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페스 심포지엄02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그 역전을 위한 종교적 대화
■ 이 책은…
종교인과 종교학자들이 ‘평화’를 공통 화두로, 지속적인 연찬회를 통해 논의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국가-종교의 관계와 평화, 비폭력과 평화, 혐오-배제와 평화, 이슬람과 IS와 평화, 구조적 폭력, 정체성의 강조와 폭력, 종교로 인한 폭력, 코로나19 시대의 종교의 자리 등 ‘종교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된 시사적인 문제와 종교 그리고 평화’의 문제에 대한 생생한 대화가 깊이와 흥미를 아우르며, ‘포스트 코로나’ ‘위드피스’의 세계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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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추구하는 이가 ‘종교인’이 되는 시대 맞아
자기중심적 평화 넘어 이웃을 향해 스스로를 열고
폭력의 빌미가 되는 표층종교에서, 평화 지향의 심층종교를 실현하여
폭력은 비정상적-일시적이고, 평화는 지속적-본질적인 세상으로 가야
■ 출판사 서평
1.
코로나19 시대에,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의 위기’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사태 초기에 특정 교단의 문제로 치부되었으나 그 파도가 잠잠해질 즈음, 종교의 행태 자체가 코로나19의 확산의 거점으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종교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의문이 한 번 제기되자, 그동안 잠복되었던 종교에 대한 질문들이 속속 발언권을 높여 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탈종교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 질문들은 급속하게 회의론을 확장시키고 ‘평화 구축’ ‘심리 안정’ ‘폭력 완화’ 같은 종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도 무너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종교 위기의 시발점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누적되어 온 위기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상징적인 사건일 뿐이다. 사회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코로나19 이전 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전망은, 새삼스레 되뇔 필요가 없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비대면이 권장되는 시대에 만남의 소중함이 재발견되는 것처럼, 종교의 위기가 노골화되고, 종교로 인한 폭력이 적나라해지고, 종교를 빙자한 ‘비종교-반종교적 행태’가 누구에게나 포착되고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대에 다시 종교의 자리가 요청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산업-자본주의-물질 중심 문명, 기후위기가 낳은 것이고, 그것을 매개한 것은 개발과 성장, 욕망과 소비 중심의 우리 삶이다. 그 안에서 독버섯처럼 자란 (많은 부분 ‘교단/제도 종교’가 야기하는) 혐오와 배제가 팽대해지는 지금이야말로 종교 본연의 영성, 믿음 본래의 심성, 평화 지향의 감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2.
지금은 확실히 ‘종교가 앞장서서, 성직자의 권위로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그보다는 ‘종교를 재발견하고, 재조명하고, 재해석하여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시대이다. 종교가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재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는 시대이다.
이 책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그 역전을 위한 종교적 대화』는 그간의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거나, 최근의 우리 사회(국가)로 좁혀서 보거나, 표면적으로 평화보다는 갈등과 폭력이 우세해 보이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삶을 누려온 까닭은, 우리가 앞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근본적으로 단 한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는 평화를 향한 우리의 꿈을, 종교 또한 함께 지지하고, 이바지 해 온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점을 확인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한다.
첫째, 현실의 종교는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저마다 다르게 제시하고(자기중심적 평화관-세계 해석), 그것을 고집하는 데서 갈등과 폭력의 주범으로 전락해 있다. 그러나 계속된 연찬을 통해 참가자들은 종교의 궁극은 평화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평화의 심층은 종교의 심층과 닿아 있다.
둘째, 인류 역사의 갈등과 분열, 전쟁과 폭력의 ‘8할’은 종교로 말미암은 것이거나, 주동한 것이라고 하지만, 종교가 자처하는바 ‘평화의 사도’라는 자기 이름에 값하는 것만으로도, 종교는 세계와 인간과 지구생태계의 평화에 이바지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세계 구원의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셋째, 종교의 참과 거짓, 참 종교와 거짓 종교는, 평화를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름된다. 종교인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추구하는 이가 종교인이라는 것이다. 평화는, “평화에 대한 상상력과 꿈”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며, 본래 의미의 ‘종교’라는 말과도 동의어라고 말한다.
넷째, 종교에서 세계의 이상적 질서가 온전히 회복된 상태를 말하는바, 이 책은 종교 언어를 빌린 평화론이다. 평화는 외적인 조건과 내면적인 안정상태의 조화를 통해 성취된다.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 즉 인류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화두야말로 종교적이다.
■ 차례
∎프롤로그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01. 국가와 종교의 폭력들
02. 종교와 국가의 공모
03. 종교는 평화공동체인가
04. 비폭력은 약자의 언어인가
05. 일부러 지는 길을 선택하다
06. IS를 통해 이슬람의 평화를 상상하다
07. 폭력은 왜 구조화하는가
08. 우리의 정체성이 그들을 차별한다
09. 종교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10. 코로나19 시대의 종교와 문명
∎에필로그 레페스의 길
■ 책 속으로
구조적 폭력으로서의 국가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종교
종교가 국가 권력을 넘어, 그리고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인 국경을 넘어 존재할 수 있을까, 국가 권력을 넘어선 종교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국가라고 하는 구조적 폭력의 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종교도 실제로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타협을 하며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태생적 폭력을 넘어설 수 있어야 진정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13쪽>
종교, 스스로에 대한 신화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관계 설정 필요
국가 조직 비슷하게 되어 가는 종교의 내적 환상을 스스로 지워내고, 순기능적인 측면에서 국가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나면 분명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역할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종교 또한 태어남, 성장, 늙음,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생물학적인 조직임을 알고, 자신을 가두었던 종교적 신화화(神話化)를 해체하여 인간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61쪽>
종교 간 평화공동체를 향한 ‘종교연합’운동의 이상과 현실 사이
개별 종교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토론을 벌이면 ‘답’은 벌써 나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개별 종교의 지도자들은 아마 그 ‘답’을 깰 것입니다. 거대 종교는 종교연합에 나서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군소 종단은 발언권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연합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종교연합은 이론적 논의 이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종교연합 활동을 하려면 개별 종교의 지도자들이 자기 종교 내에서 쥔 권력을 배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97쪽>
이 시대의 종교라는 것은 뭔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미래 시대로 갈수록 종교법이든 사회법이든 법률과 제도에 충실한 사람보다는, 특정 종단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비폭력적 저항을 하고 평화를 교육하는 사람을 더 종교인으로 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회를 건강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 대중을 많이 모으는 교화 방식보다는, 폭력으로 인한 아픔에 공감하고 평화교육을 실천하고 비폭력 저항으로 폭력을 줄이는 일이 정말 종교적 내공을 필요로 하는 길일 것입니다. <122쪽>
종교는 평화에 참여하는 과정 전체를 말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대를 실천하고 평화를 향한 ‘비판적 저항’에 참여하는 동안에만 종교는 ‘종교’로서 형성되어 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종교’란 정의내릴 수 있는 명사적 의미에 국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평화를 향한 노력에 참여하는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 환대는 불가능한 일인데, 이 불가능 앞에 자기를 세우는 과정이 곧 ‘종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141쪽>
무슬림, 평화의 종교와 IS의 폭력, 두 얼굴을 본다
무슬림 사회 내부 반성과 재교육도 필요하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반복해서 말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슬림 사회 자체 내에서 깊은 성찰과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폭력이 무슬림 사회 내부의 문제라고 애써 생각하지 않고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담론으로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 <186쪽>
소수자는 다수자, 즉 주류의 폭력적 실상의 증언자다
‘소수자’라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은 ... 사실상 다수자, 즉 주류의 실상의 증언자다. 소수자의 실상은 다수자의 실상의 속살이다. 폭력적 구조를 은폐하거나 그 질서에 순응하면서 주류를 형성하지만, 그럴수록 주류 사이의 빈틈도 드러난다. 그 틈이 희생양 시스템의 본질이다. 소수자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다수자에 대한 ‘양적’ 개념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수자의 실상을 증언하는 ‘질적’ 개념인 것이다. <210-211쪽>
차별과 구별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차별은 경멸을 의미합니다. 선의의 차별이라는 것도 광의의 의미에서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경멸적 차별을 말합니다. 구별과 차별을 구분해서 말해야 합니다. 유교 전통에서 부부유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할 정도로 반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부부유별은 사실상 부부차별로 읽힙니다. 남자가 여자를 차별한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원시 유교적인 공자의 이상적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254쪽>
자기중심적 평화관이 평화로 가는 길의 걸림돌이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폭력을 줄이는 과정도 그것이 나에게 더 유리하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집니다. 평화도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죠. ... 평화가 나와 너의 상통성, 조화, 상생의 형태로 나타나기보다는 평화라는 말로 나의 안정과 나의 이익이 더 크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말이 많아도 평화롭지 않고, 평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 종교가 그렇게 많아도 평화롭지 않은 것은 자기중심적 평화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311쪽>
코로나19는 종교의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이다
다행인 것은 이 코로나19의 계기를 통해 인간이 종교를 보는 눈이 더욱 성숙해 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태는 이제까지 횡행하던 종교의 사기적인 수법들을 걸러낼 것입니다. 종교에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등 인류 보편의 가치와 인간의 깊은 영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고리들을 되찾기 위한 인간의 인내와 끈기와 노력이 이 기회에 더욱 증폭될 것입니다. 결국 종교는 이 사회가 마침내 도달해야 할 하나의 세계, 최후의 세계를 지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353쪽>
■ 기획
레페스포럼 _ ‘레페스포럼’은 종교가 폭력 축소와 평화 구축에 공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다양한 연구자들의 토론 모임이다. ‘레페스’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종교평화연구)의 약어이며, 2015년 창립 이래 종교-폭력-평화-국가의 관계에 대해 정기적으로 토론한 뒤, 그 결과를 각종 대중매체와 SNS를 통해 공유하는 한편, 출판을 통해 체계화하면서 심화 확장시켜 가고 있다.
■ 참여자
김근수 _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해방신학
김상덕 _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실천신학/평화학
김승진 _ 서강대 강사, 경영학
류제동 _ 성균관대 강사, 종교학
박광수 _ 원광대 교수, 종교학
박일준 _ 감신대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책임연구원, 종교철학
박현도 _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이슬람학
서보혁 _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국제정치학
신익상 _ 성공회대 연구교수, 조직신학
오현석 _ 중국 화북전력대학 교수, 종교학
원영상 _ 원광대 교수, 불교학
유영근 _ 대화문화아카데미 협동원장, 법학
이관표 _ 협성대 초빙교수, 철학/신학
이명권 _ 코리안 아쉬람 대표, 종교학/중국문학
이병두 _ 종교평화연구원 원장, 불교학
이찬수 _ 보훈교육연구원 원장, 종교평화학
전병술 _ 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 _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사회학
정주진 _ 평화갈등연구소 소장, 평화학
조규훈 _ 한국외국어대 HK연구교수, 종교사회학
허석 _ 원광대 교수, 원불교학
홍정호 _ 연세대 객원교수, 선교학
■ 주요 구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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