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페스 심포지엄 01
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
이 책은 불교와 기독교를 각각 전공하는 종교학자 및 각 종교전통의 성직자들이 불교와 기독교 교리의 같음과 다름, 두 종교의 상호 소통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주제를 두고 1박 2일에 걸쳐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하고, 이해와 화해와 용서와 공감에 도달한 과정을 담아냈다. 지속적인 대화와 출판 작업을 통해 "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 교리와 진리, 구원과 깨달음을 왕래하고 넘어서는 경지와 세계를 추구하는 '레페스 심포지엄'의 첫 번째 책이다.
레페스포럼 기획
■ 264쪽 I 15,000원 I 152*225 I 2017년 12월 31일
■ 지은이 : 김근수 김승철 김용표 류제동 명 법 손원영 원영상 이관표 이도흠 이찬수 정경일
■ ISBN 979-11-88765-03-4 94210 ( SET 979-11-88765-02-7 94210 )
■ 문 의 : 02)735-7173
■ 출판사 서평
1. 지금 세상에 종교(인)가 필요해? – 초월적인 시각의 제공
최근 세계적인 규모의 한 교회가 오랜 진통 끝에 “세습”을 공인한 것을 두고 사회적으로 지탄과 비난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종교계는 물론이고, 공식적으로는 ‘세습’을 승인한 그 교회 내부에서도 비판과 원상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세상 사람들은 묻는다. 지금 이 시대에도 종교가 필요해? 오늘날 종교인이 보여주는 모습이나 시나브로 줄어가는 종교 인구는 그 답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행태(교회 세습)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그것은 종교(인)이기를 포기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첫 번째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나아가 ‘소금의 은혜’(부패의 방지)를 입기를 거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스스로 ‘빛’이 되기를 포기한 것은 물론 ‘빛(지혜)’으로 스스로를 밝게 하는 것조차 거절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신앙/종교수행/종교지혜가 필요한 이유를 말하라면, ‘초월적인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시각이란 ‘지금 내가 하는 생각 자체를 들여다보고,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그 진위와 가부를 판단하는 시각’ 다시 말해 ‘문제를 인식하는 시각’을 말한다. ‘메타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국정농단의 주범/종범으로 전락한 최순실, 박근혜 등은 자신(들)의 행위, 그 행위를 바라보는 인식 자체를 반성적으로 재인식하는 시각, 즉 ‘초월적 시각’이 부족하거나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신앙/종교수행/종교지혜는 여전히/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2. 초월적인 시각을 얻기 위한 종교간 대화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이다.” (막스 뮐러)
이 말은 종교간 대화 내지 종교 다원주의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금언이다. 불교계 설화에서 유래한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도가(장자)의 설화에서 유래한 ‘우물 안 개구리’, 생활 속의 지혜를 담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 같은 것이 지시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사람의 눈이 두 개가 달린 까닭에 사물과의 거리감이나 사물의 실상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굳건한 ‘믿음’에 크게 의존하는 종교 이해/신앙에 있어서, 타자(이웃종교)를 아는 것은 자기 종교/신앙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하나의 종교전통에 충실한 ‘전형적인 신앙인’은 물론이고, ‘칸막이’를 높여온 근대 학문의 흐름에서 종교(학) 이해 역시 이러한 외눈박이 나아가 장님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향이 오랫동안 심화되어 왔다.
종교의 세계에서 이러한 ‘타자 몰이해’ 또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문화’는 크게는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국가 간 전쟁과 종교 분쟁을 낳고, 작게는 가정 내에서, 혹은 개인간의 크고 작은 종교 간 갈등을 낳게 된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도 '공존의 다종교 문화'를 지켜오는 모범적인 국가로 자처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불화’와 ‘투쟁’의 민낯은 쉽사리 드러난다. ‘정교 분리’를 표방하면서도 정교간의 밀착이 해방 이후 단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심화일로를 걸어온 것도 그러하고, ‘훼불사건’이나 ‘땅 밟기’ 같은 치졸한, 그러면서도 때로는 위협적인 “종교 분쟁”이 빈발하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사건은 ‘종교와 종교 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이단 논쟁’과 같은 ‘소수자 배제와 다양성의 차단’의 행태로 자행되곤 한다. 최근의 사례만 보아도 2016년 1월 17일의 개신교인에 의한 개운사(김천시 소재) 훼불 사건에 대해, 이를 원상회복하기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던 서울기독대 손원영 교수에 대한 학교의 징계, 2006년을 전후로 하여 이찬수 교수(당시 강남대)가 불상 앞에서 절을 했다는 이유로 역시 학교로부터 재임용을 거부당한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종교간/내 갈등과 무지를 근본적으로 해소해 나가기 위해서는 종교 간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두 종교 혹은 여타 종교를 포함한 종교와 종교 사이의 다름과 같음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문화를 뿌리 내리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여, 불교계 종교학자와 기독교계 종교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는 한 참가자의 말이 이러한 대화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3. 불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
한편, 오늘 우리 사회의 종교계는 한편으로 종교인에 대한 신뢰의 감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인구의 감소라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하고, 더 총체적으로는 인공지능의 등장이나 외계 생명체의 탐색, 과학기술의 극단적 발달 등을 통해 종교의 입지가 속절없이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때야 말로, 종교/교단의 발전을 위한 종교/신앙 아니라, 지혜와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깨달음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종교, 빛과 소금으로서 이 세상을 깨끗하고, 맑고, 아름답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종교로서의 본면목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 책(<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답하기 위하여 1박 2일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토론의 성과를 정리하고, 보완하여 간행한 것이다. 기본 출발점이“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라는 점만 공유한 가운데, 자유로운 접근과 형식의 발제가 진행되고, 이어서 이를 두고 상호 이해와 공감을 심화시키는 토론이 ‘뜨겁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종교’의 보편성이나 ‘같음’만을 추구하는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은 그것대로 가려내되, 그것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서 존중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배워 나가는 공부의 장이기도 하였다.
딱딱하고 형식에 구애되는 논문이 아니라, 화두를 던지는 발제에 이어, 전문가로서의 고민과 현장에서의 실천적 경험들을 아우른 ‘종교 간 대화’는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지금 여기에서의 한국인(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끼치는 두 종교 간의 깊은 대화는 오늘의 한국 사회의 고민과 한국인 자신의 과제들이 공동화되고 해결되는 길을 찾아가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레페스 포럼은 “불교와 기독교 간 대화의 출발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두 종교가 처하여 오늘까지 흘러온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제1부를 이룬다. 다음으로 종교간 대화의 이해의 심화는 각 종교의 “교의를 이해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기를 추구한다. 이러한 상호 교섭과 상호 이해를 통해, 각각의 종교에 대한 이해와 신앙은 깊어지고, 넓어져서 종교/교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진리와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다.
4. 깨달음을 말하는 기독교, 구원을 말하는 불교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고 기도하는 ‘타력종교’이고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력종교’라고 말해지지만, 기독교에도 자력적인 요소가 있고, 불교에도 타력적인 요소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개재해 있다.
현실사회에서 신앙하는 사람이나 목회자들, 나아가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종교를 예단함으로써 종교(인)는 타락하고, 구원이든 깨달음이든 종교(인)가 추구하는 목표의 달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마련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신의 자리와 정체성을 엄격히 구분하는 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인간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초월자(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불교와 기독교이 결정적인 차이로 말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인 구분일 따름이다. 기독교에서도 ‘나(인간)’ 안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불교에서도 구원과 해탕을 ‘기원’하는 염불신앙(정토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부처의 눈에는 부처, 돼지의 눈에는 돼지”를 말한 무학대사의 말처럼, 기독교와 불교는 타자 속에서 자아의 진면목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 “참”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5. 종교를 알기, 종교를 믿기, 종교를 즐기기
시를 분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종교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드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종교 안에서 성령 충만을 기도하고 기원하며 종교를 믿는 사람의 삶에는 그러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 신앙”의 위험성을 넘어서서 그 종교를 “즐기는 데까지” 이른 사람이라면, 종교의 경계는 그 또한 무의미한 ‘인위’에 불과한 것이 된다.
종교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서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 차례
제1부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Ⅰ.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_ 원영상
Ⅱ. 불교 공(空)사상과 열린 포괄주의에서 본 기독교_ 김용표
Ⅲ. 불교와의 대화를 통해 신학을 배우면서_ 김승철
Ⅳ.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과 차이, 융합_ 이도흠
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위한 몇 가지 주제들ㅡ이관표
• 종합토론
제2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
Ⅵ. 불교와 기독교, 같은 실재를 달리 표현한다_ 이찬수
Ⅶ.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_ 명법
• 종합토론
제3부 불교와 기독교의 실천
Ⅷ.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불교_ 김근수
Ⅸ.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종교적 삶_ 류제동
Ⅹ. 붓다의 길과 예수의 길_ 정경일
XI. 불교와 기독교, 아픔을 공유하다_ 손원영
• 종합토론
■ 책 속으로
[본문 23 : 불교, 무한이 열린 포괄주의] 진리는 특정인이나 특정 종교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처음으로 깨달은 분(如實知見者)으로, 진리의 발견자이지 창조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리는 누구에게나 본래 열려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제법실상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며, 여러 종교나 철학의 가르침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본다. 불교의 이웃 종교관은 한마디로 ‘무한히 열린 포괄주의(open endless inclusivism)’라고 할 수 있다.
[본문 51 : 연기론과 실체론] 처음에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불자들이나 기독교도나 구분 없이 신과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불자들은 세계를 의식을 넘어 그 자체로 직시하는 것을 더 우선하면서 연기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았고, 기독교도들은 이 세계를 로고스를 통하여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을 우선하면서 실체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았다. 그 후 불교에도 실체론적 해석이 있는데 연기론이 압도하고, 기독교에도 연기론적 해석이 있는데 실체론적 해석이 헤게모니를 가졌다.
[77-78 : 비움과 채움] 우리는 너무나도 가지려 하고, 너무나도 존재하려 하며, 너무나도 힘을 소유하려 한다. 그러나 유한한 세상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상호 간에 연결된 채 서로를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존재만 혹은 무만이 강요되는 그런 것이 삶이 아니라 존재와 무·삶과 죽음·충만함과 비움이 역설적으로 함께 공존하는 그런 곳이 바로 이 유한한 삶이다. (중략)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기 원한다면, 인간이 모두 존재하기 원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깨어 부수면서 비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움과 나약함이란 비로소 모든 것들이 그것의 희생을 통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80-81 : 눈부처와 진속불이]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보입니다. 형상이 부처가 좌선하고 있는 것과 비슷해서 눈부처라고 붙였는데, 저는 형상만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도 담겨 있다고 봅니다. (중략) 원효가 말하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이지요. 그걸 바라보는 순간 타인은 나를 담고 있는 자로 변합니다. 나와 타자, 주와 객이 뒤섞이고 타자 속의 나, 내 안의 타자가 서로 오고 가면서 하나가 되는 경지입니다.
[90 : 자기와 에고] 공-가-중(空-假-中)이라고 하듯이, 공도 역시 임시적인 가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이 있느냐 없느냐 자체에 관한 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서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하는데, 그때 그 말을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 일본의 신학자 야기 세이치(八木誠一)는 그것을 ‘참자기’라고 표현하는데, ‘참자기’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하는 나,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실체론적인 자아죠. 그 에고(ego)를 통해서 참자기가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자기와 에고를 사실은 구별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라는 에고(ego)가 없다면 그 에고를 통해서 작용하는 셀프(self)는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94-95 : 기독교의 연기론] 기독교적 세계관도 실은 연기론과 통할 만한 일종의 관계론을 심층적으로 논의해 온 역사가 있거든요. 신 없는 인간, 인간 없는 신은 불가능하다는 논의랄까, 사람과 사람·사람과 자연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한 논의는 지속되어 왔어요. 다만 그 관계가 서로 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관계여야 한다는, 일종의 가치가 개입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크지요. 그 가치와 당위의 정점이나 근저에서 신을 보는 것이기도 하고요. 궁극적으로는 신과 연결 지으려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외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신이 또 무엇이냐 따지고 들어가면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106-107 : 불교의 실체론] 불교의 교설 체계를 실상론과 연기론으로 나누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후기 대승은 여래장을 불성이나 진아와 동일시해요. 그건 실체론에 상당히 접근된 사상으로, 연기설의 왜곡으로는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무아연기설이 힌두교 스타일의 실체론적 연기설로 환원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 비판불교 학자들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까지 주장하는 거죠. 그렇지만 이러한 실체론화된 연기설은 실체론적 종교와의 대화에서는 하나의 통로와 접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래장 사상이 기독교와 불교의 접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체론과 연기론이 조금씩 양보한 것이죠. 불교와 기독교의 ‘아슬아슬한 접점’을 찾아야 된다고 하면, 이러한 두 패러다임을 회통할 수 있는 해석학적 탐색이 필요할 것입니다.
[112 : 기독교와 불교의 인간 이해] 기독교는 히브리적 전통에서 비롯된 노예들의 종교였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인간을 규정하였습니다. (중략)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전제가 기독교에서는 핵심입니다. 거기에 비해 불교는 철저하게 인간은 불성과 불법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걸 따라 궁극적인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종교적인 논의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봐 왔느냐의 역사가 종교의 역사였습니다. 각각의 종교 사이에 절대 신과 절대 체계가 다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인간의 자기 규정의 차이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113-114 : 기독교와 불교, 대동이 소이]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초월자가 될 수 있다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불교 내에도 서로 같지 않은 측면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정토불교의 경우 인간은 도저히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염불은 사실 여래가 나를 부르는 것이지 내가 여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거든요. 염불은 누군가 나를 불러주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를 부르는 소리를 내가 듣는데, 그것이 곧 나를 부른 소리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 점에서 볼 때는 기독교와 불교 내에서도 시대 상황과 개인이 처한 삶의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신을 이해하고 고백하느냐에 광범위한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교리를 가지고 불교는 이렇고 기독교는 이렇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상호 교차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7-118 : 창조의 의미] 창조를 좁은 의미에서, 그러니까 인격적·발생론적으로만 사유하는 데서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생길 수도 있고, 신과 세계의 관계에 모순이 생기는 것 아닐까 해서요. 창조는 현실 혹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상상에서 나온 고백적인 언어이고, 지금 내가 이런 식으로 살게 되는 것에는 어떤 근원적인 이유와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성찰적 언어이지, 할아버지같이 생긴 어떤 거대한 인격체가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서 밀가루 반죽으로 수제비 뜨듯이 세상을 제조해 낸 것처럼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유가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가리는 원천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략)
[127-128] 차이가 있다면, 만물의 궁극적 원인이자 창조자로 간주되는 인격적 절대자를 전제하느냐, 비인격적 원리를 있는 그대로 따르느냐 하는 점이다. 인간 이전에 선재하면서 세상의 원리를 주관하는 그 어떤 분을 인격적 차원에서 긍정하느냐, 아니면 인간 이전에 선재하는 세상의 원리 자체를 중시하느냐가 부활과 윤회의 결정적인 갈림길인 셈이다. 세상의 기원과 목적을 묻느냐, 무시이래(無始以來) 그래 온 원리를 그 자체로 인정하느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느님은 그 원리마저도 창조하시고 당신 섭리하에 두신다고 강조할 테지만, 불자라면 인간으로서 따르게 되어 있는 원리 자체를 더 중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정오(正誤)’나 ‘우열(優劣)’ 차원에서 판단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모든 우열 판단은 특정 기준하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무엇이고, 열반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폐쇄적일 수 없다. 이들에 대한 최종적 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차별과 우열은 희미해지거나 사라진다. 묻고 또 물을수록 이들은 인간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목적과 관련한 물음에 대한 저마다의 답이자 해석 체계들이라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불교와 기독교는 유구한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온 일종의 세계 해석들인 것이다.
[134] 이른바 ‘심층 종교 경험’이 우리 시대에 좀 더 용이해지고 확산되고 있다.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심층 경험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지는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기록될 정도로 대중화, 보편화된 것은 분명하다. 내가 그랬듯이 이 공통 경험으로부터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내재성의 경험은 실제로 더 멀고 깊은 내면성을 향한 여정의 시작에 불과하지만, 각각의 종교가 서로 차이를 만드는 외피를 걷어내고 속살처럼 부드럽고 열려 있는 공동의 지평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139] ‘중보자 예수’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가장 밑바닥 상황에서 종교를 신앙하기 시작했던 분들이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은 중보자 개념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불교 역시 보살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보자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고 해탈에 들어가지 못한 보통사람들에게 이 보살도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 홀로만 해탈하지는 않고 세속에 남아서 끝까지 다른 이들을 돕겠다는 각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일반 신앙인들을 다른 차원으로 연결해 주는 중보자로 보입니다.
[145] 근본적인 물음은 이런 거예요. 불교에는, 인간이 도저히 자기 한계를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감이랄까 하는 것, 혹은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달음이라고 할지, 속죄라고 할지, 용서라고 할지, 회복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궁극의 경지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거기에 도달한다는 그런 인식이 불교에는 과연 없는지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자등명(自燈明)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나는 스스로를 밝힐 수 없고, 누군가의 은혜를 입어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그런 차원은 불교에는 없는가 하는 것을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146] 불교에서의 타력적 요소는 대승불교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타력의 요소가 법신불이나 보신불 사상으로 가면서, 법신은 편만하여 일체처와 일체시처에 항상 있다는 신앙으로 발전했어요. 이는 신의 상주성이나 편만성 같은 개념과 거의 같은 것이죠. 더군다나 정토신앙·관음신앙·약사신앙 등 대승불교는 거의 다 타력적입니다. 그런 유형의 불자들은 항상 부처님의 가피를 원하는 기도를 합니다. 절에 다니는 이유도 사실은 거의 이러한 타력신앙과 기복에 있습니다. 80퍼센트 이상의 불자들은 자력으로 성불하려는 목적보다는 타력신앙에 의지해 가피를 입어서 공부도 잘하고, 깨달음도 얻고, 그러면서 현세적인 이익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력과 타력을 구분해서 불교가 자력신앙이라고만 말하는 건 거의 맞지 않아요.
[147] 선불교 전통에서도 ‘줄탁동시(啐琢同時)’라고 하여, 새끼가 알 안에서 쪼는 힘과 어미가 외부에서 쪼는 힘이 합쳐져서 깨어난다는 말도 있고, 인연이 만나야 깨닫는다는 말도 있어요. 이 말을 실제 수행의 경험에서 이해해 보면, 깨달음은 자기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원해서 얻는 것은 깨달음이 아닌 거죠. 다시 말하면 깨달음이란 그 자체가 개체성이나 자아가 없는 것, 즉 나의 능동적인 활동의 결과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능동적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단계인 것이죠. 그래서 실제 수행을 할 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내가 수행한다는 생각으로 수행하면 절대로 깨달음을 얻지 못해요. 그런 생각마저 내려놓았을 때 뭔가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그건 타력이라고 말해도 좋고, 자력이라고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선불교는 자력적인 종교이고 정토는 타력종교라고 하지만, 정토도 사실은 온전히 타력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자기의식의 전환이 없으면 안 되지요. 그릇이 안 되면 누가 갖다 준다고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토나 선이나 근본적인 의식에서의 변화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단계는 자력도 아니고 타력도 아닙니다.
[150-151] 저는 자력과 타력을 이분법적으로 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연기적 내지는 대대적, 화쟁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분법으로 하면 초기불교와 선은 자력이고 대승과 정토는 타력이라고 보지만, 초기불교와 선도 타력이 없이는 안 됩니다. 스스로 발심하고 수행정진하여 깨달음에 이르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지 않으면 진정한 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또 정토신앙에서 이름만 불러도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서 노비 출신으로 부처가 된 욱면(郁面)처럼 지극한 정성을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찬수 교수님께서 “무한한 초월자가 제한된 인간 안에 들어올 수 있으려면 인간이야말로 애당초 무한한 초월자와 교감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 자신의 자력적인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부처님의 가피가 하나 될 때 구원/깨달음은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51] 자와 타는 단순히 개체적 나와 너·공간적 안과 밖의 문제라기보다는, 능동과 수동·경험과 선험·시간과 영원과 같은 차원의 문제라고도 생각돼요. 아까 나온 얘기입니다만, 가령 연기는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 아닙니까. 연기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은 세상이 본래 연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논리가 이와 통하죠. 본래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죠. 본래 깨달아 있으니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거예요. 깨달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까 언젠가 깨닫게 되는 거죠. 깨달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측면을 ‘타력’이라 하고, 비로소 깨닫는 측면을 ‘자력’이라 그러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을 내가 자력으로 하는 것처럼 상상하지만, 믿어져야 믿는 거지,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믿나요? 어느 정도 수동적으로 믿어지는 측면을 중심으로 타력이라고 명명했을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조차 은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그렇게 믿어진 상태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내가 능동적으로 믿는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근원적으로 상상해 보면, 어느 시점에 믿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좀더 주체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신께서 나를 영원부터 구원으로 선택했다는 식의 말은 그런 의미라고 봅니다. 기독교가 타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세계관 때문입니다.
[164]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비교할까? 비교가 되는 관계이긴 할까? 아름다운 두 종류 꽃이 내 눈앞에 있다. 두 꽃의 차이를 알아내기 전에 두 꽃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고 싶다. 아름다운 불교 꽃과 아름다운 그리스도교 꽃이다. 시를 분석하기 전에 시를 실컷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는 진리 이전에 기쁨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학자들은 종교의 기쁨보다 진리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말하는 불교, 세상을 올바로 바꾸는 투쟁을 하는 그리스도교. 이렇게 외람되게 말을 만들어 보았다.
[175] 붓다가 현명하다는 것에 그의 가르침의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 자체의 역동성에 대한 깨달음이 붓다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한다. 다르마는 붓다에 앞서서 있는 역동적인 실재인 것이다.
[182]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보는 산이 같은 산인지 다른 산인지는 실증적으로 알 수도 규명할 수도 없는 문제다. 분명한 것은 같은 산이든 다른 산이든 그곳으로 가는 길이 다르고, 각각의 길이 구원을 향해 있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구원을 경험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구원의 경험들을 아우르는 공통의 궁극적 구원이 있는지는,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희망할 수는 있지만 입증할 수는 없다.
종교적 가르침과 삶의 방식에서도 붓다의 길과 예수의 길은 매우 다르다. 하지만 길이 다르다고 해서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서로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날 수 있고 만날 필요가 있고 배울 것도 더 많다. 본디 새로운 것은 남에게서 배우는 법이다.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서로 만나 대화하면 각자의 길과 그 길이 향하는 산에 대해 더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본문 213 : 그리스도교는 초월이 아닌 포월의 종교] 그리스도교를 나타내는 특징적인 표현으로 초월(超越)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스도교는 초월이 역사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자랑하고 특징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초월’이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고,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포월(包越)’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리스도교는 현실과 역사를 포함하면서도 그 너머를 전망한다는 것이죠. 이 세상과 관계없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초월은 그리스도교에서 아예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이 하느님에게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그리스도교가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초월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포월’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이렇게 봐요. 하느님이 역사 안에 들어왔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217] 저는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끝없이 역사가 진행해 가는 가운데, “과연 이것이 불교적인 것인가?”를 계속 물어 나가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불교적인 것’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 캔트웰 스미스의 얘기를 빌리자면, 다르마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불교적이지 않을까, 그런 불교 이해는 있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 제 질문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얘기해 왔던 초월적인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불교의 연기론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여 연기론적으로 신을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기독교적이라는 이해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평이라는 것이 불교적 지평이 따로 있고 기독교적·유교적 지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우리에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평은 이미 융합되어 있는 거예요. 그중에 어떤 역사적인 우연성을 통해서 좀 더 기독교적인 용어가 친숙한 사람이 있고, 불교적인 용어가 친숙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사실은 지평은 이미 혼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219-220] 사회적 맥락과 관련한 경전 해석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 경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도 현대와 다른 시대적 맥락에서 기록되었고, 그래서 윤리적 규범이 오늘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 한국 교회에서 큰 쟁점이 되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에서 성서 시대의 입장과 현 시대의 입장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 해석을 놓고 논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서의 근본 정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신에 비추어 성서를 해석하면 성서 안의 억압적·차별적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도흠 선생님의 정치적 실천과 분노에 대해, 지식인이요 시민으로서는 괜찮지만 불자로서는 문제가 있다고 한 분의 비판은 분노하지 말라는 불교 경전의 가르침 혹은 최소한 문자에 근거한 것이기에 가볍게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서에도 정치적 실천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언자적 실천을 강조하는 성서적 전거가 있기에, 시민으로서만이 아니라 신자로서도 선과 악·정의와 불의를 구분하고 악과 불의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정치적 실천을 위한 근거를 경전에서 직접적으로 찾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윤리적 삶과 불자로서의 삶을 분리하게 되는 것이겠죠. 이에 대해 이도흠 선생님께서 사회적 약자와의 정치적 연대와 실천을 ‘불설’이라고 주장하신 것이 무척 의미 있게 들립니다.
[221] 저는 불설/비불설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주변의 문제라고 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고(苦)’도 ‘사회적 고(苦)와’ ‘개인적 고(苦)’가 있는데, 후자만 다루면서 고를 없애는 것을 개인적 문제이자 개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만 한정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고를 중심으로 다루면, 이를 산출하는 권력·자본·소집단에 대해 국가·제도·시스템을 비판할 수 있고 이것을 없애는 것을 사회적 과제로 삼게 됩니다.
업(業)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을 업이나 숙명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은 주변화하여 이 용어조차 아는 불자가 별로 없습니다. 공업 개념을 끌어들이면, 개인의 업장이 소멸하더라도 열반이 불가능하니 그 집단에서 범한 공업을 소멸하기 위하여 집단에 소속된 사회적 약자들의 구제/구원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지요. 공업과 사회적 고(苦) 등을 결합하여 불교를 다시 체계화하면, 옛날의 민중불교론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 ‘보살불교론’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 봅니다.
[222-223] 연기론을 현대 사회의 맥락에 적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기의 그물망에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한 예로 군대에서 한 신병이 추운 겨울날에 찬물로 세수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래라.”고 했습니다.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고참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 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래서 가지고 와라.”라고 시켰습니다. 신병이 그리하자 인사계는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습니다.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대장은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습니다. 반면에 인사계는 고참과 신병·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 관계, 특히 거기에 스민 권력을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것입니다. 대립자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 거기에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29]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개념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는데, 속제와 진제의 관계에서 속제를 단순한 편의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현실의 원칙을 적용할 때 그런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맥락에서 속제가 의미 있는 것이지, 그냥 편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방편’이라는 말을 굉장히 편의적인 의미로 쓰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가장 현실에 적합한 방식을 취하겠다는 의미이지, 이 편의도 좋고 저 편의도 좋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232-233] 원래 이 불이(不二)라는 것은 사실 불일(不一)을 전제로 한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승 경전인 『유마경』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이 등장하는 것은, 예를 들면 이분법적인 유무(有無)·범성(凡聖)·생사(生死)·미추(美醜)·미오(迷悟) 등의 언어는 각각 상대적인 것이 전제된 개념들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이 상대성에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유는 무라는 것이 전제된 유이며, 무는 유라는 것이 전제된 무인 것이죠. 언어적인 메타포(은유)는 이미 무언가 상대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하나라고 하는 것도 양쪽이 합쳐진 상태의 하나라는 것을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일(一)이라고 하지 않고 불일이라고 한 것은, 그 전체라는 사고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234-235 : 초월적인 시각] 초월적인 시각이라는 건 문제를 인식하는 시각이라는 거죠. 현실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최순실도 그렇고 박근혜도 그렇고,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아무것도 문제가 없다, 그 태블릿 PC 내 거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인식을 하는 거잖아요. 정말 내면에서 그렇게 인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러한 인식, 이기적인 인식, 자기의 인식을 왜곡할 수도 있는 뻔뻔함, 그런 인식을 초월해서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지요. 좀 더 원시적인 인식이라는 건 이기적인 인식에서 못 벗어나고, 현실에 문제가 하나도 없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한테 다 물려주고, 편법 상속하고 이러는 게 문제가 없다고 당당하게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게 부끄러운 거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인식에 진화가 일어난다는 거죠.
[본문 239-240 : 이원론과 일원론] 인격적인 창조주 신앙과 과학이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면, 창조주 하느님이 만든 것이기 세계는 피조물이에요.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은 완전히 분리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엉터리로 마구잡이로 만든 게 아니라, 거기에 어떤 지적인 계획이 있다고 본단 말이죠. 동시에 이 피조물은 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얼마든지 분석하고 메스를 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학이 생겼다는 말이거든요. 그렇게 볼 때 창조주와 피조물을 가르는 이원론에서 자연과학이 나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문명의 혜택을 지금 우리가 입고 있고요. 지혜와 자비를 얘기할 때에도 사실은 자비를 배제한 지혜가 필요할 때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이원론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 저자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김승철 난잔대학 인문학부 교수
김용표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명예교수
류제동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초빙교수
명 법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손원영 서울기독교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해직교수
원영상 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이관표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이도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 레페스포럼
‘레페스포럼’은 종교가 폭력축소와 평화구축에 공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다양한 연구자들의 토론 모임이다. ‘레페스’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종교평화연구)의 약어이며, 2015년 창립 이래 종교-폭력-평화-국가의 관계에 대해 정기적으로 토론한 뒤, 그 결과를 각종 대중 매체와 SNS를 통해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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