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논단

천도교 남북 교류 협력사

소걸음 2014. 1. 4. 01:15

천도교 남북 교류 협력사

 

박길수 / 동학민족통일회 기획위원장, 본지주간

* 이 원고는 2014년 1월호 신인간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편집실주: 포덕154(2013)년 12월 24일,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천도교 공동행사에서는 ‘남북천도교 교류협력’의 역사를 일별함으로써, 현재의 남과 북의 천도교가 서 있는 좌표를 확인하고, 앞으로 통일교류 협력에 나서는 자세를 새롭게 다지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당일, PPT를 통해 영상 자료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천도교에서는 "남북교류협력사편찬위위원회"를 구성하여 올해 안에 남북교류협력사 백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들어가는 말


천도교는 남북 분단 이래 한 순간도 쉼 없이 민족통일을 염원하면서 남북한 천도교 교류와 통일운동을 전개해 왔다. 역사의 굴곡의 골이 깊은 만큼 시행착오들도 숱하게 많았지만, 그러한 희생과 오점들도 오늘 천도교 남북 교류 협력과 통일운동 역량의 밑거름으로 삼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천도교 남북 교류 협력사를 일목요연하게 보기 위하여 4개의 큰 시기로 시대구분을 시도하고,그 시기 천도교 전위단체의 역사와 단체 특성도 함께 살펴보았다. 이는 천도교의 전위단체가 각 시기별로 민족운동의 핵심적 과제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 온 전통을 감안하여, 분단시대에 명멸한 천도교의 전위단체들이 일관되게 ‘통일’을 핵심 과제로 삼아 왔던 점을 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천도교 남북 교류의 시대 구분은 대체로 한국 사회 차원의 정치적 흐름, 남북 관계 변화의 계기들과 맞물리지만, 그 내부에는 숱한 부침을 겪었다. 아래에서의 개략적인 이해를 심화해 나가면서, 천도교 통일운동과 남북 교류 협력사의 오랜 노력의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시대구분과 천도교 통일운동 단체 역사


1. 제1기(1945.8.15.-1960.5.16.)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진행된 남북 분단, 일제 강점기 말기에 지하화했던 북한 지역 천도교세가 일거에 부활하면서 2백만에서 3백만에 달하는 천도교 세력이 형성된 시기로부터 출발한다. 이 시기에는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전위단체의 부활과 해산이 진행되었으며, 뒤이어 남북한 간의 전쟁과 북한 천도교인의 대거 월남에 이어 분단선이 고착화되면서 덩달아 남한 지역의 반공 체제가 고착화되는1960년대까지이다.

해방 직후 <청우당(남, 1945.09.14.-1949.00-00)> <청우당(북, 1946.1.16.-현재)> <보국당-만화회(1946.07.07.-1950.06.25.)> <천도교보국연맹(1950.07.28. 청우당서울시당(1950.7.10.)해산)> <동학회(1957.12.24. 대회결의, 남, 천도교보국연맹 후신)> 등의 전위단체들이 명멸하면서 통일운동과 천도교의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시기 천도교 전위단체들은 임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뚜렷이 하였고, 중립적 통일방안,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체제를 모두 아우르거나 모두 비판하는 체제 구상을 갖고 있었다. 다만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이념적 재편이 이루어지면서 남과 북의 천도교는 각각 반공과 친공을 표방하면서 대립적 구도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천도교의 통일운동, 정치운동의 지향은 교정쌍전의 이념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실천할 “전위적 정당”을 구성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다. 이론적으로 “천도교의 정치이념”이라고 하는 불후의 천도교 이념서 남북 청우당 핵심 이론가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간행되어 이를 뒷받침하였고, 대외적으로 신망 있는 천도교인들이 다수 분포하고, 정당 정치활동의 경험을 가진 교인들도 다수 있어서, 전위정당 건설이 꿈같은 일만은 아니었다.


2. 제2기(1960.5.26.-1987.6.10)


이 시기는 다시 박정희 정권시절인 1960-1979년까지와 1980-1987년의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60년 4.19혁명으로 활성화하던 통일운동이 5.16군사 정변으로 괴멸되고, 그 이후 약 30년간의 군사정권하에서 통일운동이 좌경, 용공운동으로 매도되어, 남북교류는 위축되고, 천도교의 통일운동과 남북 교류 역시 제한적으로 운용되었다.

4.19혁명 직후 전위정당 부활를 위한 ‘동학당 발기인대회(1960.12.22.,남)’가 개최되었으나 군사정변으로 무산되었고, 진보적 성향의 교역자들이 ‘통안당’을 결성코자 준비 모임(1971.11.30.,남)을 가진 기록은 있으나 가시화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최덕신 교령 주도로 <새인간연맹(1970.04.01., 남)이 창설되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최덕신 교령에 대한 재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교단적 과제가 해결된다면, 여기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도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된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민주화운동에 뒤이어 북한 바로 알기를 필두로 한 통일에의 요구가 물밀어 오르고,운동노선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서 통일을 민족 최우선의 과제로 내세우는 세력이 뚜렷이 세를 형성하면서 통일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또한 해외를 중심으로 남북 교류와 통일운동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그 동력이 국내의 통일운동에도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남 – 북 – 해외라는 삼각 편대가 형성되어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어 갔다.

이러한 배경 하에 80년대 들어 천도교에서도 통일을 중심에 내세운 <천도교민족통일연구회>가 결성(1984.05.11.)되기에 이른다. 천도교민족통일연구회는 통일 강좌 및 자료집 발간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통일의 기운을 조성하는 데 힘서 나갔다.


3. 제3기(1987.6.10.-2007.10.4.)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통일운동이 표면화되면서 당국간 교류와 민간 교류 양측에서 활성화가 전개되는 가운데, 드디어 2000년 6.15공동선언과과, 2007년 10.4공동선언이라는 성과가 나오는 시기로, 천도교의 남북 교류도 지하에서 표면으로 부각되어 왔으며, 숱한 부침 속에서도 남북 천도교의 상호 교류와 신뢰 구축이라는 큰 성과를 축적하였다.

이 시기에 천도교는 <천도교남북교류추진위원회(1989.07.03,남)>를 거쳐 <동학민족통일회(1991.05.11.,남)>라는 이름으로 전위단체를 부활시킴으로써 천도교 남북교류와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특히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남과 북의 교류는 봇물 터지듯 이루어졌는데, 역대 교령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북을 방문하여 류미영 위원장 등 북측 교인들과 만난 것은 물론 류미영 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하는가 하면, 남과 북의 대교당에서 남북의 교인들이 합동시일식을 봉행하는 감격적인 장면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전위단체인 동학민족통일회는 천도교 남북 교류 협력에 앞장서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6.15공동선언실천남측준비위원회>, 국내 민족진영과 연계한 남북 교류 협력, <겨레의 숲> 같은 관련 단체를 통한 남북 교류 협력 등으로 그 활동 폭을 넓혀 왔다.


4. 제4기(2007.10.4.-2013.12.30.)


이명박 정부 이후 다시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에 돌입하여, 현재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남북 관계는 2010년의 5.24 조치가 상징적으로 말해 주듯, 제3기의 남북 교류 및 통일운동의 성과, 특히 2000년 이후의 교류 성과를 부정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천도교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전반적인 한국사회의 남북 교류 교착화, 통일운동의 위기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고, 통일운동에 대한 천도교의 책임성을 부각시키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동학민족통일회는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의 연대 단체, 연합 단체 활동을 강화하면서 통일운동의 활동 폭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천도교 남북 교류 협력 주요 역사


1.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남북 천도교 교류


앞에서 살펴본 대로,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이후 1970년대 초까지 천도교의 남북 교류 협력 및 통일운동의 역사는 한마디로, 강고한 통일운동의 역사가 세계적 차원의 냉전 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위축되고, 오히려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큰 틀 속에 예속되어 갔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78년 당시 춘천교구장이시던 이도천 선도사께서 남북통일을 염원하며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분신 순도하신 일은, 천도교인들의 통일 열망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1980년대 남북 천도교 교류


70년대까지도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특별기도는 끊임없이 진행되었으나,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통일 기반 성금 모금 등, 좀 더 구체적인 활동과 병행한 특별기도회가 매년 끊이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러한 열기를 바탕으로 1984년에는 천도교민족통일연구회가 결성되었으며, 1988년에는 <평화통일기도문>을 작성하여 매일기도식을 비롯한 주요 의식 때마다 고하는 통일기도회를 전개하면서, 제3국을 통한 서신 왕래를 통해 남북 천도교 교역자 교환 방문을 위한 시도가 진행되었다.


3. 1990년대의 남북 천도교 교류


1991년 ACRP회의에서 남북 천도교 교역자의 직접 접촉이 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래, 1993년에는 오익제 교령과 류미영 위원장이 중국 북경에서 교단 대표로는 최초의 회동을 갖고 남북 천도교 교류 정례화와 동학혁명 100주년 공동행사 등을 합의하였다.

그 이후 수 차례 서신 교환과 천일기념일 합동행사 제안 등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비롯한 실질적인 만남과 교류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제3국을 경유한 접촉이나 우리민족서로돕기 등을 통한 간접 지원에 참여하는 것으로 교류 협력이 진행되었다.

1997년, 전 교령이던 오익제가 전직 교령으로서 두 번째로 월북하는 사태가 벌어져, 천도교의 남북 교류 협력의 역량에 일시적이 타격을 주었으나, 천도교인들은 전교단적인 49일 특별기도를 전개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나갔다.

그러나 1999년 1월에 박남수 당시 종의원 의장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조선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를 처음으로 방문함으로써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4. 2000년대의 남북 천도교 교류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의 극적인 만남과 공동선언이 이루어진 이후, 남북 교류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해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호방문 행사 때 류미영 위원장이 북측 이산가족 상봉대표단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였으며, 천도교인들은 공항에서부터 시내에 이르는 길목에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진행하였고, 김광욱 당시 교령과 위원장의 만남도 성사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주선원 종무원장 대행 등 남측 천도교 대표들이 북측 평양 중앙교당을 방문하여 해방 후 최초의 합동 의식을 봉행하였으며, 그 이후 현재까지 해마다 1회 이상의 합동시일식 또한 공동성명 발표 등의 공동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2002년 10월에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 공동 행사로 개최된 개천절 행사는 남과 북의 천도교가 주도한 행사였으며, 그 이후 개천절 등 민족 사업을 전담하는 남과 북의 전위단체가 이 부문 운동에 협력적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으며, 포덕 154(2013)년에도 어려운 가운데 개천절 남북 공동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 낸 바 있다.

2005년 7월에는 카쓰라 테프트 밀약 100주년에 즈음하여 남과 북의 천도교인들이 앞장서서 보국안민척왜양창의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이후 국내 또는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민족적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남과 북의 천도교 공조체제가 가동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05년에는 중국 심양에서 남과 북의 천도교 전위단체(청우당–동학민족통일회) 회담을 하였고,그 결과 중의 하나로 당시 북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던 모내기용 비닐박막 지원을 하였다. 그 이후 남북 천도교의 상호 지원 사업은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으며, 동학민족통일회에서는 상설 프로그램으로 북한 어린이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지난 2011년 9월, 대한민국의 주요 종단(‘7대 종단’) 수장들이 사상 최초로 합동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상호 이해의 장을 마련하는 종교인 모임을 개최한 바 있다. 천도교에서는 교령(임운길)을 비롯한 수행원들이 북측의 류미영 위원장을 비롯한 교단 관계자들과 협의하여 행사가 성공리에 개최될 수 있도록 북측 당국과 협의하는 등의 노력을 전개하였고, 종교인 개별 교류에는 이웃 종교인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남북한 간의 교류가 경색되고 오히려 긴장 국면이 조성된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남북한 천도교 간의 교류, 연락 등을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특히 대북 인도적 지원의 지속, 재개, 확장을 위한 노력(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 2011.4.12)이나 “한반도 전쟁 방지와 평화 정책 촉구”(2010.11.29), 남북정상회담 촉구(2010.6.17) 등의 활동을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전개함으로써 민족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나가는 말


현재 남북 관계는 십여 년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가 심화될수록 천도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오늘의 위기를 타개할 역량과 지혜가 천도교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안팎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민족통일은 천도교가 앞장서야”라는 수십 년 동안의 되뇌임을 실천으로 옮길 때가 바로 지금 우리 앞에 도래해 있다는 사실이다. 천도교중앙총부와 동학민족통일회는 올해가 그 원년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한편, 특히,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아 남과 북의 천도교가 전국의 동학인들을 아우르며 공동사업을 전개하는 것으로 중차대한 계기를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천도교가 준비하고 기획하는 통일은 단순한 ‘단일화’가 아니라, 우리 민족과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을 한 차원 고양시키는 새로운 시대로의 전개에 값하는 것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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