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평화는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공감과 공존의 ‘비빔밥 평화’ 만들어야
<정진헌 ㅣ 독일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연구원 선임연구원(문화인류학 박사)>
● 평화와 평화들
● 이찬수 지음 |모시는사람들 | 192쪽 | 1만1000원
‘평화’는 인류의 보편적 열망이다. 여기서 열망이란 개인적 기대와 바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개인과 집단들이 미래 지향적 문화를 일구어가는 실천의 차원을 의미한다. 때로 그 실천은 의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분단의 긴장이 팽팽한 한반도에서, 평화인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시리즈로 펴내는 ‘평화교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찬수 교수의 <평화와 평화들>이 그 첫 디딤돌을 놓았다.
첫 페이지부터 신선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나바호족 전사의 몸에 달린 방울소리처럼, “인간적 희망의 공동 근거로 작동하는” 평화, 평화들에 대한 저자의 깊은 사색이 솟아오른다. 그러면서, 정작 인류 역사상 “세계 전체가 평화로웠던 적은 없다”고 일갈한다.
사실이다. 심지어 수 만년에 걸친 사망률보다 높은 살육과 파괴가 자행되었던 단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이후, 인류가 그나마 가장 평온하게 성장을 이루었던 지난 반세기를 우리는 냉전 시대라 부른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도 냉전적 분단 구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갈등을 내재한 채 평화를 구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런 누군가의 평화 속에서 더 많은 누군가는 절망했다. 이 부조리한 평화 현실을 이찬수 교수는 “평화 문맹”의 시대라 부른다. 평화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과정”에 둔감한 시대를 성찰하자는 제안이다.
<평화와 평화들>은 기존 평화 개념들을 저자의 섬세한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해체하고, 한국적 맥락에 맞게 재구성한다. 특히 “과정”으로서의 평화에 주목하는 혜안이 돋보인다. 기존 평화론은 폭력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규정해 왔다. 이는 평화를 정의하기 위해 폭력의 범주를 개념화, 상대화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한다. 기존 서구 학계의 평화 연구자들이 폭력의 종류들을 발견하고 구분하는 데 대부분의 노력을 쏟아왔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 대 평화라는 이분법 대신, 이 교수는 평화다원주의의 입장에서 “평화들”을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갈등을 선과 악의 대결처럼 양극의 대립이 아닌, 서로 다른 평화관들의 충돌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평화들간의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과정, 다시 말해, “폭력을 줄이는 과정”으로서의 평화가 좀 더 실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언뜻 이러한 과정적 평화를 위해 합리적 이성의 힘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이 교수는 그보다 “공감”이라는 인간 심성과 덕목에 주목한다. 타인의 고통을 그이의 처지에서 이해하고 아파하는 타자지향적 공감. 그 공감에 근거한 고통의 축소가 평화의 실천이자 과정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존재하는 삶. 다양성이 공존하는 평화. 우리에게 낯익은 비유를 들어 이 교수는 이러한 평화를 “비빔밥 평화”라 부른다. 하나 하나의 식재료들이 독특한 색감과 맛을 내되, 한꺼번에 비벼졌을 때 더욱 승화된 맛으로 거듭나는 비결. 이 교수는 이렇게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평화의 비법을 상기시켜준다.
이 책은 어렵고 복잡한 기존 개념들을 단순히 정리한 것이 아니다. 저자의 철학, 신학, 사회과학 분야의 넓은 지식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인류애적 감성이 어우러져,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에서 빚어낸 창의적 저서라 불릴 만하다.
나아가 흐르는 시냇물에 띄워진 종이배처럼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동서양 인문학의 핵심 사상, 철학과 종교적 개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평화인문학”이라는 통섭적 학문 영역도 만나게 된다. 특히 고통의 현장에 자신의 감성을 개입시키는 참여적 객관화로 평화 연구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평화인문학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최근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공감의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잇들이 가득 붙고 있다.
그것은 혼령과의 연대적 공감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공감적 연대의 의례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우리 안의 평화들이 다시금 꿈틀대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나바호족 전사들의 낮고 느리지만 꾸준히 움직이며 대지와 대화하는 평화의 춤처럼, <평화와 평화들>은 독자들을 평화 만들기의 따스한 군무자로 초대할 것이다.
출처 : 2016.06.11 <경향신문>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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