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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사회는 왜 아픈가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16. 18:06

노예의 삶에서 탈출하기: 자발적 감폭력의 길

[프레시안books] 이찬수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서평

이병성 캐나다 맥길대학교 종교학 박사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병들었을까, 왜 이렇게 불공정할까, 왜 이렇게 갈등하고 폭력이 넘쳐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며 해법을 모색하는 이들이 읽어 볼만한 책을 추천한다.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이 쓴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모시는 사람들, 2020)이다.
종교학과 평화학 연구자이며, 평화운동가이기도 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신음하는 이유를 구조화된 폭력 속에서 찾는다. 이 구조화된 폭력에는 모든 삶의 관계가 시장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신자유주의,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을 소외시키는 권력, “하늘의 이름으로 하늘을 가리는” 종교 등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어떻게 우리는 자발적 노예의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저자는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개념화한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즉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꿈꾼다. 저자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폭력을 줄여가는데 동참하는 감폭력(減暴力)”의 길이 바로 우리가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임을 역설한다. 적극적 평화는 단순히 폭력이 없는 상태일 뿐 아니라 폭력의 원인이 되는 조건들이 제거된 상태이다. 폭력의 구조적이고 문화적 차원을 인식하는게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적극적 평화’라는 개념은 마틴 루터 킹목사(Martin Luther King Jr.)의 평화에 대한 언급을 떠올리게 한다. 1963년 흑인 민권운동을 위해 투쟁하다가 버밍햄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킹목사는 다음과 같이 평화를 구분한다. “소극적 평화는 갈등이 부재한 상태이고, 적극적 평화는 정의가 현존하는 상태이다.” 즉 정의가 이루어 질 때 평화도 이루어 짐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사회가 아픈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차별과 혐오, 불의와 불공정, 위선과 욕망에 있음을 지적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불평등, 양극화의 문제, 성차별, 동성애 혐오, 난민에 대한 냉대, 세월호 참사, 미국 패권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사회를 아프게 하는 것이기에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현존하는 적극적 평화가 이루어져 한다고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민주주의, 인권, 정의, 자유, 평등 이라는 가치가 평화로 어떻게 수렴되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여러 고통의 모습과 현장에 대한 통찰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개인주의적이고 때로 이기적이기까지 한 자기 중심적 평화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그는 이것을 “자기중심적 평화주의”(ego-centric pacificism)라고 부른다.
“ 평화를 어찌 골방이나 산골에서만 얻어지는 개인의 심리적 편안함에만 가둘 수 있겠는가. 물론 개인에게는 그런 평화도 필요하다. 하지만 도처에 널려 있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를 구출해 냄으로써만, 적극적인 평화도 점차 구현되어 갈 것이다. 그런 식으로만 자발적 노예의 삶에서 스스로를 구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아픔의 원인은 인간이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진다. 인간의 정신적 심층에서 자발적 노예의 삶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그런 가능성을 보지 않은 채 사회가 아프다는 사실만 진단하고 끝내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노예의 삶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자발적으로 노예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겨들어야 할 논리이다.

그의 흥미로운 통찰 중 하나는 서구 중심적 사고라는 문화적 폭력이 우리 사고 깊은 곳에 스며 들어 있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한반도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서쪽에 있는 곳이지만, 유럽의 입장에서 동쪽에 있는 지역이기에 이름이 붙여진 중동(中東), 근동(近東) 이라는 서구 중심적 지정학적 개념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그는 지적한다. 이렇게 비판하며 그는 동해/일본해 표기 논란에 대한 해법을 제시 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받아 들일 수 없는 일본해나, 일본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 수 없는 동해라는 표기 대신에 ‘평화의 바다’라는 대안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제안은 우리 삶 속에 있는 문화적 폭력을 지혜와 통찰을 가지고 뛰어넘으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저자는 올해 초 보훈교육연구원 원장으로 임명 되었다. 필자에게는 보훈이 어떻게 저자가 생각하는 평화와 연결이 될까 궁금해 하면서 그의 글을 읽었다. 보훈은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보훈의 개념을 평화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 재구성은 “선제적 보훈”이라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선제적 보훈”을 “국경 중심의 민족국가의 범위를 넘어, 탈경계적 세계시민사회에 어울리도록 재규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개념은 한반도의 평화 지향이라는 실천과도 연결되고 있다.
저자의 글은 우리가 정형화하여 받아들이는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의 삶이나 사상은 이미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를 뛰어넘었고, 종교와 인문학의 경계를 뛰어넘었고, 학문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어 정의가 이루어진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종교학, 신학, 철학, 평화학 등을 통하여 학문적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깊은 통찰력을 통하여 고통스러워 하는 우리 사회에 치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강점은 우리가 겪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저자가 성찰한 깨달음과 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서 평화로운 인생과 평화로운 사회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에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가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세상을 꿈꾸며 희망한다. 이러한 세상은 우리의 이상향이지만 또한 우리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저자의 책은 이러한 방향성에 공감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실천적 지혜를 제시해 준다.

필자 이병성은 캐나다 맥길대학교 종교학 박사이며 현재 연세대학교 강사로 재직중입니다.

<출처: 프레시안(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21616084678420#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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