ 제6권 『류경 8년-일제강점기 칼럼』368쪽 / 신국판(152×225mm) / 25,000원

■ 출판사 서평

한국 근현대사의 遺事이자 파노라마!
우리는 비로소 민족의 교과서를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1945년 해방이 된 다음날. 오기영은 망우리 가족 묘지를 찾아갔다. 무덤 위에 태극기를 덮어 놓고 그 앞에 서서, 오기영은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오기만, 그리고 오기만의 후원자이자 그의 아내인 명복이 안장되어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조문하는 이들도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 중에 해방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놓여나온 동생 오기옥과 조카 오장석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된 적이 있는 여동생 오탐열,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친정오빠를 잃은 오기옥의 부인,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한 남편을 둔 누님이 함께하였다.

그 자리에서 오기영은 소리친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의 탄성이면서, 심장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통곡이었다.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가족사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시작된 ‘적폐청산’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과거의 문제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를 향해, 구김 없이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통일 조국의 평화세계을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적폐의 역사에 짓눌리고 가려져 묻혀 있는 정의로운 역사를 발굴하여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 역사의 진면목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일이다. 적폐의 청산과 미래의 건설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민족사의 구성원들이 마땅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고, 받아야 할 기림을 받도록 하고, 얻어야 할 명예를 누리며, 기억되어야 할 뜻과 정신이 온전히 기억되도록 하는 데서만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 돌아간 영웅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를 기억하며 살아갈 후손들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기본이며 근본이 되는 일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러한 민족사 복원의 염원과 움직임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두드러진다.

그런 가운데 선을 보이는 『동전 오기영 전집』(전6권)은 우리가 소중히 모시고자 애쓰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고난에 지지 않고 억압게 굴하지는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국 현대사의 ‘유사(遺事)’이다. 진즉에 발굴되고 널리 선양되었어야 할 이 귀중한 기록이 2002년에 일차로 소개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증보되어 전6권으로 발간됨으로써, 우리는 민족사의 귀중한 서사시(敍事詩)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오기영의 가족은 어떤 가족인가?


오기영의 가족사진


오기영의 가형인 오기만의
일제 감시대상인물카드

1944년 12월, 오기영의 동생 오기옥은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오기영은 “형님이 잡혀 다니고 내가 잡혀 다닐 때에는 그다지 괴로운 줄도 몰랐더니만 손아래 아우가 잡혀간 뒤에 처음으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비로소 과거에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알았다.”며 마음 아파하지만, 그러나 정작 백방으로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누이와 자신은 일제 경찰에 빌 수도 없고 동생에게 전향을 권유할 수도 없다며 오히려 누이를 나무라기까지 한다. 한편으로 결혼 일주일 만에 생과부가 된 계수(제수)를 위로하며 오기영은 되뇐다.

“어지간히 거친 운명에 시달리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오기영 가족의 거룩한 삶의 내력은 1948년 손수 지어 간행한 『사슬이 풀린 뒤』라는 자서전(自敍傳)에 오롯이 실려 있다. “우리가 같이 체험한 / 피묻은 이 기록을 / 순국의 혁명가 / 선형(先兄) 오기만과 / 그의 동지요 / 나의 사랑하던 아내 / 이미 추억의 세계로 / 돌아간 김명복의 / 두 영(靈) 앞에 / 울며 바치노라.”라는 헌사가 담겨 있는 『사슬이 풀린 뒤』는 3·1운동 당시 부친(오세형)이 배천읍 만세시위를 주동한 뒤 투옥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기영 또한 3·1운동으로 투옥된 교장 선생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그해 12월 친구들과 모의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11살의 나이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경험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기영 일가족의 민족운동사-고난사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 밖에도 그의 가족들은 그야말로 민족운동 전선에서 한결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거듭하였다. 투옥되어 혹은 죽고, 혹은 병고에 시달렸다. 그 가족의 수난사를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 오세형 – 부친, 고향, 배천의 3·1운동 주동자로 투옥되다
  • 윤인의 – 모친,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으로 감당하다
  • 오기만 – 형. 신간회 사회주의 운동 등.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 (1905-1937) (건국헌장 애국장)
  • 오기영 – 3·1운동으로 투옥(11세), 사상범 투옥, 수양동우회 투옥 등 총4회 투옥
  • 오기옥 – 남동생.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 (1919-1950?)
  • 김명복 – 부인. 오기만의 동지.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
  • 오장석 - 조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1922-?)
  • 오탐열 - 오기영의 누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 강기보 - 오탐열의 남편, 수감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가족사이면서 민족사, 민족사이면서 서사시

누구보다도 오기영 자신이, 직접 기록하는 그 가족의 수난사 『사슬이 풀린 뒤』의 민족사적 가치와 의의를 자각하고 있었다. 『사슬이 풀린 뒤』의 서문 격으로 책 서두에 배치된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는 “어머니. 쇠사슬에서 풀린 기쁨은 쇠사슬에 얽혔던 사람 보다 더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는 노예의 어머니가 아니요, 나는 노예의 아들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오기영은 다음과 같이 의의를 밝힌다; “우리는 이 모든 아픈 과거를 잊지 말아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당대(當代)뿐이 아니라 길이 자손에게까지 이 피 묻은 기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를 침략하였던 야만에 대하여 두고두고 적개심을 가져야 하며 그 적개심을 자손에게 상속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우리의 자손이 그들의 자유를 영원히 지켜 나가는 노력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 우리 가족만이 겪은 일이라 하면 아무런 문제될 가치가 없습니다마는 형님의 말과 같이 이러한 일을 당한 조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기록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42-43쪽)”

한마디로 이 기록은 한 가족의 투쟁-고난사이면서, 그 가족이 깊숙이 간여했던 독립운동사의 내밀한 증언록이다. 오기영은 『사슬이 풀린 뒤』에서 그 가족의 고난사뿐 아니라, 그들이 간여하면서 만난 김형선 형제들, 박헌영을 위시하여 3·1운동 당시의 운동 과정, 하다못해 일제강점기 말기의 ‘한글 사용 금지’ 풍경까지를,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이 생생한 모습으로 증언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하나하나가 고난과 눈물과 죽음으로 점철되었으되, 결코 패배의 기록이 아닌, 투쟁과 승리의 서사시로 오롯이 살려 내고 있다는 데 이 책의 성취가 있다.

『사슬이 풀린 뒤』를 비롯한 오기영 전집의 역사적 가치

『사슬이 풀린 뒤』는 처음에 해방공간에서의 최고의 잡지라고 할 <신천지>에 4회에 걸쳐 초고가 연재되었다. 이 기사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내서, 일부 학교에서는 이 부분을 복사하여 교재로 썼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를 증보하여 단행본 출간을 하려고 출판사에 맡긴 뒤 2년이 되도록 출간이 미루어졌다. 그러는 동안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좌우익 투쟁의 혼란으로 접어들었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하여 오기영은 처음에 쓴 서문에 이렇게 덧붙이기에 이른다; “3년 전 해방의 감격은 벌써 하나의 묵은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기쁘더니, 그렇게도 감격스럽더니,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는 이 기쁨과 감격 대신에 새로운 슬픔과 환멸이 자리를 바꾸어 들어찼다. 이제 제2해방이 있어야 할 것은 누구나 아는 바요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도 누구나 초조하다. 그런지라, 3년 전의 해방을 정말 해방으로 알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엮은 이 책을 읽을 때에 누구나 달라진 세월에 부대끼며 다시금 슬픔을 아니 느낄 수 없이 되었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잘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따로 있고 인민은 여전히 호령 밑에서 불행과 무지와 빈곤에 울어야 한다면 이것은 인민의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잡은 지배 세력이 바뀐 것뿐이지 인민 전체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 뒷날에 정말 해방이 오거든 또 한 번 『사슬이 풀린 뒤』를 써야 할 까닭이 있다.”

빛나는 역사의식, 미래를 투사하는 시선

오기영이 1948년 12월에 쓴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에서, 해방되던 날의 감격을 회상하며 쓴 대목은, 전집을 통틀어 백미라고 해도 좋을 혜안을 담고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통일독립/독립통일의 그날을 예견하는 시선이요, 그래서 염원이자 예언이며, 비원이자 선언이다;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서만 해방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시 봉건시대로 돌아갈 리가 없고, 몇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제도가 생길 리 없으니, 우리는 실로 4천 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모두 이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 이 기쁨에 참예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어저께까지 동포의 이름을 팔아서 압박자에게 아첨하던 무리요, 거기서 조각 권력을 얻어 가지고 동족을 치던 무리뿐일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고초가 끔찍하나 나는 오늘 쥐구멍에 숨어야 할 무리에 들지 않고 이렇게 거리에 나서서 민족의 기쁨 속에 섞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에 또다시 가슴은 감격에 벅차다.”

8·15 해방은 우리 민족 최초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란 ‘하늘백성(天民)’이던 바로 그 순간의 회복이며, 4천년 동안의 고난적덕(苦難積德)으로써 도달한 ‘하늘백성’의 시대가 비로소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기영의 시선은 어쩌면 당대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시선이며, 오늘의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는 날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될 시선의 높이이기도 하다.

동전 오기영 전집 전6권은 해방공간에서 그러했듯이, 우리가 민족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역사를 써나갈 앞으로의 시대에 남과 북 모두에 ‘민족교과서’로 두고두고 읽혀야만 유감이 없을 것이다.

■ 전집(전6권)의 구성과 내용

이번에 총6권으로 간행되는 오기영 전집은 오기영이 생전에 간행했던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 등 네 종 이외에 동아일보 평양특파원 시절 취재보도한 신문기사를 주로 한 제5권 『3면 기자의 취재』와 칼럼류 등을 묶은 『류경(=평양)8년』을 추가하였다. 또 해방공간에서의 취재기 및 칼럼을 묶은 『삼면불』은 이번 전집 간행에 즈음하여 새로 발굴한 기사를 다수 증보하여 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제1권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오기영이 자신과 가족들의 투쟁-수난사를 회고기로 엮었다. 본문 외에 역사학자 강만길, 서중석의 추천사, 오기영의 막내딸(오경애)의 회고담, 편찬위원회의 간행사, 전집 간행을 추진했던 외손녀(김민형)의 <할아버지 흔적 톺아보기>외에 <동전 오기영 연보>와 <전집 편찬 기본 원칙> 등이 수록됐다. 또 권두에는 오기영 가계도와 가족 사진, 그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신문 기사 등 24쪽의 화보가 실려 있다.

제2권 『민족의 비원』은 1945년 12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잡지와 신문 등에 기고한 23편의 정치·사회평론을 모은 평론집이다. 이 글들은 해방의 감격도 잠시 “모두 정치가가 되어 버리고 마는 통에… 산업진을 지키는 이가 없었”던 현실 속에서, 오기영이 언론계에 복귀하는 대신 “황폐해진 생산 부문의 재건을 위하여 일졸오(一卒伍)”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몸담은 이래로 쓴 글들이다. 그는 “자주적 경제 건설과 생산, 인민의 민생 문제 등”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겪은 바를 토대로 현하 조선의 최대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문제라는 점을 피력한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해방의 당연한 귀결점으로 인식되었던 통일독립의 꿈이 급속히 좌절되”면서 “조국을 재건한다는 미증유의 호기가 다시금 민족자멸의 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던 당대 현실을 타개해 보려는 심정을 피를 토하듯이 밝히고 있다.
권두에는 그의 글이 실린 『민성』, 『동광』, 『신천지』 등의 잡지 표지, 기사 등 16쪽의 화보가 실려 있다.

제3권 『자유조국을 위하여』는 1947년 5월부터 1948년 6월까지 잡지, 신문 등에 투고한 28편의 정치·사회평론을 모은 평론집이다. 『민족의 비원』 후속편이라 할 이 책이 포괄하는 시대상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좌절, 유엔 감독 하의 남북한 총선거 결정,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 남북협상, 5·10선거 등으로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격변을 거듭하며 숨가쁘게 진행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1년 중에 우리 민족의 두상(頭上)에는 실로 심상(尋常)치 아니한 명암과 희비가 교차(交叉)하였다. 희망인 듯 실망에 빠지고 실망 끝에 다시 희망의 줄을 잡기도 하였”던 시기이다. 무엇보다 오기영으로서는 형님과 매부 죽음으로, 그리고 그를 포함한 가족들이 민족과 함께 고난을 거듭하며 일구어 온 통일독립국가의 꿈이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에 내몰리던 시대상황을 “자멸의 참화가 목전에” 닥친 상황으로 진단하면서, 때론 슬픔으로, 때론 분노와 두려움 속에 조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오기영이 자유주의자로서 중정(中正)의 태도로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는 입장이 주로 제시되었다.
권두에는 1946년 발행된 『자유조국을 위하여』 초판본 표지를 비롯, 『새한민보』, 『신천지』 등에 실린 그의 기사 사진이 8쪽의 화보로 실렸다.

제4권 『삼면불』은 1946년 7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집필한 41편의 짧은 글들을 모은 시사수필집이다. 그 대부분은 『신천지』의 권두언과 《조선일보》의 팔면봉 시리즈에 투고, 연재되었던 것으로 당시 오기영의 주 관심사였던 경제와 민생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오기영은 당대의 정치 문제를 다루는 글에서조차 그 문제의 배경 등을 설명하면서 민생 문제와 연결시켰다. 또 한편으로 오기영은 조선의 ‘통일독립’의 결정적인 시기를 맞아, 주로 중도적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좌우 정치 세력 모두를 비판하는 한편, 그들 모두에게 직접적으로 정책적 제안을 하거나, 민족적 현실을 일깨우기에 애썼다. 그의 글들은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유사(類似) 이데올로기 갈등이라 할 ‘남남갈등’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살아 있는 귀감이 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번에 새로 간행된 『삼면불』에는 해방공간에서 초간된 책의 내용 이외에 미처 단행본에 담지 못한 그 이후의 기고문을 포함하여 증보하였다.
권두에는 1948년 발행된 『삼면불』 초판본의 표지와 표제, 『신천지』에 실린 삼면불 칼럼, 『신세대』에 게재된 오기영의 기사 등이 16쪽의 화보로 실렸다.

제5권 『3면 기자의 취재-일제강점기 기사』와 제6권 『류경 8년-일제강점기 칼럼』은 1928년부터 시작된 오기영의 기자 생활 시기에 취재 보도한 각종 취재 기사(5권)와 칼럼(6권)을 모았다. 이는 일종의 ‘유고집’이다.

제5권의 취재기들은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 또 대공황 전야인 1928년에 시작해서 일제가 식민지 조선 사회를 전시 동원체제로 개편해 나가는 193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평양은 당시 조선 제2의 상공업도시이자, 독립운동가의 재판 및 구금이 다수 이루어진 신의주를 관할하는 지역이기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기사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선(西鮮)과 북선(北線)의 경제와 민생, 일제치하의 교육문화정책, 농촌현황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억압이 발현되는 구체적 양상과 그것이 조선인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켜 가는지를 치밀하게 조사 보도하고, 조선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제시하여 민족사회 여론을 환기, 계몽시켜 나갔다.

제6권 『류경8년-일제강점기 칼럼』의 칼럼 및 기획 취재기들은 평양 특파원으로 지낸 8년 동안 쓴 것으로, 평양 및 인근 지역의 역사적 환경,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의 도시라 할 평양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한편, 오기영이 체류하던 시기에 극성기를 이루던 고무공장 노동자파업 등 사회주의자들과 연결된 노동운동, 소작농들의 투쟁 등 농민운동, 수리조합 반대운동 등을 세세히 소개한다. 특히 모든 사건과 인물을 취재 외에 관찰기, 인물평, 시평, 여행기, 현안에 대한 개선책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상번회와 상공협회, 고무직공 파업, 면옥쟁의, 근우회 등 평양의 사회단체와 그 활동 관련 기사와 칼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지역사회의 현안을 취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참여관찰자 입장에서 사안의 핵심과 문제점을 짚고 나름대로 개선책을 제안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를 단지 젊은 사회면 신문기자에 머물지 않고 나름의 공신력을 가지고 평양 사회의 지도자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또 6권 말미에 부록으로 이 전집의 숨은 주역들 중의 한 사람인 오기영의 형 오기만 관련 자료와 오기옥의 유일한 기고문, 오기영의 기고문 총목록 등을 수록하였다.

■ 책 속으로


『사슬이 풀린 뒤』 초판본 표지

● 제1권 사슬이 풀린 뒤

수년래 조선 내 지하운동의 지도인물 김형선(金炯善)을 체포하였다고 실려 있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오?” 하는 눈치로 내가 형님을 바라볼 때에 형님은 그렇다는 듯이 빙긋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소가 잡혔어!” 하였다. “소가?” 하고 나는 다시 그 주먹 같은 굵은 활자로 나타난 김형선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온순하나 그 눈에 불길이 일던 소를 생각하였다. 산골짜기 샘물이 바다가 된다는 혁명 의욕을 말하던 소를…. 예감은 기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동생은 신의주감옥에 있고 또한 동생은 부산감옥에 있으니 자기는 필시 서대문감옥에 갈 것만 같다고 하던 그 소가 정말 서대문감옥을 가게 된 것이다. 그 소가 바로 이때에 철창 속에 들어가서 14년 후 이 땅에 해방이 와서 감옥문이 열리고야 비로소 세상에 다시 나온 김형선이었다. 8년 징역을 살고 난 뒤에 오히려 전향을 아니 한 죄로 다시 예방구금(豫防拘禁)에 걸려 그대로 감옥 속에 파묻혀 있기 6년 만에 해방과 함께 옥중생활이 끝나는 지독한 운명을 출발하는 소식이 이 신문 기사였다. <118~119쪽>

(형님-오기만은 오기영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 오래간만에 계수가 정성을 기울인 저녁을 자시고 담배를 피우며 상해에서 붙들리던 광경, 그동안의 감옥살이, 병감 오방으로 넘어간 지 한 달 동안에 그 속에서 죽은 사람이 네 명, 그중 한 명은 밤중에 죽는데 가족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서럽다고 하도 울어서 달래느라고 애쓴 이야기, 그 눈물이 질적질적한 눈을 감겨 줄 때 고맙다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이야기, 그 시체 옆에 누워서 그 밤을 지나고 이튿날 조반을 먹은 뒤에야 시체를 내가더라는 이야기, 또 한 명은 자다가 어느 때 죽었는지 아침에 깨어 보니 눈은 흡뜨고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버렸기에 “이런 친구 봤나, 날 좀 깨웠더면 눈이나 감겨 줬지.” 하였더니 다른 병자가 얼굴을 찡그리고 “혼자 애쓰다 죽었구려.” 하더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나도 그 꼴이 되는가 했더니…!”라고도 말하였다. “저이가 노상 한 주일 동안을… 울구 다녔답니다.” 하고 아내가 목이 메어 말끝을 흐릴 때에 형님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한번 그런 꿈을 꾸었다.”고 대답하였다. <151~152쪽>

형님이 잡혀 다니고 내가 잡혀 다닐 때에는 그다지 괴로운 줄도 몰랐더니만 손아래 아우(오기옥)가 잡혀간 뒤에 처음으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비로소 과거에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알았다. 한 주일 전까지도 처녀였던 계수가 차입할 남편의 옷 보퉁이를 들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나 가엾었던지 ‘비밀 있는 녀석이 장가는 왜 가?’ 하고 한 처녀의 운명을 저질러 놓은 아우가 얄밉게도 생각되었다. (…) 더구나 며칠 전에 놓여나온 누이가 겪은 바에 밥이라고 준다는 것은 먹다가 굶어 죽을 지경인데, 미리 붙들린 아우의 관계자들이 그 몹쓸 매를 맞고 유치장에 돌아와서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다시피 응 응 하는 소리에 모두 소름이 끼쳤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야 가라앉힐 수가 없다. 그래서 누이는 어떻게든지 아우를 끌어내올 도리를 차려 보리라고 애를 썼다. 맡아서 취조하는 형사를 찾아보고 사정도 해 보는 모양이요 부탁할 만한 데가 있음직한 내가 그냥 가만있는 것이 불만하기도 한 눈치였다. 그러나 누이의 이러한 생각과 그 행동이 나에게는 몹시 불쾌하였다. <214~215쪽>

이렇게 지긋지긋한 하루하루가 한 달이 지난 뒤에 8월 15일이 왔다. 바라고 바라던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가슴은 그냥 울렁거리고 어떻다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누를 수 없는 채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서울로 달려오고 있는 나의 얼굴에는 땀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그저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라디오 방송으로 일본의 항복을 알았을 뿐이라, 서울은 패잔병의 어떤 발악이 일어나고 어떤 혼란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없지 아니하지마는 필경 오늘내일쯤 아우와 조카는 감옥에서 놓여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한 시각이 바쁘다. 더위에 목이 타건마는 주막에서 물 한 모금 얻어 먹기가 바빠서 그대로 자전거를 달리는 것이다. 열한 살 적의 기미년 생각, 그때 내 볼기짝을 후려치던 보조원의 짐승 같은 얼굴, 그담에도 몇 번이나 겪은 그 염라국 사자 같은 녀석들의 잊을 수 없는 얼굴, 기미년에 갓 나서 방긋방긋 웃던 아우의 얼굴, 지금 옥중에서 하얗게 되어 가지고 나올 아우의 얼굴, 조카의 얼굴, 관뚜껑을 열어젖히고 내려다보던 형님의 얼굴, 숨지기 한 시간 전까지 혁명을 말하던 매부의 얼굴, 이 모든 아픔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어머니의 얼굴, 내가 잡혀갔다 놓여나올 때마다 나보다 더 상하였던 아내의 얼굴…. 이 여러 가지 얼굴이 자꾸만 앞에 어른거려서 자전거는 돌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덜그덕거리면서 달리는 것이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이 짜디짠 물이 자꾸 입술에 스치는 것이다. <223~224쪽>


『민족의 비원』 초판본 표지

● 제2권 민족의 비원

나는 흥사단 사건(興士團事件)*으로 나의 천직이라 믿었던 신문기자의 직업에서 추방될 때에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警務局長)이던 미하시(三橋)로부터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조선이 독립하면 다시 한 번 신문기자를 하리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미하시는 경무국장다운 금도(襟度)를 보이느라고 나의 대답을 탓하지는 않고 다만 연민의 웃음을 띠며 “아마 꿈일 것이라.” 하였다. 그 꿈같은 독립을 누릴 기회를 얻었고, 동시에 이것은 나의 염원이던 신문인으로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염원을 보류하고 일 회사(一會社)의 병졸(兵卒)로 나섰다. 해방 직후 일인(日人)의 손에 파괴되어 황폐해진 생산 부문의 재건을 위하여 일졸오(一卒伍)로서 정신(挺身)해 볼 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19~20쪽>

남조선에서 미운 사람을 치는 가장 간단하고 용이하며 또 즉효를 내는 방법이 ‘아무개는 빨갱이’라는 일언(一言)으로써 족하게끔 되어 있다. 빨갱이면, 적어도 빨갱이 비슷한 자면 권력도 이를 미워하고 폭력도 이를 뚜드리려고 든다. 이것이 정말 빨갱이만을 가려서 그러할 때에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별도의 정치적 입각점(立脚點)에서 비판할 여지가 있거니와 우에 대하여 충고적 비판을 보내는 사람까지도 좌의 비(非)를 비라고 하는 것은 좋으나 우의 비를 비라고 하면 빨갱이와 동률(同律)로 취급하려 드는 것은 이 땅에서 자유주의의 양심까지를 탄압 배격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41쪽>


『자유조국을 위하여』 초판본 표지

● 제3권 자유 조국을 위하여

자유, 이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으며 투옥되었던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직 자유가 없다. 미국의 자유도, 소련의 자유도 모두가 조선의 자유는 아니다. 하물며 독재와 착취가 있고서는 외형이야 어떻거나 실질에 있어서 진실된 자유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외세와 공식(公式)을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비웃을지라도 나는 저 미국보다, 소련보다 더 좋은 자유의 조국을 단념하지 못한다. 밖으로 양강(兩强)의 간섭을 물리치고 안으로 민족적 입장에 귀일(歸一)할 때에 우리에게는 독재와 착취 없는 새 나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12~13쪽>

실제 지금 조선에서는 남의 자본주의와 북의 공산주의가 사생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희생되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 민족이다.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이다. (…) 이제 우리가 세워야 할 새 나라는 어느 일 계급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실로 진실로 새 나라는 어느 일 계급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느 일 세력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느 일당(一黨)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새 나라는 인민 전체의, 자유로운 인민 전체의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민 전체의 진정한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진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같은 혼돈 속에서, 이 허다한 과오 속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우나 또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이 진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금 상호 투쟁에 열병적(熱病的)인 사람들이 열등시하는 그 냉철한 이성이 필요하다. 좌우의 고집과 편견이 설혹 어떤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보낼지라도 우리는 새 나라는 자유체(自由體)라야 할 것을 굽힐 수는 없는 것이다. 제국주의라 파쇼라 자본주의라 하는 독재도 부당하거니와 이른바 진보적이라 하는 무산계급의 독재도 부당한 것이다. 누구나, 어떤 개인이나 국가와 권력에 대하여 비판자가 될 수 있어야 할 새 나라는 결단코 개인의 사상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부당하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력 그것은 용인하나 이는 개인의 모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권력으로서 용인하는 것이다. 소수파의 의견도 경청하며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며 사상을 통제하려 들거나 내지 구속하지 아니하는 권력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실제에서 개인의 자유 활동에 유해한 부의 편재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 토지개혁, 중요 산업 국유화 등의 경제적 민주평등이 요청되는 것이다. <31~32쪽>

● 제4권 – 삼면불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는 거짓이나마 일본적이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우방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도와주려는 것뿐이요, 우리에게 가식적인 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 후예 본연의 자태에 돌아가 자주독립의 완수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거늘 이름은 한국무슨당, 조선무슨당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정당임이 분명하면서 ‘조선말 하는 또 다른 외국사람’은 있지 아니한가. 당리당략도 있고 국리국책을 생각하거든 망국의 원인이 어디 있었던가를 기억할 것이다. (… ) 자당(自黨)의 사이비 애국자에는 후하고 다른 당의 비이사(非以似) 친일자에는 박한 비난이 과연 가혹한가. 민족을 반역한 자, 친일 분자는 물론 있었다. 나라를 팔아서 40년 영화를 누린 자, 억압자에게서 위임받은 채찍으로 동포를 때린 자, 동지를 적에게 헐값으로 방매한 자, 이권을 위하여 적에게 웃음을 판 자, 창씨를 강요한 자, 제국주의 전쟁에 노예군 편성을 애원하고 청년 학도에게 피의 공출을 선전한 자, 북해도 석탄갱 속으로 청장년을 들어다가 매장한 자 등등. 이들의 처단은 마땅하다. 그러나 슬프지 아니한가. 누가 광영의 임무를 맡을 자격이 있는가. 나는 무엇이 달랐는가…. 허위를 벗는 마당에 도달하여 마땅히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5.10.29.) <199~200쪽>


『신세대』 3권 3호에 게재된
명사 좌담회 기사
왼쪽 첫 번째가 오기영

● 제5권 – 3면 기자의 취재 : 일제강점기 기사

우리의 상공계는 너무도 고요하다. 몰락하는 도성의 석양과도 같이 아무런 동요가 없고 진취가 보이지 않는다. 점포는 즐비하고 공장은 다수(多數)한 상공 도시의 평양도 그러하다. 10전짜리 물건 한 개를 사고자 하여도 신시가의 일본 상인을 찾는다. 어떤 상인은 한탄하되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을 신용치 않는 모양이지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의 격으로 같은 값이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서 물건 사는 것을 일종 만족으로 아는구려!” 과연 얼마나 답답한 탄식인가! 나는 이 소리가 어쩐지 조선 상인의 최후의 신음소리와 같아서 듣기에 몹시도 슬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여지가 있다. 우리 상공계의 번영을 위하여서 취할 바 수단과 강구할 대책이 아직도 많이 있는 것이다. 신시가로 향하는 고객의 발길을 그대로 구시가에 머물게 할 방침이 많이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위하여 평양의 상공업자는 일치한 보조(步調)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44쪽>

● 제6권 – 류경 8년 : 일제강점기 칼럼

그러나 이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그네의 강연 내용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임적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요, 다만 그네의 심리적 경향을 표시한 데 불과하므로, 우리는 그네의 생각하고 있는바, 그네의 향하려고 하는 바를 고찰하여 더욱 각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빈약한 양말공장, 빈약한 고무공장, 사진업 같은 것도 벌써 그네는 경쟁적 심리를 가지고 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토착인이다. 토착한 사람이니만치 외래의 어떤 사람이든지 침입하지 못할 만한 견고한 실력을 양성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말하여 둘 뿐이다. <40쪽>

■ 차례

제1권 사슬이 풀린 뒤

화보-오기영 가족과 사슬이 풀린 뒤
추천사 _강만길·서중석
가족 회고-10년 만에 글로 적어보는 회고 _오경애
간행사-『동전 오기영 전집』 간행에 부쳐 _정용욱
머리말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1. 만세와 거짓 자백
2. 아버지의 몰락
3. 혁명가 오기만
4. 체포, 재판, 그리고 출옥
5. 형의 죽음
6. 아내와의 사별
7. 아우의 고난
8. 이제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부록
할아버지 흔적 톺아보기 _김민형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 연보
오기영 전집 편찬 기본 원칙

제2권 민족의 비원

화보-미 군정기와 민족의 비원
해제 _김태우
투필(投筆)의 실패―자서(自序)에 대(代)하여
이성의 몰락―한 자유주의자의 항변
정치의 탄력성
언론과 정치
민요(民擾)와 민의(民意)―언론계에 보내는 충고
참괴(慚愧)의 신 역사―해방 후 1년간의 정치계
시련과 자유―해방 1주년을 맞이하며 / 곡영우(哭迎又) 1년―민족의 지향을 찾자
도산(島山) 선생의 최후
오동진(吳東振) 선생을 추도함
좌우합작의 가능성―불합작(不合作) 구실의 축조적(逐條的) 검토 / 3당 합동(合同)의 생리(生理)
민족의 비원―하지 중장(中將)과 치스티아코프 중장을 통하여 미소 양 국민에 소(訴)함
속(續) 민족의 비원―경애하는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함
중앙인민위원회에―남북 양대 세력에게 주는 말 / 입법의원에 여(與)함―무엇이 가능하겠는가?
관료와 정치가
5원칙과 8원칙
신탁과 조선 현실 / 삼상 결정(三相決定)과 대응책 / 국제 정세와 공위(共委) 속개―우리의 운명을 냉정히 인식하자
미국의 대(對)조선 여론
민중
건국·정치·생산
생산하는 나라
예수와 조선―혁명 정신의 반동화를 계(戒)하여
추기(追記)

제3권 자유 조국을 위하여

화보-남북분단과 자유조국을 위하여
해제 _김태우
자서(自序)
새 자유주의의 이념―독재와 착취 없는 건국을 위하여
민족 위기의 배경―냉정 전쟁(冷靜戰爭)에 희생되는 조선 독립
독립 번영의 기초―도산(島山) 정신의 3대 요점
도산 선생 10주기 / 독립에의 신(新)출발 / 자주의 기초 / 평범의 이념 / 생산과 노동 / 시급한 기술교육 / 응분(應分)의 애국 / 인격 혁명의 생활화―흥사단 33주(周) 기념일에 / 부러운 승리의 날―미국 독립기념일에
재개 공위 전망(再開共委展望)
공위(共委)에 여(與)함 / 공위(共委)와 공존(共存) / 사회단체 정의―세계사전(世界辭典) 들출 것 없다 / 답신(答申)을 검토함 / 이러한 정부를 원한다
조선의 실태―웨더마이어 사절(使節)에 보낸 서한
가연(苛捐)과 민생 / 테러의 근멸(根滅) / 누구를 위한 유혈이냐
UN과 조선 독립―내조(來朝) 위원단에 주노라
단선(單選)의 실질(實質) / 남북협상의 의의
3·1정신의 재인식
일본의 야욕(野慾) / 일본의 재무장(再武裝)

제4권 삼면불

화보-보고 듣고 말하다 삼면불
해제 _김태우
머리말
삼면불
모세의 율법 / 전쟁과 평화 / 가능지역(可能地域) 정부(政府) / 북조선 정부 / 구원의 도(道) / 망각법(忘却法)의 제창(提唱) / 교육난 / 양조 금지(釀造禁止) / 악수 / 인도의 비극 / 소금과 중국 혁명 / 실업자 / 모리배(謀利輩) / 공창(公娼) / 전재 동포(戰災同胞) / 선량(善良)의 질식(窒息) / DDT와 일제 잔재 / 정치도(政治道) / 인플레 / 유흥 금지 / 체납 세금 / 거지 추방 / 제주도 사태 / 기아수입(飢餓 輸入) / 양피(羊皮) 속의 일제 / 생활의 전화(電化) / 단전(斷電) / 경찰과 수사학(修辭學) / 적산(敵産)의 견해(見解) / 다소동락(多少同樂) / 독산(禿山)과 성선설(性善說) / 적색과 백색 / 유고의 고민 / 성지(聖地)의 유혈 / 비농가(非農家) / 진짜 무궁화 / 벌금 / 거부권(拒否權) / 나의 경전 생활(京電生活) / 인욕(忍辱) / 다욕(多辱)
해방 이후 기고문
총참회하자 / 신뢰의 한도 / 탁치(託治)와 지도자 / 기미와 삼일 / [신문평] 《조선일보》 / [신문평] 《동아일보》 / 일인일언(一人一言): 생활의 전화(電化) / 설문 / [설문] 좌우합작 원칙 비판 / [나의 생각] 우리는 조선땅을 딛고 세계의 하늘을 보자! / 본지가 걸어갈 앞으로의 사명 / 각계 인사가 말하는 신문에 대한 불평과 희망 / 연립임시정부의 형태 / 곡백담(哭白潭)(상·하) / 웨 특사에게 보내는 시민의 소리 / 새해에는 이렇게(2) 나부터 책임진 민족의 일원이 되자! / 얄타협정 과오를 인식 조선 민족의 진정한 독립 기대 / 1948년에는? / 여론과 소음 / 독설과 유모어 좌담회 / [신간평] 『전환기의 이론』 / 분화구상의 대한민국, 외군 주둔은 민족적 요청인가(1~3) / 외군(外軍) 주둔하에 자주독립국이 있을 수 있는가? / 독립과 자주독립: 남한적 현실에 대한 일 고찰 / [동문이답]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은 외국은? / [1일 1제(題)] 미국의 선물 / 평화혁명과 자유: 자유 없는 곳에 피가 흐른다 / 도산(島山)을 파는 사람들 / [신간평] 설국환(薛國煥) 저, 『일본 기행』 / [동문이답] 수산물 중에 가장 즐겨하는 것? / 미소 인민에 보내는 공개장 제1부: 미 인민에 보내는 글월 / [신간평] 고민하는 중국 / [동문이답] 실업자가 없도록 하려면?
부록: 오기영 저서에 대한 당대 서평

제5권 3면 기자의 취재

머리말
통계상으로 본 평남 농업 상황(1~3) / 한해 감수(旱害 减收)가 9할 3푼(九割 三分) / 당상(堂上)과 홍규(紅閨)의 몽리인(夢裡人) / 조풍(潮風)도 슬픈 서해안 | 창파(蒼波)도 벽혈(碧血)인 듯 / 평양 유일의 시혜기관 위걸수용소(痿乞收容所)와 보육원(전 4회) / 우리의 희망하는 상공계 통일 기관 / 평양 상번회(商繁會) 발기를 듣고(1~8) / 전 조선 모범 농촌 조사(전 22회 중 4회) / 만여 주민 사활 불고(不顧) 불이농장(不二農塲) 직영 착수 / 세간의 주목 끄는 용천(龍川) 쟁의 진상(1~7) / 신의주서(新義州署)에서 고보생(高普生) 검거 / 검거된 생도는 평소부터 주목 / 경찰과 검사가 밀의(密議) 재학생 극도 불안 / 고해순례(苦海巡禮): 광부 생활 조사(1~10) / 압록강상 2천 리(鴨綠江上 二千里)(1~14) / 평양고보에 모 격문 배부 / 평양 격문 사건 확대 학생 20여 명 검거 / 평남경찰부 돌연 대활동 / 신의주청맹(靑盟) 금일 공판 개정 / 천마대원(天摩隊員) 김성범 교수대의 조로(朝露)로 / 차련관(車輦舘) 사건 ‘진범’? 오동진과 대질신문 / 홀아비 유출(誘出) 자살(刺殺) 후 투강(投江) / 4천 년 전 고도 평양 행진곡(지방 소개 1) : 평양 사회단체 개관 / 평양 고무쟁의(爭議) 진상(眞相)(1~7) / 평양 고무공장 쟁의 전적(戰跡) / 평양에 대화(大火) / 주요 도시 순회 좌담 제1 평양 편(1~6) / 숙천 일대(肅川 一帶) 박재 상보(雹災詳報) / 수지상(收支上)으로 본 농촌의 풍년 수확(상, 하) / 황해수리조합(黃海水利組合)은 당연히 해산하라(1~3) / 강서대관(江西大觀)(1, 2) / 발랄한 평양의 신생 면(新生面) / 경찰의 석방 언질로 | 헛강도 자백이 사실? / 청맹원(靑盟員) 검거 | 격문 다수 압수 / 백일하 폭로된 강도 위조 ‘연극’ / 수세(水稅) 연납(延納) 운동과 미림수조(美林水組) 항쟁기 / 의열단 사건 김한을 검거 / 평양 모 사건 21명 송국(送局) / 평양서 검거된 김한은 동명이인 / 을밀대상의 체공녀(滯空女): 여류 투사 강주룡 회견기 / 평양 폭동 사건 회고 / 애인의 변심에 격분 | 현대의 악마로 돌변 / 1931년의 평양 사회상(상·중·중·완) / 평양 신년 좌담회(1) / 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 원 사건 완연한 일장(一塲)의 활동사진 / 78만 원 범죄 비화(秘話): 절도 사상(史上)의 신기록 / 강동 대박산에 있는 단군릉 봉심기(奉審記)(상·중·하) / 재정 독립 문제로 평안협동 수(遂) 분규 / 황평(黃平) 양도(兩道)에 동섬서홀(東閃西忽)! / 단신(單身) 경관대와 충돌 사차(四次) / 문제의 소화(昭和) 수조(水組) 과거, 현재와 장래 전망 / 미간지 개간은 29,600정보 | 부근 연고 주민에게 불하 대부하라 / 본 지국 주최 평양 차지차가(借地借家) 문제 좌담회(1~3) / 신사참배 문제와 미션회 태도 / 젊은 조선의 열(熱)과 기(氣)의 좌담회 / 숙명적 천인(賤人)으로 하대받는 생활 / 서흥 장인부락(匠人部落) 서흥군 화회면 백동 / 전 조선 철도 예정선 답사기: 동해선(1~5) / 병참기지 조선의 현지 보고: 황해도편(17~20)

제6권 류경8년

머리말
꽃 잃은 나비 / 새벽 날 / 지방논단 : 부협의회(府協議會) 개막 / 지방논단 : 북(北)금융조합 이사 인선 문제 / 지방논단 : 전조선축구대회를 보고 / 평양시화(平壤時話) : 잠견(蠶繭) 판매 문제 / 교육대회 관(觀) / 평양시화 : 공설시장 문제 외 / 지방논단 : 부민에 고함 / 평양시화 : 부(府) 당국에 부탁 외 / 지방논단 : 기림리 토지 매매 문제 / 평양시화 : 강연회를 보고 / 지방논단 : 상공협회의 출현을 보고 / 평양시화 : 물산장려와 오인(吾人) 외 / 지방논단 : 근우평양지회(槿友平壤支會)의 활동 / 평양시화 : 비밀회(秘密會)의 유행 외 / 평양시화 : 전기 부영(府營)과 부민(府民) 외 / 소회 : 고별에 대하여(상~하) / 지방논단 : 학생의 취체(取締) / 눈 소식은 벌써부터 국경의 겨울 준비 / 지방논단 : 국경 여객 취체(取締)에 대하여 / 신문소고(新聞小考)(1~10) / 지방논단 : 신의주의 진로 / 지방논단 : 교육기관을 증설하라 / 지방시화 : 지주(地主)와 가주(家主)들 / 지방시화 : 평양 3대 선전 / 지방논단 : 자살과 아사(餓死) / 국경 1년 수난기 / 평양만담 : 요정(料亭)의 신축 / 평양만담 : 근우지회관 낙성(洛城) / 평양만담 : 고무직공의 공장 자립 외 / 평양만담 : 적극적인 평양 / 평양만담 : 무성의한 위생대(衛生隊) / 지방논단 : 백 여사 찬하회(讚賀會) / 사람 : 조만식 씨의 이꼴저꼴 / 사람 : 철창 속의 백선행 / 평양시화 : 연합 발매(發賣)를 보고 / 지방논단 : 면옥쟁의에 대하여(상·하) / 지방논단 : 전기 예산의 원안 집행(상·중·하) / 지방논단 : 문제의 수리조합 / 평양시화 : 마작(麻雀)의 성행 / 젊은이의 마음 : 고민 / 지방논단 : 빈빈(頻頻)한 부정사건 / 지급전보 제1호 / 지방논단 : 격리병사 문제 / 매음제도론 : 기생제도 철폐 제 의견을 검토함 / ‘굿’을 묵인함은 민의를 존중함인가? : 평남도 평의원 제위에 일언 / 도시의 행진곡 : 평양 제1진 / 지방논단 : 금주무역회사(禁酒貿易會社) 발기 / 지방논단 : 내객(來客)의 첫 인상 / 평양시화 : 인정도서관과 평양 인사 외 / 평양시화 : 무소불위의 황금 / 평양시화 : 피의 교훈 / 지방논단 : 미신행위 타도 / 평양시화 : 빈발하는 교통사고 / 평양시화 : 학생 풍기 문제 외 / 평양시화 : 자생원에 서광 / 평양시화 : 평양의전생 형사 사칭 / 지방논단 : 대동고무 파업 문제 / 지방논단 : 대동고무에 여(與)함 / 조선 현대 인물 소개 : 조신성론 / 어린 때 첫 번 본 서울 인상기 : 전차 비강(飛降)타가 무릎 깬 이야기 / 신추만필(新秋漫筆) 7 : 명일(明日)에의 돌진 / 국제외교 비화, 구주대전(歐洲大戰) 전야 / 차화실(茶話室) : 의지의 모약자(耗弱者) / 극동 노령(露領)에 유태국(猶太國) 신건설 / 팔로춘색(八路春色) : 옛 생각은 잊어야 할까 / 류경(柳京) 8년(1~6) / 동인각제(同人各題) : 우울한 희열 / 동인각제 : 체병(病)의 신(新)증상 / 대동강에 남긴 추억 : 모래찜과 어죽놀이 / 법창비화(法窓悲話) : 어떤 살인죄수 / 시감(時感) : 가정과 교육 / 대구(對句) 이삼(二三) / 초하(初夏) 수필 : 초하에는 폭음(爆音)을 타고 / 가을 육제(六題) 기삼(其三) / 렌즈에 비친 가을의 표정 9 / 온천 순례 : 배천온천
부록
오기영 기고문 총목차 / 오기만 조서 번역문(1934년) / 오기만 공훈록 / 오기옥 양정고·경성제대 학적부 / 오기옥 기고문 / 전우익 회고글

■ 저자 소개

오기영[1909~1962(최종 생존확인)]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

■ 추천사 중에서

신문기자 출신으로서 본인과 전 가족이 참가한 가족독립운동사요 민족사회의 독립운동사이기도 한 오기영 선생의 저술 『사슬이 풀린뒤』가 1948년에 간행됨으로써 필자와 같은 당시의 중학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사 교재가 되었다. (…) 민족 구성원 전체가 남쪽 편과 북쪽 편, 그리고 좌편과 우편으로 나누어지다시피 한 해방정국 상황에서 “너는 우도 아니요 좌도 아니요 대체 무엇이냐, … 혹은 중간파라, 심하게는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유주의자로 자처한 한 지식인이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을 산 생생한 체험기록들이야말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전체 민족사회의 귀중한 교과서라 할 것이다.(…) 오기영 선생은 ‘네번째의 8·15를 지내고 닷새 뒤’ 그러니까 1948년 8월 20일 이승만정권이 성립된 5일 후에 쓴 저서 『사슬이 풀린 뒤』를 간행하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런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그러고는 1949년 어느 때인가 오기영은 고향이 있는 북한으로 갔고, 그후 북녘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과학원 연구사 등을 역임했다. 그분이 남긴 저작물과 기고문을 통해서 민족사의 시련기였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산 한 사람의 양심적 지식인이요 빼어난 언론인이 이 땅의 사람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생각하며 또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제 찬찬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 위원장)

오기영이 말하고 또 말하고 거듭 말하는 것이 있다. 자주성이 그것이다. 김규식은 친미반소도 반미친소도 민족적 통일 단결을 파괴하는 노선이며, 친미친소만이 자주성을 견지해 통일 독립에 이르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오기영은 미국도 소련도 한국이 따라야 할 모범국가가 절대로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분단정부가 들어서는 1948년에 약소민족의 자주권, 생존권이 냉전의 도구로 희생되고 있으며 남북 조선이 미소의 전초기지로 화해 골육상잔의 참극이 연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남북협상을 열렬히 성원하면서, 김규식이 “흥해도 우리 손으로 흥하고, 망해도 우리 손으로 망하자”고 절규하며 “남북협상은 독립운동의 막다른 골목이다”는 비절(悲絶)한 심정을 토로하자, 그것은 전민족의 심정이요, 자신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서중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주의자’ 오기영이 남긴 글들을 알알이 엮어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시대에 마음껏 감격하고 싶습니다. 이 책들이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알곡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아, 『동전 오기영 전집』을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영전에 고이 바치며, 이 지난한 작업에 공감하고 동참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우리 가족을 대표하여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가족회고, 70년 만에 글로 적어보는 회고―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오경애 _동전의 막내딸)

■ 간행사 :『동전 오기영 전집』 간행에 부쳐 (요지)

동전 오기영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집필한 글들을 엮어서 전집을 만들었다. 그의 문필활동의 기록이자, 시대의 증언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가 기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20년대 후반 이래 그의 기사와 칼럼은 때로는 사건에 대한 요령 있고 정밀한 기록으로, 때로는 사태의 추이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역사적 투시와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때로는 현실에 대한 시의적절한 풍자와 건설적 대안으로 당대인의 사랑을 받았고, 후대인에게는 당대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사료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는 본받아야 할 선배였고, 기자 사회 전체적으로 ‘신문계의 일재’(逸才)라는 평가가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의 글이 가진 중요성이 다시 현대인의 주목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분단이 빚어낸 역사적 맹목성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극소수의 전문 연구자만이 그의 글을 우연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의 글이 다시 학계와 독서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데에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지구적 차원의 냉전 해체라는 역사적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간 역사학계와 문학계의 학문적 온축도 한몫 했다. 한국 근·현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연구가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심화하면서 연구자들의 자료 탐사 범위와 해독의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동전의 글이 가진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동전의 글을 매개로 한 학계의 연구와 조부의 족적을 찾으려는 외손녀의 노력이 시기적으로 겹쳤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해방 직후 출간된 그의 책들이 2002년에 복간될 수 있었다. (….)

이 전집에 실린 동전의 글을 시간 순으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첫 번째 글은 공교롭게도 한 편의 시다. 그가 열다섯 살 나던 해에 지어서 동아일보에 실은 「꽃 잃은 나비」라는 시는 나라 빼앗긴 한 소년의 절절한 조국애를 드러낸다. 학력도 변변치 않은데 약관의 나이에 동아일보 정식 기자로 평양에 부임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위로부터 남다른 취재 능력과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

동전이 사회부 기자로서 식민지기를 증언했다면 해방 이후에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해방’과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이 가져온 조국의 현실을 증언했다. 그가 경전(京電)에서 일한 것이 단순히 생활의 방편을 쫓아서 그리 한 것은 아닐 테고, 해방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그 나름의 대응이자 고민 끝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

당시 발간된 그의 책 네 권 (…) 해방 직후의 급박한 정세 변화를 기자의 짧고 가파른 호흡이 아니라 평론가의 냉철한 눈과 긴 호흡으로 되짚으면서 나름의 대안을 모색한 셈이다. 현장 취재로부터 한 발 물러나자 정세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긴 안목으로 난마와 같이 얽힌 현실 정치를 전망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식민지기의 글들이 평양이라는 지역사회에 응축된 민족의 현실을 위주로 했다면, 해방 이후 쓴 평론들은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한 각종 현안 외에 외군 점령에 반영된 국제정세의 변화까지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한편의 글마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적 안목, 사안의 심층을 깊숙이 파고드는 직관과 치밀한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그렇게 많은 혁명가들이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 또는 그들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이 흔치 않다. 동전이 1946년 3월부터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출간한 『사슬이 풀린 뒤』는 항일 혁명가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헌신하다 옥살이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형 오기만, 그리고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다. 형과 형이 가는 길을 응원하며 보살폈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부치는 헌사이자 그들에 대한 필자의 회억(回憶)의 글이다.

흥미 있게도 동전은 그의 행적과 사회적 관심사는 물론 그의 주변사와 개인적 관심에 대한 소회나 그가 그린 행적이 가진 개인사적 의미, 또는 그의 사색의 편린들을 책이나 칼럼의 형식으로 여러 군데에 남겨 놓았다. (…)

시간 순으로 이 전집에 실린 동전의 마지막 칼럼은 「미소 인민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다. 상징적이게도 나라의 독립을 희원하는 열다섯 살 소년의 각오를 형상화한 시로부터 시작된 전집이 이제 그 소년이 갓 불혹을 넘긴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두 쪽이 된 조국과 민족을 어떡하든지 이어보기 위해 외국의 인민에게 보내는 절절한 호소로 끝을 맺는 셈이다. 이 전집은 동전이 살아생전 썼던 모든 글을 집대성한 ‘전집’을 목표로 하였으나 그 목표를 미처 이루지 못한 채 그의 북행 이전의 글들을 집대성하는 데 그쳤다. (…) 그가 북행 이후 쓴 글들도 모두 모아서 전집을 마무리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2019년 4월 12일 편찬위원장 정용욱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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