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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 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3. 18. 15:28
전환 이야기
열망의 유토피아가 온다
■ 이 책은
이 책은 총체적인 위기와 극단에 내몰린 우리 생명의 활로를 모색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전환운동의 철학과 방법론을 제안한다. 내 삶을 전환하며, 우리 사회를 전환하며, 마침내 문명의 전환을 만들어가는 치열한 모색과 실천 경험의 재음미, 그리고 새로운 사회,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절절한 생명운동의 전망을 담아냈다.



■ 저 자 : 주요섭
■ 분 야 : 철학
■ 발행일 : 2015년 3월 10일
■ 발행처 :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 페이지 : 320쪽
■ 가 격 : 15,000원
■ 판 형 : 140mm ✕ 210mm (두께 16mm)
■ ISBN : 978-89-97472-90-1 부가기호 : 03300
■ 문 의 : 02-735-7173
■ 출판사 서평
전복될 것인가, 전환할 것인가
-깨어나 다시, 중심이동하며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긴장 타자 대한민국,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희극의 시대는 가고, 비극의 시대가 다가온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비극으로 한번, 희극으로 한번 되풀이된다고 했다. 그러나 2015년 대한민국에서 역사는 “희극에서 비극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확장 과정은, 고난스러웠지만 결말은 희극이었다. <국제시장>의 덕수는 고난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지만, 생의 마지막 대목에서 “아버지, 내 잘 살았지요!”라고 소리 칠 수 있었다.
다가오는 시간은? 경제위기와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하여, 비극의 막장극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예고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우리는 사상 유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지만, 우리 생의 마지막,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일찍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비통하게 부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낭만적인 읊조림이 아니다. 1920년대의 대공황은 파시즘의 발호로 귀결되었다. 지금 우리는 그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조)부모님들은 “늬들이 전쟁을 겪어 보지 않아서” “늬들이 보릿고개를 겪어보지 않아서”를 입에 달고 살았다. 공포의 ‘D’(디플레이션)이든, 무지막지해 보이는 원전1호기 수명연장이 불러올 비상사태든, 우리도 훗날 ‘늬들이~’를 뇌까릴 수 있을 테니, 불행 중 다행인가? 적어도 4.16을 함께 목격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
 
통일대박론–한국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자백
전복당하는 배에서는 가만있으면 안 된다!

지금 광장에서는 또 한 번 ‘종북놀/몰이’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건 아니란 건,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알면서 속이고, 속아 주는 거다. 단지 시간 끌기일 뿐인 온갖 작태에 짜증이 나긴 한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호, 아니 어쩌면, 지구호 전체가 그런 놀/몰이에 몰두할 만큼 한가한 시점이 아닌 거다. 그러한 장난으로 돌 던지기 놀이에 일희일비하기에는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왜 통일대박론을 내놓았을까? 시중의 여론은 부정적이다 못해 냉소적이다. 씨도 뿌리지 않고 추수할 기대에 부푸는 건 고사하고, 상대방의 염장(전단 살포 방조)을 지르면서 입으로는 잘해 보자고 말하는 셈이니, 가야 할 길이 먼 북한이 “통일 대박론은 전쟁 대박론”이라고 격앙하는 건 북한으로서의 고육지책인 셈이다.
무엇보다 통일대박론은 ‘섬나라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승승장구할 것 같던 한국 경제는 미국의 경이적인 성장 국면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동북아 균형자는커녕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것은 어떤가. 그예, 북한이라는 미개척 시장에서 한계의 돌파구를 찾고자 한 것이 통일대박론이리라. 이제 그도 안 되니, ‘제2의 중동붐’ 운운하지만, 그건 또 쪽박난 제2의 자원외교 아닌가 의심케 된다. 이쯤에서, 대한민국호가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진정으로 실감해야 한다.
 
부자(父子)가 일자리를 다투며, 생식 욕구마저 차단당하는 사회!
질문은 단 하나! 전복될 것인가, 전환할 것인가?

수십만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한 진보정당은 허무하게 해산되고,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 가는 시민단체! 정치경제 권력자들의 도도한 압박에 ‘을의 반란’을 꾀한다고 하지만, 겨우 깃털에 계란 얼룩이나 묻히고 마는 ‘갑남을녀.’ 눈에 보이는 갑은 갑이 아니다. 진정한 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그들에게는 갑이라는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는다.
SNS 화면에서의 화려한 ‘을의 승리’를 만끽하고, 현실로 돌아와 보면, 아버지는 아들의 일자리를 탐하고, 아들은 일자리를 선점한 아버지를 증오한다. 아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눈물바람을 하지만, 눈을 들어 미래를 보면, 연애와 결혼과 출산과 우정과 집 한 칸은 온데 간데 없는 ‘오포세대’가 아들의 현실이고 우리의 미래다. 희망은커녕 생식 욕구마저 차단당한 사회, 모든 을(乙)에게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전복될 것인가? 전환할 것인가?
 
자본주의 '이후', '바깥'을 상상하라!
혹은, 21세기에는 21시간 노동을!

이대로는 정녕 아니다. 탈출은 이미 시작되었다. 길이 있어서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다. 무작정의 액소더스, 생명 감각이 시키는 대로, 전복당하는 배에서 탈주하는 쥐떼들처럼이라도, 지금은 탈출할 때다. 예컨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진출에 목을 매는 대신, “반(半)백수 노동”이 정답일 수 있다. 한계비용 제로시대를 염두에 두어도 좋다. 과잉노동→과잉생산→과잉소비→과잉탄소(오염)→죽음의 과잉이 지난 세기까지의 삶의 방식이라면, 노동시간단축→나눔/돌봄노동의 증대→생명과 평화의 상생경제가 미래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만능열쇠가 아니라고 한다면, 좋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죽음’의 계곡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징후도 없지 않다. 힐링 신드롬, 귀농귀촌-최근 귀농인구가 이농 인구를 처음으로 넘어섰다는 통계가 있다, 협동조합, 인공지능 열풍은 전환의 구체적인 징조이다. 40년 전 <꽃들에게 희망을!>이 예견했듯이, 애벌레 무리를 밟고 올라서서, ‘최고의 애벌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비의 비상, “전환”이 답이다. <설국열차>가 예고했듯이, 죽음을 무릅쓰고 ‘머리칸’으로 전진하는 삶이 아니라, 열차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도약, “전환”이 답이다.
 
열망하라, 생명 살림의 봄, 유토피아를!
내가 바뀌면, 바뀌어야만 세상이 바뀐다

정치경제적 불평등, 생태환경의 불균형, 영성과 영혼계의 부조화. 한마디로 오늘 우리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에서 지속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삶·생명의 위기는 공허한 위기론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현실이다. ‘세월’을 견디는 어린이·학생, ‘열정페이’를 견디는 젊은이, ‘유리천정’에 갇힌 여성들, 빈곤의 절벽 위에 선 노인들, 누구랄 것 없이, 전환만이 희망이다. 1%의 기득권자를 제외하고 99%는 변화를 원한다. 아니, 이미 ‘전환’은 시작됐다.
전환에는 흔들림이 뒤따른다. 어떤가. 그 흔들림에 몸을 내맡기고 불안을 견디는 것은. 견딤의 그 시간을 ‘고치의 시간’이다. 무한경쟁 혹은 불멸의 식욕에 짓눌린 애벌레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죽음의 시간, 무의 시간이 아니라 열망의 시간이다. 열망함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숙성시키는 잉태의 시간이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 그날, 죽은 겨울나무에서 새봄 꽃잎이 돋아나듯, 죽음 같은 욕망 아래에서 숨죽이던 열망의 약동으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이 책은 2013년 봄, 절망의 끝에서 전환의 시대를 예감하고, 2014년 봄, 동학농민혁명 2주갑 120주년의 봄에 전환의 시대를 공감하고, 2015년 봄, 전환의 시대의 약동을 절감하며 써 내려간 글들을 모은 책이다. 전환의 방법은 결국 고전적이다. 우리 시대의 전환은 “의식의 전환, 생활의 전환, 체제의 전환”이며 “주체의 전환, 가치의 전환, 운동의 전환”이다. “내가 바뀌면 우리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문명의 전환”이다.
 
 
■ 차례

 
I 전환, 깨어나기 다시 살기
호랑나비 애벌레의 깨달음
숨과 틈, 그리고 공모-자유시장의 제국에서 살아남기
반(半)백수로 다시 살기
몸 생명에 관한 명상
교황 프란치스코와 자본주의 넘기
 
II 전환, 사회적 중심 이동
생명평화와 문명의 전환
박애의 패러다임과 호혜사회의 비전
생명경제와 체제 전환
모심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생명정치와 민회운동
민회운동과 사회협약
 
III 전환, 열망의 유토피아
한국형 전환운동을 제안한다
전환이 개벽이다-동학혁명 2주갑에 생각하는 생명운동의 길
지금여기 전환이다-열망의 유토피아와 이매지널 네트워크
 
IV 보론 전환의 사회운동
한국 생명운동의 현재와 미래
무위당과 영성적 사회운동
동학혁명과 열망의 사회운동
 
 
■ 책 속에서

 
설국열차와 같은 폭주의 애벌레 기둥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이심전심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미 설국열차의 바깥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은 한국사회 여기저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중략)… 최근 몇 년 사이 해방 후 처음으로 귀촌귀농 인구가 이촌이농 인구를 넘어섰습니다. ... 흐름이 바뀌었다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가 거센 열풍으로 대세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경향각지에서 수많은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정부, 시민사회, 재계가 앞 다투어 마을기업과 사회적 기업을 돕겠다고 나섭니다. <본문 23쪽>
 
자본주의의 약탈적 팽창은 ‘비(非)’자본주의의 세계가 존재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근래 20여 년 동안 지구 자본주의를 이끌었던 동력은 지금껏 시장경제의 광대한 변방이었던 중국과 인도가 개발의 나팔을 불며 진군하는 데서 만들어졌습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촌과 농업이라는 개발의 처녀지를 희생시키고, ‘재생산 노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비화폐적 돌봄노동을 딛고 한국 자본주의는 성장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35쪽>
 
노동시간 단축은 ‘시간 주권’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얻는 화폐소득은 줄어들지만 대신 임금노동에서 해방되어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돈 대신 시간을 취하는 것입니다. 정말 반절은 돈벌이 노동을 하고 반절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반(半)백수가 되는 것입니다. …(중략)… ‘자유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바로 노동시간 단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 46쪽>
 
삶의 전환이란 노동시간 단축이 보여주듯 곧 다운시프트(downshift, 축소 전환 혹은 축소 이행)입니다. 삼소(三少) 혹은 3S.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적게 씁니다. 느리게(slow), 조그맣게(small), 유연하게(soft). 그리고 세 개의 S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S가 있습니다. Simple, 단순 소박하게 사는 것이 우리 시대 행복의 길입니다. 다운시프트는 새로운 풍요입니다. 돈은 적게, 삶은 풍요롭게. 삶의 전일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50쪽>
 
삶의 전환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흐름으로서의 귀농과 산촌 유학이 생명 감각의 적극적이며 긍정적(positive) 대응이라면, 자살과 저출산은 극단적인 부정적(negative) 반응이다. 차라리 그것은 생명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최후의 저항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OECD 최저의 출산율은 이를 반증한다. 묻지 마 살인과 막장 범죄는 더욱 끔찍하다. 살아 있으되 삶이 아니다. 어느 한편에선 부동산 투기 실패로 세 모녀가 자살을 하고, 다른 한편에선 고급 유모차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본문 84쪽>
 
좌와 우,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야 한다. 생명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했으나 오히려 산업문명의 구조에 함몰됐다. 이제 산업문명을 제패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나,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후의 가치와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척도는 ‘삶·생명’이다. 모든 존재는 살아 움직인다. 살아 있는 존재는 각각 다르되 모두 연결되어 있다. 관계적이고 변화하며 다양하다. <본문 92쪽>
 
호혜사회는 사랑과 자비와 우애와 형제애가 자연스러운,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기초가 되는 열망의 유토피아다. 성장의 한계, 경쟁의 한계를 넘어서 ‘삶의 길(life based path)’에 대한 열망이다. 경제적 인간을 넘어서는 호혜적 삶의 양식, 우-자유와 좌-평등의 균형 위에 우애의 시선을 담은 열망의 사회. 2008년 봄 촛불의 대하(大河)처럼 열망이 솟구친다. <본문 133쪽>
 
자본주의는 부의 대가로 지구생태계와 인간성과 공동체를 치명적으로 파괴하였고, 급기야 자본의 재생산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아니다. 체제 전환의 때가 되었다. 사회적 위기, 생태적 위기, 그리고 경제 시스템 그 자체의 위기를 인정하고 또 전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생활양식의 전환만으로는 건강한 삶을 기약할 수 없다. 거꾸로 ‘또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시스템의 자기조직화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 ‘체제 전환’이다. <본문 141쪽>
 
한국의 민주주의가 초라하다.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파 인터넷사이트 ‘일간 베스트’의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고, ‘민주’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문을 닫았으니 민주주의 그 자체는 몰라도 ‘민주화’와 ‘민주화 세력’의 위기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70~80년대 세대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했던 민주주의의 신화가 사라졌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더 이상 전설이 아니다. …(중략)… (사람들에게 더 이상) 민주주의가 절실하지는 않다. 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자리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만도 아니다. 나와 우리의 복잡하고 섬세한 마음을 담기에 투표용지의 크기는 너무 작다. 찬성/반대 둘뿐인 선택지는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정녕 ‘새 정치’가 절실하다. <본문 169쪽>
 
전교 1등을 고수해 온 고등학생이 “머리가 가슴을 갉아 먹는다.”고 호소하며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고, 조기유학을 위해 아이를 미국에 보낸 40대 가장이 “아빠처럼 살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는다. 삶의 위기, 생명의 위기다. 자기 삶의 지속 가능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면 다른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177쪽>
 
마을에서 지역 안에서, 또 마을과 지역을 횡단하여 기후변화를 걱정하고, 우리 교육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모이고 의논하고 또 변화시켜 내야 한다. 이미 전 지구적 전환 네트워크와 전환 플랫폼으로 형성되고 있다. 민회운동은 새로운 공동체 만들기다. 나아가 새로운 문명 만들기이다. “내가 바뀌면 우리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본문 191쪽>
 
이렇게는 정녕 아닙니다. ‘각비(覺非)’, 수운 최제우가 19세기 조선에서의 삶과 사회를 돌아보며 뒤늦게 얻은 통절한 깨달음입니다. 새로운 삶의 모습은 보이지는 않지만 이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탈출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탈학교, 탈노동, 탈도시, 탈종교, 탈물질, 탈정당, 탈자본, 탈국가…. 여전히 대세는 돈과 권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상치가 않습니다. 협동조합 열풍이 불고, 귀농귀촌 인구가 이농 인구를 넘어서고, 무엇보다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 일어나는 힐링 신드롬이 수상합니다. <본문 231쪽>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시장의 실패와 정부의 실패를 오락가락하는 전통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경험은 끔찍합니다. 1920년대 경제 대공황 이후가 떠오릅니다. 결과는 전쟁 혹은 파시즘이었습니다. 극단주의의 준동은 두 번째의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차원 변화인가 야만화인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 이제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점프를 하는 것입니다. 전환 사회는 여백을 발견한 이들에 의해 창조됩니다. <본문 256쪽>
 
한국 사회에서 생명운동의 의미는 심대하다. 무엇보다 생명운동은 ‘생명’을 열쇠말로 한국 사회에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시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좌우 이념을 안고 또 그것을 넘어 문명 전환의 전망을 보여주었다. 유럽의 생태주의 운동에 비견되는 한국적 대안 담론과 실천을 축적해 왔다. 또한 생명운동은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협동조합을 넘어서 도농상생, 생산-소비 공동 참여의 새로운 협동 운동 모델을 만들어 내었다. 요컨대 ‘필요의 협동조합’을 넘어서 ‘열망의 협동조합’이다.<본문 278쪽>
 
생명운동은 무엇보다 ‘열망(aspiration)’의 사회운동이다. 생명운동은 ‘지금 여기’의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사람과 사회의 내면 깊은 곳에 깃들인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 생태적 삶에 대한 열망, 영성적 삶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열망은 생명운동과 문명 전환의 근거이자 에너지이다. 우리 안에 숨겨진 하나 됨에 대한 열망이 지금 여기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사회로, 새로운 문명으로 피어난다. <본문 283쪽>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내려야 할 때이다. “이대로는 정녕 아니야.”,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어.”라는 느낌이 들면 결단을 해야 한다. 결정적인 시기에는 ‘생명감각’에 의지해야 한다. 전환의 계기가 ‘각비(覺非) 즉 아니다’라는 자각이라면, 그 실천적 출발점은 엑소더스다. 농약으로부터의 엑소더스, 핵으로부터의 엑소더스, 서울로부터의 엑소더스, 고용노동으로부터의 엑소더스, 요양병원으로부의 엑소더스, 학원으로부터의 엑소더스, 자동차로부터의 엑소더스, 자본 숭배와 경쟁 시스템과 물질주의적 생활양식으로부터의 엑소더스…. <본문 297쪽>
 
20년 전, 개벽적 열망으로 분출한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2주갑이 되는 2014년 오늘, 동학을 통해 한국 사회운동의 ‘오래된 미래’, ‘오래된 새 길’을 묻는다. 열망과 전환의 사회운동, 그 한국적 원형이 ‘동학’에 있다. 열망과 전환의 관점에서 동학을 새롭게 보아야 한다. 동학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동학은 농민혁명, 계급혁명만이 아니다. 동학은 단지 척양척왜의 민족운동만이 아니다. 120년 전 갑오년의 일시적 봉기가 아니다. <본문 307쪽>
 
그리고 그 ‘나들’이 만나는 광장, 마당, 플랫폼이 절실하다. 서로를 구속하는 결사체나 대동단결의 연합체라기보다는, 이를테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플랫폼이다. 들고남이 자유롭고 오고감에 제한이 없는, 그러나 광장 한가운데 보이지 않는 중심, 즉 공심이 있어서 각자 돌아가 있어도 여전히 하나로 연결된 네트워크적 마당. 마당과 아고라와 신시(神市)는 전일적 에너지/정보의 장(field)이다. 촛불이 그랬던 것처럼, 민의가 모아지는 민회(民會)면서, 신명나게 노는 축제의 장이면서, 심령대부흥회(?)의 탈교회적 교회당이다. <본문 317쪽>
■ 저자 소개

주요섭 __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시절을 좇아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1980년대 말 고향 정읍에 돌아와 지역공동체운동을 시작하고, 이후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지역’과 ‘생명’을 화두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010년대 말부터 한살림운동에 집중하는 한편, ‘전환’을 키워드로 새로운 삶과 사회, 문명의 실현을 위한 프로세스와 프로그램을 ‘상상’하고 있다.
『세계화는 지구환경을 어떻게 파괴하는가』(역서),『녹색대안을 찾아서』(공저) 등의 책을 펴냈으며, (사)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반년간(半年刊) 생명운동이론지『모심과살림』을 만들면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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