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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왜 아픈가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3. 17:16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 이 책은…

인간 개인은 물론 사회가 평화보다는 폭력과 갈등, 안전보다는 위험과 위기에 더 자주, 더 오래 노출되는 현실의 원인을 짚어 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글들이 아니라, 저자가 직면하는 삶의 매순간, 구체적인 사회 현실(사건)을 통해서, 저자가 생애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행복한 삶, 평화로운 사회로의 전진을 모색하여, 나를 포함한 사회가 아픈 근원적인 원인을 성찰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한 대안들을, 40개의 다양한 사회의 제 부문과 요소, 인간관계 들을 통해서 제시한다. ‘사회의 아픔’의 원인과 대안에 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되, 저자의 종교적 감수성 덕분으로 그 근저에 ‘사회적 영성’의 심층 맥락을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 분야 : 인문, 사회과학
  • 저자 : 이찬수
  • 발행일 : 2020년 12월 10일
  • 가격 : 15,000원
  • 페이지 : 328쪽 (두께 16mm)
  • 제책 : 무선
  • 판형 : 140mm✕210mm
  • ISBN : 979-11-6629-008-4 (03300)

■ 출판사 서평

지금 우리는 아프다!

개인의 정서적(코로나 블루), 육체적(코로나19 팬데믹) 아픔은 물론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거리두기)인 차원에서도 아픔이 일상화, 보편화되었다. 사람과 사회뿐만 아니라, 동식물(ex. 조류독감, 생물대멸종)도 아프고, 나아가 지구 전체가 심각한 질병(ex. 기후위기, 지구온난화)에 빠져 있다. 이 아픔은 지금-여기에서 예외적이고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이기는 했다. 그러나 ‘늘 아프다’고 해서 아픔을 당연시하고, 묵묵히 견디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왜 아픈가?

아픔을 야기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폭력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데 비해, 평화는 간헐적이고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바다가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대체로 흐린, 그러나 가끔 맑은” 세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대체로 흐린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의 속살은 위험, 피로, 폭력, 혐오, 차별, 아동폭력, 성폭력, 방치와 방임, 난민, 세월호, 국가 폭력, 정치와 종교, 생매장, 살처분, 사형, 핵발전, 문명과 통제, 재난, 이자, 학교의 종말, 전쟁, 법과 상처, 금력, 권력, 숭배, 중독 같은 세포들로 점철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고, 이겨도 아프고 져도 아픈 가운데 살아간다.

사회는 왜 아픈가?

개인적 질병과 사고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대체로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 얼마간의 아픔은 (개개의) 타인으로부터 오거나,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오고, 대부분의 아픔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직접적/간접적) 주어진다. 개인(국민) 국가의 주인이면서 국가권력의 통제에 종속되듯이, 우리(개인)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에 종속된다. 사회로부터의 일탈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며, 사회에 순응하고 예속되는 것이 일상적이며,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아픔이 대체로 개개인의 생존 욕구,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이 그 개인들의 욕망 대 욕망의 부딪침으로 야기되는 것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욕망인 것 같지만, 특히 근대의 ‘성과(자본 확장) 중심주의 사회 및 경제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욕망조차도 사실은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개인의 일탈(갈등, 폭력, 살인-사형)조차도,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인의 모든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누가, 왜 아픈가?

오늘날 사회는 근대 시기의 정치사회로부터 경제사회로 전이되어 왔다. 사실상 사회는 경제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좌우하던 아주 짧은 시기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경제권력이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좌우하는―현 단계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체제가 현대 사회 근본 체제이다. 개인의 아픔이든, 사회의 아픔이든 자생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적 - 인간(을 비롯한 모든 ‘아픈 것들’) 외적”인 것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의 책임은 그 전제 위에서 아픔의 근본 원인에 무지한 채 종속되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 체제의 양지에 서는 쪽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생겨난다. 무지해서 수용하든 자발적 선택으로 수용하든 “자발적인 노예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매한가지다.

아픔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이 책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저자가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 구성원인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써 나간 사회비평 에세이이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차근차근 성찰하되, 스스로 그 일부로 자리매김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들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특히 기독교 목사이며, 평화학의 전공자이자 평화운동가로서, 그 자신이 겪은 해직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사회적 아픔들을 주관화하여 공감하면서, 평화의 폭넓은 의미 속에서 그 대안들을 찾아나간다.
결국 저자가 끝내 도달한 해결의 종점, 혹은 해결의 출발점은 인간의 정신성 – 사회적 영성의 차원이다. 국가나 사회 차원의 정책적 대안은 그다음의 문제이다. 인간(개인) 자신의 아픔도, 사회의 아픔도(사회의 주체로서 개인), 그리고 이 지구상의 아픔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인간 ‘외적 존재’로부터의 해결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의 괴담’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자기중심적인 평화 대신에 타자를 포함하고 긍정하는 평화를 추구할 때, 성과 중심 사회 체제에 내몰리다가, 스스로 내달리는 자발적 노예 상태를 거부할 때, 타자와 협의하고 타자의 동의를 수용할 때, 타의 권리보다 타자의 권리 – 우리의 권리를 앞세울 때, 국가권력에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존엄과 천부의 권리를 위임해 버리고 스스로 종속되기를 거부할 때, 국민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꿰뚫을 때, 소유의 충동과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내려놓고 비워줄 때, 자유라는 이름의 자본이 던진 미끼를 좇아 돌진하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설 때,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아픔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의 매 순간에 저질러지는 실수와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게 될 때, 정죄하는 자로부터 정죄 받을 줄로 알고 조신하며 조심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때, 끊임없이 ‘큰 것’을 좇아 밖으로 나도는 마음과 몸을 우리-나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심층적인 공부를 계속해 나갈 때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

■ 차례

책을 내며
제1부 사회는 왜 아픈가

1. 공감이 신앙이고 공생이 구원이다: 평화학이 던지는 질문
2.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3.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4. 예수도 폭력을 썼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
5.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6. 우리도 난민이었다: ‘내로남불’의 난민론
7.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8. 더 큰 폭력이 더 큰 원인이다: 이스라엘-IS-미국

제2부 세상[世]을 어떻게 넘을까[越]

9. 평범함이 모이면 무력해지는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10. 예외가 일상이 되다: 일상의 속살
11.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12. 왜 배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는가: 그들이 세상[世]을 넘는[越] 방식
13. 폭력이 왜 권력이 되는가: 국가와 주권
14. 왜 정치인은 국민을 파는가: 정치와 종교의 모순들
15. 권위는 누가 주는가: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호칭
16. 서로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증여론
17. 나도 때론 정치하고 싶다: 함께 느리게

제3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18.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무역협정
19. 자유도 돈으로 사는가: 우리 시대의 장발장
20. 나는 두통을 소유한다: 소유와 존재
21. 오리는 아플 권리도 없는가: 생매장과 살처분
22.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사형제도
23. 핵발전은 필연인가: 통제 불능의 문명
24. 자연이 공격해온다: 재난과 인공지진
25. 이자를 금하라: 금융경제와 이자놀이
26. 아이도 국가를 위해 낳는가: 저출산 혹은 저출생
27. 학교는 왜 아픈가: 대학의 종말

제4부 한국과 일본은 왜 꼬였나

28. 한국의 시간을 복원하라: 한국 속의 일본
29. 동해는 동쪽인가: 푸른 바다 또는 평화의 바다
30. 일본은 왜 우경화할까: 영혼의 정치학
31. 평화를 내세워 전쟁할 것인가: 책임없는 평화주의
32. 왜 다케시마를 고집할까: 평화헌법 9조에 노벨 평화상을
33. 호국영령도 여러 가지다: 일본 군국주의의 기초

제5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34. 왜 사람을 쫓아낼까: 아프지만 이긴 사람들
35. 법은 왜 상처를 줄까: 법력, 금력, 권력
36. 왜 자기도 모르는 짓을 할까: 종교의 앵똘레랑스
37. 김 교수는 왜 아팠을까: 악의 발생에 대한 상상
38. 왜 큰 것을 숭배할까: 박사학위에 대한 나의 고백
39. 깨어 있어야 하는가: 중취독성(衆醉獨醒)
40. 나는 무슨 공부를 해 왔나: 심층학의 가능성

 

■ 책 속으로

평화조차 의도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평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들이 도리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중략) 한마디로 ‘자기중심적인 평화(ego-centric peace)’를 내세운다. 이것이 현실이다. (중략) 평화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그 자율은 타자를 포함하는 자율이어야 한다. (중략) 성경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갈라디아서 3,28)는 선언이 나온다. 타자를 긍정하면서 타자를 살리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됨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25~27쪽,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체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더 많은 성과를 닦달하듯 요청한다. (중략) 사람들은 자신을 착취해 성과를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성과 사회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를 능가해 온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해 더 많은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이다. 자발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박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31쪽,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으려면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자가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개방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 폭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인정하면, 폭력성을 혐오하기보다는 폭력에 분노하며 폭력을 줄이는 길에 나서게 된다. 혐오와 폭력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56쪽,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인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남[他]’의 권리이다.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다가, 결국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적 성과사회라는 구조적 갈등을 그대로 전제하기에 제기되는 것이다. 나만 내세워서 인간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남의 권리[他權]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64쪽,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권력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권력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기 힘들도록 되어 있다. 국가는 거대한 틈, ‘공(空)-간(間)’이다. <97~98쪽,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국민의 이름을 내세우고 하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설령 의도적으로 파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결과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국민을 세우는 행위가 거짓이라는 증거이다. (중략) 기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애쓰는 그런 정치와 종교는 언제쯤 우리 삶의 무대에서 퇴장할 수 있을까?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소외시키고, 하늘의 이름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순이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120~121쪽, 왜 정치인은 국민을 파는가: 정치와 종교의 모순들>

인류의 문제는 주어져 있는 것을 저마다 소유하려고만 하는 데서 발생한다. 사용가치를 높이기 위한 부의 축적 경쟁에서 승패가 나뉘고 차별과 아픔으로 이어진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먼저 ‘주기’이다. 그리고 그만큼, 아니 그 이상 ‘갚기’이다. 주기와 그 이상의 갚기가 순환하는 곳에서는 재물이 특정인이나 세력에 쏠리지 않는다. 모스의 ‘증여론’이 이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북한에게 먼저 주면 안 될까? 난민을 더 수용하면 안 될까? 검찰은 수사권을 내려놓으면 안 될까? 서울‘광역시’ 정도로 바꾸면 안 될까? <132쪽, 서로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증여론>

그동안 공부해 온 종교학·신학·철학·평화학의 요지에 따르건대, 나는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정치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인류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진짜 종교의 길이라고도 생각한다. 순진한 헛된 공상이겠지만, 인류의 종교적 천재들은 한결같이 그 헛된 공상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인 것도 분명하다. 한때 품었던 그런 마음의 기운을 느끼며, 실제로는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나는 마치 습관처럼 여전히 그런 꿈을 꾼다. 한낱 꿈으로 끝날 공산이 확실할 터인데도…. <138~139쪽, 나도 때론 정치하고 싶다: 함께 느리게>

중세 계급사회가 타파되고 근대 시민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은 시민계급(부르주아)이 탄생하고, 그 자유가 확대되어 간 과정이자 결과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추동하는 힘이 대량생산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결과였다는 점에서, 그런 자유의 확대가 그저 환영해야만 할 일은 아니다. 근대 문명의 기초는 자본의 확대가 다지고 만들어 놓았다. 이런 기초 위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추동하는 그 엄청난 힘은 자본이다. 그리고 자본을 소비하려는 욕망이다. <146~147쪽,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무역협정>

문명이 시작되면서 자연의 힘이 재난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연이 인간적 성취의 과정이자 산물인 문명을 파괴하자, 인간은 그것을 재난으로 명명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문명이 자연의 흐름에 비해 대단히 나약하다는 뜻이다. 애당초 자연의 힘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문명을 인간의 대단한 성취인 양 여기는 태도에 이미 인간의 오만함이 들어 있다. 자연에 의한 문명의 파괴는 천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인명이 살상되고 온갖 성취가 인간을 덮치기 때문이다. <187쪽, 자연이 공격해온다: 재난과 인공지진>

인구가 줄어들고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 괜한 오해에서 오는 갈등과 분쟁도 줄어들 것이고, 인간 평등, 지역 평등에도 기여할 것이다. 자민족중심주의에 기인한 민족이나 지역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적극적인 다문화정책을 펼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지구가 가난해진다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화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추구해야 할 일이자 자세이기도 하다. 다 같이 좀 못살 필요가 있다. <203쪽, 아이도 국가를 위해 낳는가: 저출산 혹은 저출생>

철학 하면 으레 서양철학이고 우리 것은 ‘한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성립되는, 종속적인 것 아니던가. 그나마 한국 철학의 기원은 대부분 중국에서 찾아지지 않던가. 비행기 타고 ‘서쪽으로’ 10시간은 더 걸려 가는 나라를 ‘가운데 동쪽(중동)’이니 ‘가까운 동쪽(근동)’이니 하며, 마치 유럽인처럼 말하지 않던가. 6.25의 비극을 ‘한국전쟁’이라며 남의 나라 얘기하듯 타자화하지 않던가. <223쪽, 한국의 시간을 복원하라: 한국 속의 일본>

십 수 년 전부터 제기되어 온, 동해·일본해라는 말 대신에 ‘푸른 바다’, 즉 ‘청해(靑海, Blue Sea)’라는 제삼의 언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적절한 대안이다. 우리에게는 ‘서해’이지만, 국제적으로 공식화된 호칭은 ‘황해(黃海, Yellow Sea)’이듯이, 동해를 ‘청해’라 부르는 것은 유효한 대안 중 하나이다. 그도 아니라면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했던 ‘평화의 바다(Sea of Peace)’라는 말을 되살리는 일도 생각해 봄직하다. <229쪽, 동해는 동쪽인가: 푸른 바다 또는 평화의 바다>

독도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지속적인 쟁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일본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끝없이 다케시마를 이용할 것이며,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늘 그래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자극해 정치권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다케시마 문제는 국내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 없이 정권을 강화해 나가는 데 적절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254쪽, 왜 다케시마를 고집할까: 평화헌법 9조에 노벨 평화상을>

강의 중 교수의 신앙적·학문적 양심에 따라, 교육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행한 강의 내용을 학교 밖 대중적 종교 교리를 기준으로 그에 영합하면서 불이익을 주는, 사실상 강제적이고 타율적인 행위가 21세기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중략) 21세기의 한국, 그것도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그런 일이 여전히 벌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 특정 개인의 문제를 떠나 한국사회(여기서는 주로 종교계지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은 결코 즐거운 경험일 수 없었다. <272~273쪽, 왜 사람을 쫓아낼까: 아프지만 이긴 사람들>

하늘의 뜻을 실천하겠다며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들도 어느 순간 직업형·사업형 목사로 전락해, 결국은 숨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거룩한 하늘의 이름을 팔아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이니, 법률의 세계에선들 무엇이 다르겠으며 무엇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종된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기는커녕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정의와 인권의 본질을 전도시키는 일도 다반사니 말이다. <282쪽, 법은 왜 상처를 줄까: 법력, 금력, 권력>

사랑과 자비의 예수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의 행동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다가 죽어 갔다. 당시 종교적 기준으로 보면, 상종해서는 안 될 죄인들과의 ‘거리’를 스스로 없애는 삶을 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에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는커녕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정죄부터 한다. <286쪽, 왜 자기도 모르는 짓을 할까: 종교의 앵똘레랑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불행하게도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두어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을 베껴 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 오늘날 그 무게중심은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세계로 옮겨갔다. 미국의 삼류급 선교사들이 전해 준 삼류 기독교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중략) 미국 혹은 유럽을 ‘글로벌 스탠다드’로 여기고 사회 주류가 학벌의 상징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얼마나 과도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 새삼 더 비판해 보아야 무엇하겠는가. <301~302쪽, 왜 큰 것을 숭배할까: 박사학위에 대한 나의 고백>

돌아보면 내 전공 분야는 다양하게 확장되어 왔다. (중략) 내심으로는 일종의 ‘심층학’을 한다 생각했고, 그 심층을 잘 알려준 종교의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마음으로 ‘내 전공은 종교학’이라는 말을 가장 오래 해왔다. 불교와 기독교의 세계에서 상통성을 확인한 이래, 불교학, 신학을 포함한 종교학은 물론 죽음학, 평화학 등의 분야도 그 심층에서 보이는 세계는 비슷하다는 생각은 거의 습관처럼 굳어졌다. 어느 분야든 인간의 내면, 즉 욕망, 열망과 같은 정신세계가 근저에 작동하고 있으며, 어느 영역이든 인간의 원천적 열망과 기대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325쪽, 나는 무슨 공부를 해왔나: 심층학의 가능성>

■ 저자

이찬수 _ 보훈교육연구원 원장.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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