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을 살아낸 다음에 생명-평화에 마음을 쏟았다고 누가 감히 그를 타박할 수 있겠는가. 젊은 시절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그는 ‘죽임’ 앞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생명’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랐고, ‘감옥 밖 감옥에서’ 다시 타는 목마름으로 ‘생명 세상’을 외치고 갈구하다 기
진하여 스러졌다. 그가 치열한 구도와 수난의 과정에서 기필코 열어 보려 했던 그 ‘생명의 문’을 이제 우리가 열어내야만 한다. - 8쪽, “서문-그래도 김지하 시인을 따듯하게 보냈다” - 이부영
○ (1) 명제 : 우리는 30대 청년 시인 김지하를 마음에 품고 예찬하며 기립니다. (2) 반명제 : 후반기의 김지하, 그 일탈과 변절을 단호하게 꾸짖고 도려냅니다. (3) 종합 : 죽음을 통해 이제 그가 신의 반열에 들었으니, 청년 김지하의 삶과 정신을 추출해 그의 부활을 꿈꾸며 민족공동체의 일치와 희망을 확인합니다. - 18쪽, “하느님!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 - 함세웅
○ 하지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판소리의 현대화는 김지하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여러 고뇌어린 예술적·이념적 및 실천적 탐색의 일부, 즉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김윤수·오윤 등과 함께 시작한 새로운 현실주의 미술운동이 오늘날 한국 미술의 주류의 위치에 올라섰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문학자 조동일의 이론적 지도와 창작자 김지하의 실천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로 구체적 생기를 얻은 마당극, 마당굿, 탈춤, 풍물, 민요 등의 광범한 민중·민족연행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운동권 자체의 활동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30-31쪽, “수난과 구도의 삶을 기억하며” - 염무웅)
○ 세상은 아주 조금씩만 나아져 간다. 그래서 세월이 답답하고 지난 자취는 흔적도 없이 잊혀 가고, 먼지 같은 개인은 늙고 시들고 사라져 간다. 우리가 김지하를 그냥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기억을 더
듬는 것은 아직도 시절이 마뜩치 않고 남은 안타까움이 많아서다. 이것이 남루하지만 숙연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 44쪽,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 황석영
○ 내 인생에서 나보고 소설을 써 보라고 권유한 사람은 오오에 켄자부로오와 김훈(당시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켄자부로오는 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줄곧 대화의 초점을지하로 가지고 갔다. (중략) 김지하의 시는 바로 그 거칢 속에서 우주적 생명이 발랄하게 뛰어놀아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신선한 바람이 그의 언어를 감돕니다. 김지하는 정말 특별한 시인입니다. 언어를 거치지 않은 귀신의 놀이에요. 저는 정말 김지하를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한국인들이 김지하를 보다 깊게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49-50쪽, “타는 목마름으로 - 지하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용옥)
○ 이 쳇바퀴를 타개하기 위해 시인은 동학(東學)을 비롯한 개벽파에 주목합니다. 특히 2세 교주 최해월(崔海月)의 재발견이 핵심입니다. 녹두 장군의 무장봉기 노선을 부정한 순응파로 비판된 해월의 진면목을 살림살이(남을 살리고 나도 산다)의 상생도덕으로 파악한 눈이 보배입니다.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세상을 내다본 위대한 개벽파의 숨은 줄기가 드러나매, (중략) 자신의 간고한 옥중 투쟁에서 몸으로 깨달은 이 진실을 옹위하기 위해, 아니 우리 운동의 새로운 전진을 위해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바쳐 진리의
전파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겨우 망각을 뚫고 솟은 개벽파의 숨은 혀에 아뿔싸, 한번 어긋지매 우리는 결국 귀를 닫았습니다. (62-63쪽, “조숙한 개벽파, 지하 큰 시인을 哭함” - 최원식)
○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조선 뱃노래』를 펼쳐들곤 했다. 나는 지금도 가난한 생명을 조롱하는 난폭한 독재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지하 시인이 밝힌 사상의 남은 길을 어떻게든 뒤따
라가고자 애쓰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사소한 서운함만으로도 서로를 찾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병마와 악전고투하는 김지하 시인만큼이나 한국의 민중의 자식들도 사상가를 잃은 공허감에 시달려 왔다. 내가 김지하 시인의 부음을 듣고 막막한 것은, 위대한 역사적 인격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에, 그 많은 후학을 남긴 스승이 ‘나머지 사람들’의 ‘섬김’을 못 받았다는 사실에, 그 장엄한 생애가 국가폭력으
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말년을 너무 적막하게 보냈다는 사실이 마구 겹쳐 온 까닭이다. (중략) 나는 오늘 시인의 그림자 뒤에 엎드려 운다. (72-73쪽, “김지하 시인의 그림자 뒤에 엎드려 울다” - 김형수)
○ 가는 길은 결코 평탄치 않습니다. 1974년 2월 25일 <고행-1974>의 아프고도 좋은 인연을 드높이는 한편으로 1991년 5월 5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죽임의 바다’ 등에 낀 살을 풀어 헤치지 않고서는, 죽임을 죽인 뒤끝에 남겨진 어둠의 응어리를 샅샅이 쓸어 거두어내지 않고서는 결코 화해와 평화의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문화패가 올리는 문화예술 49재는 이 시대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 나선 생명평화 신명천지 굿입니다. 카타르시스가 아닌 ‘씻김’의 자리, ‘화해’, ‘ 평화’의 자리입니다. 5만년 만에 다시 못 올 향아설위의 자리입니다. (99-101쪽, “흰그늘의 미학행, 씻김의 자리, 향아설위의 자리입니다” - 채희완)
○ 그가 남긴 신화소ㅡ흰그늘, 모심, 애린, 마당, 율려, 유라시아빛…. 김 시인은 유한한 목숨줄로 할 만큼 하고 가셨고 남은 분들이 ‘남녘땅 뱃노래’를 이어서 부를 차례입니다. 백낙청 선생 말씀처럼 “지금은 근대주의를 감당하면서 극복할 때”입니다. 백 선생은 감당하기에 더 애를 쓰셨다면 김지하 선생은 극복하기에 더 주력하셨습니다. 시대보다 더 빨리 더 능동적으로 대안을 준비하였습니다. - 121쪽, “세 가지 길을 열고 가신 선구자, 김지하” - 김봉준
○ 시인은 자신이 설정한 이름, ‘김지하’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과거 시간의 구속과 제약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고정된 필명과 인식, 그 이름이 요구하는 가혹한 관점의 중량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음주, 일탈된 행동으로 숨어도 보았지만, 건강만 상했을 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복되는 극악한 환경 속에서 자학과 파괴의 표현 충동이 항시 들끓었다. 어딜 가나 ‘김지하’란 이름에 대한 요구와 기준은 굳게 설정되어 있었고, 만약 그걸 충족하지 못하면 호된 비판이 뒤따랐다. 시인은 그러한 불편과 부담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뜬금없는 탈각충동과 힌두교식 화장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 140쪽, “지하 형님의 추억, 그리고 작별” - 이동순
○ ‘생명의 세계관’의 핵심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극복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설파한 것으로, 이는 ‘천동설’을 부정한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사고의 전환,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아직 일반화(보편화)되고 있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불과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태양이 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어린아이까지도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와 지구 생명체는 하나라는 것, 동물과 식물이 하나의 생명계로 연결되어 있고 광물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 신과 인간이 별도가 아니고 사람 몸 속에 신이 들어와 있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이제 곧 어린 아이까지도 다 알게 될 것이다. 그것도 과학적인 방식으로…. 물리학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아주 쉽게 다 밝혀질 것이다.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하다. 아니, 그보다 더 크고 더 깊은 ‘ 문명의 대전환’이다. - 156쪽, “위악자 김지하를 위한 변명 - 생명사상의 선구자 김지하를 추도하며” - 임진택
○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온 세상을 살릴 계책이 조선 남쪽에 있다. ‘살아남은 남쪽 사람들’에게 있다. 그리고, 나에게 그 남쪽은 정읍이었다. 그 사람들은 정읍 사람들이었다. “정읍이 우주의 배
꼽이다.” 20대의 나를 정읍으로 이끌었던 것은 김지하의 환상적 다시개벽 서사였다. 생명운동은 철학과 방법론이기에 앞서, 민중적이면서도 영성적인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서사였다. 김지하는 신령한, 큰 이야기꾼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담시 ‘오적(五賊)’은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다. 40여 년 전 1984년에 출간된 『대설(大說)남(南)』을 통해 김지하는 우주생명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를 교직해 새로운 차원의 큰 이야기를 지어낸다. ‘만국활계남조선’과 ‘우주의 배꼽’과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저잣거리 민중들의
삶이 어우러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200-201쪽, “생! 명! 땅끝에 서서” - 주요섭)
○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투쟁을 벌이다가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는 인사들은 또다시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묵인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불문율에 따라서 조용히 지내도 무방했을 김지하가 직진 돌파한 덕분에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용공조작은 무력화됐다. (중략) 1980년 그는 마침내 네 번째 옥살이에서 풀려났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군부독재, 분단으로 고통당하는 남북의 주민들, 영·호남의 지역 대립, 끈질긴 빈부격차 등을 고민해야 했다.(중략) 아직도 낡은 틀에 갇혀 있는 현실에 다시 젊은 시절의 ‘직진 본능’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자기 몸처럼 아끼던 젊은이들이 분신하고 투신하여 목숨을 끊는 사태를 저지하지 않으면 ‘선배 노릇을 내던지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김지하와 함께 한반도의 해방과 민주, 생명평화를 꿈꿨던 분들은 부디 그의 명복을 빌어주시길 바란다. 가슴의 응어리가 있다면 푸시길 바란다. 떠나는 김 시인에게 그가 구성지게 부르던 노래 ‘부용
산’을 들려주고 싶다. (219-220쪽, “구성지게 부르던 ‘부용산’ 들려주고 싶구려” - 이부영)
○ 지하가 부인 김영주金玲珠와 결혼한 것이 1973년 4월 7일이었고, 1년이 지난 1974년 4월 23일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
지 처분으로 석방되었으나 그해 3월 13일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되어 잠을 안 재우는 등의 잔혹한 심문을 받는다. 1976년 12월 31일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지하의 총 형량은 기존의 무기징역에다가 7년
이 추가된다. 이후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독방에서 복역하여 정신적 피폐를 겪다가 5년 9개월만인 1980년 12월 12일 석방된 것이다. - 256쪽, “김지하를 위한 변명” - 송철원
○ 김지하의 난초 그림이 지향하는 세계는 한마디로 ‘기우뚱한 균형’이었다. 그것이 김지하가 늘 강조해온 ‘미(美)의 율려(律呂)’였다. 우리는 김지하가 동학에 심취하여 전통사상을 다시 우리 시대에 소환하였음은 모두가 알고 존경하는 바이지만, 한편 김지하는 동서양의 고전도 파고들어 존재와 현상의 제 법칙을 깊이 있게 성찰하였다. 그 대표적인 동양사상의 예가『 주역』을 깊이 있게 탐구한 것이다. 동학에 심취한 김지하가 불교의 달마도를 그린 것도 그렇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동학은 내 실천의 눈동자요, 불교는 내 인식의 망막이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 308쪽, “우려한 븟놀림에 서린 절절한 울림 - 김지하의 글씨와 그림” - 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