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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비추는 운명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10. 14. 12:28

눈물이 비추는 운명

해방 전 임화 시의 문명 비평적 애도

■ 이 책은…

이 책은 슬픔을 수동적 감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 변화의 가능성으로 표현하는 한국시 특유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중세와 근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의 사유를 제시하며, 한국 근대문학이 서구 근대의 모방이자 미달이라는 통념을 극복한다. 이처럼 다각적이면서도 문제적인 작업은 임화의 일제 강점기 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해방 이전의 시인 임화에 관한 단순한 연구서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한다. 한국문학 연구가 학문적으로 얼마만큼 보편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한국시에 담긴 독창적 성취의 재조명, 기존 문명에의 비판과 새로운 문명에의 모색, 서구 중심적 사유의 극복에 관심 있는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유의미한 통찰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분야 : 학술/문학
  • 저자 : 홍승진
  • 발행일 : 2021년 9월 23일
  • 가격 : 15,000원
  • 페이지 : 288쪽 (두께 14mm)
  • 제책 : 무선
  • 판형 : 152×225mm(신국판)
  • ISBN : 979-11-6629-064-0 (93810)

상실된 너를 내 안에 살리는 슬픔의 시,
집단도 개인도 아닌 새 문명의 형상화

■ 출판사 서평

수동적 한(恨)의 정서가 아닌 역동적 애도의 태도

이 책은 ‘어째서 임화의 해방 이전 작품 대부분은 상실된 무언가를 슬퍼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맡으며 사회주의 문학을 적극 옹호하였던 임화의 이력과 상반되게도, 그의 시만큼은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 문학처럼 진취적인 전망과 선명한 이데올로기를 선전·선동하는 측면보다도 죽거나 떠나간 사람을 슬퍼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우리의 통념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때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전유한 자크 데리다와 주디스 버틀러의 애도 개념은 그 물음을 풀 수 있는 유효한 시각이 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공적인 애도는 상실된 대상에게 향하는 사랑을 회수하여 다른 대상에게로 돌리는 작업이지만, 데리다와 버틀러가 말하는 진정한 애도는 상실된 타자의 대체 불가능한 타자성, 즉 단독성(singularity)을 자아 안에 보존함으로써 자아를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카프 시인들의 많은 작품은 희생된 동지나 가족이나 연인 등을 시적 화자의 사회주의적 이념과 동일시하고 그 이념의 고취를 위한 소재로 환원시킨 반면에, 임화의 시는 상실된 인간들이 특정한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을 표현한다.
이처럼 이 책은 마르크시즘이라는 단일한 기준을 중심으로 임화의 문학 전반을 파악하던 기존 연구 관점과 달리, 임화의 시 세계가 그 출발 지점부터 해방 직전까지 일관되게 도식적ㆍ교조적 마르크시즘을 벗어나 있다고 해석한다.
카프 시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손꼽히는 1920년대 후반 임화의 ‘서간체 시’는 상실된 타자를 고정적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수 없는 단독적 타자로서 시적 자아 안에 보존하고 기억한다. 서간체 시는 지금까지 보통 ‘단편서사시’로 규정되던 작품들을 새롭게 개념화한 용어라 할 수 있다. 단편서사시라는 용어는 사회주의 이념의 대중화 수단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딱딱한 이념을 짧은 이야기(서사)로 쉽게 전달하여 대중에게 공감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서간체 시라는 용어는 편지(서간)의 발신자만도 아니고 수신자만도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가 함께 들어 있는 유일무이한 기억을 강조한다. 이는 상실된 타자를 주체와 동일시하지 않지 않으며 주체성 안에 타자성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애도와 상통한다.
이 책은 임화의 시 세계가 민요시 창작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 주목하며, 임화의 시에 나타나는 애도의 특성이 김소월 등의 한국 민요시와 거기에 나타나는 애도의 미학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국문화의 고유한 특징은 ‘한(恨)’의 정서이며 그것이 민요시에서 잘 나타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통념이다. 그러나 ‘한’의 정서는 한국 민족문화의 본질을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일본 학자들이 고안해내었다는 식민주의적 함의를 띤다. 그러나 김소월의 민요시부터 임화의 서간체 시에 이르는 한국시의 미학은 수동적 ‘한’의 정서가 아니라 주체성 안에 타자성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역동적 애도의 태도임을 이 책은 밝힌 것이다.

집단 중심도 개인 중심도 아닌 제3 문명의 형상화

더욱 놀라운 점은 임화의 시에 나타나는 애도가 한국시의 독특한 미학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문명론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다. 사적인 감정이나 행위쯤으로 간주되기 쉬운 애도의 시적 표현이 기존 문명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 비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애도가 문명 비평과 연관되는 까닭은 세계문학사에 관한 임화의 독특한 시각에서 비롯한다.
임화는 문학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문명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중세는 집단 중심의 문명이었으므로, 중세 문학은 개성이 희박하며 집단으로 환원되는 인간을 형상화한다.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 문학이나 서구 중세의 기사도 문학 등에서 인간이 개성적이지 않고 계급이나 계층 등의 집단적 성격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반면 개인 중심의 문명인 근대 아래서, 문학은 집단성을 상실한 파편적 개인으로 인간을 형상화한다. 이는 근대 문학에서 인간의 개성이 두드러지지만 그 개성이 사회와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시대현실에 무력하게 압도되는 것과 통한다. 그러나 임화가 생각하기에 중세는 개성 없는 집단성만이 있고 근대는 집단성 없는 개성만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근대의 개인 중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집단성 중심의 문명으로 회귀하려는 흐름은 제국주의 파시즘의 파국을 낳았다. 임화는 자신이 목격한 일제 강점과 1·2차 세계대전을 중세-근대-파시즘으로 이어진 서구 문명사 전체의 파산으로 진단하며, 집단 중심(중세와 파시즘)으로도 개인 중심(근대)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제3의 문명을 모색하였다.
집단적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중세 문명 아래의 문학이고 개인적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근대 문명을 압축하는 문학이라면, 임화의 시에서 애도하는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은 제3의 새 문명을 드러내는 문학이 된다. 애도하는 인간은 너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되 나의 나다움 안에 너의 너다움을 살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임화의 시를 연구한 뒤로 그의 독특한 사유 덕분에 동학(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더 특별히 주목할 수 있었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임화가 천도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은 없지만, 개체[人]와 전체[天]를 대등 관계로 바라보는 동학 사상은 곧 임화 문학에 나타난 한국적(주체적) 문명론과 통하기 때문이다.

‘서구 콤플렉스’를 넘는 한국 현대시

임화의 시에서 애도하는 인간을 새 문명의 형상으로 제시하였다는 해석은 지금까지 그의 문학과 한국 ‘근대’문학에 덧씌워진 통념을 탈피한다. 국문학자 고(故) 김윤식 교수는 한국 근대의 시인과 작가들이 현해탄 건너의 일본에 들어온 서구 근대를 무비판적으로 동경하고 추종하였다고 전제하였으며, 이를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통칭하였다. 한국 ‘근대’문학은 서구-일본의 근대성에 도달하고 싶어 한 ‘미달태’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임화의 문학이 지목된다.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말 자체가 임화의 첫 시집 제목인 『현해탄』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임화가 당시 아나키즘 문인에게 유행한 다다이즘 스타일의 시를 남긴 것, 그 뒤로 곧장 마르크시즘에 뛰어든 것, 한국 근대문학사의 시작을 서구 근대문학의 ‘이식’으로 서술한 것 등은 현해탄 콤플렉스의 증거로 여겨졌다. 김윤식의 시각은 이후로도 지금까지 영향을 미쳐, 한국 ‘근대’문학이 형성되어온 과정이나 지향해야 할 바의 모델을 서구적 근대성에 두는 관습이 굳어져왔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등의 역사를 서구 문명 전체의 파산으로 진단하며 중세도 근대도 아닌 제3의 문명을 모색한 임화의 시각은 현해탄 콤플렉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해탄 콤플렉스의 틀 자체에 대항한다. 이처럼 현해탄 콤플렉스의 대표 사례로 간주되던 임화의 문학을 오히려 현해탄 콤플렉스의 가장 극명한 반대사례로 재해석한 지점은 이 책의 독창성을 드러낸다. 이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던 임화의 시집 『현해탄』을 새롭게 해석한 대목이다. 이 시집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처서구-일본의 근대문명을 동경하여 현해탄을 건넜던 조선 민족은 그 근대문명이 한낱 허영일 뿐이었다는 환멸을 느낀다고 형상화된다. 조선 민족은 그 과정에서 상실된 조선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애도함으로써, 역사를 주체적으로 창조해나갔던 힘을 기억하고 보존한다. 애도를 통해 기억되고 보존되는 민족적 잠재력은 서구 근대문명의 허영을 변화시켜 새로운 문명을 생성할 가능성으로 제시되는 것이 『현해탄』 시편의 본모습이다.
조선 민족의 기억 속에 잠재해 있는 문명 창조의 가능성을 임화의 시는 ‘운명’으로 사유한다. 운명을 긍정하는 임화의 사유는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 자체를 긍정하는 사유로서, 그가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몽테뉴와 파스칼과 괴테를 거쳐 니체로 이어지는 독특한 변증론의 흐름을 재구성한 것이기도 하다. 임화가 그들의 사유를 치열하게 재해석하여 새로운 변증론을 이끌어낸 까닭은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목적론적 변증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임화가 현해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서 마르크시즘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는 기존 논의에 정면으로 맞선다. 임화의 시는 모든 변화를 단 하나의 목적에 귀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 없이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삶 그 자체를 긍정한다. 일제 말기로 접어들수록 모든 희망과 가치가 점차 사라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가치를 생성하고자 애쓰다가 좌절한 사람들을 애도함으로써, 임화의 시는 특정한 목적 없이도 끊임없이 역동하는 삶의 힘 자체를 아름다운 운명으로서 찬미한다. 생명력이 상실되고 훼손된 인간들을 애도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은 새로운 문명 창조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눈물이 비추는 운명』이라는 책 제목에 담긴 뜻이다.

■ 차례

제1장 서론

제1절 임화 시의 일곱 빛깔
제2절 새로운 문명을 품은 애도의 형상

제2장 민족과 세계 사이의 그치지 않는 애도

제1절 민요시: 감정에서 인간으로, 민족에서 문명 비평으로
제2절 다다이즘과 서간체 시: 공권력을 넘는 인간성의 애도

제3장 운명체의 바다 위에 눈물로 맞닿는 애도

제1절 수필론과 변증론: 사상의 주체화와 다양성의 형상화
제2절 계절 시와 메타시: 획일성을 벗어난 생성 긍정의 운명애
제3절 현해탄 연작: 운명 공동체의 애도를 통한 주체적 문명의 모색
보론 / 시집 『현해탄』 구성 방식의 남은 문제들
제4장 페시미즘 아래서 삶을 긍정하는 애도 제2절 찬가 연작: 찬미할 것을 잃은 삶마저 찬미하기

제5장 결론

참고문헌
찾아보기

 

■ 책 속으로

○ 중세문명은 집단 중심의 문명이므로, 그 시대의 문학은 개성이 희박하며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표현한다. 그와 반대로 (서구) 근대문명은 개인 중심의 문명이므로, 그 시대의 문학은 사회와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사회의 위력 앞에서 좌절하는 파편적 인간을 형상화한다. 일제 강점과 양차 세계대전을 근대문명의 파국으로 진단한 임화는 중세문명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근대문명을 유지하는 것도 아닌 제3의 문명을 모색한다. 더 개성적인 인간일수록 더 사회적인 인간이 되고 공동체와 더 밀접하게 호흡할수록 자신의 개성을 더 뚜렷하게 마련하는 문명, 그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기 위하여 문학은 새로운 인간의 형상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임화의 시는 그것을 애도하는 인간으로 형상화한다. 애도하는 인간의 마음속에선 나와 네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면서도 너와 나의 개체성이 생생히 숨을 쉰다. 애도는 나로 환원할 수 없는 너의 너다움을 내 마음속에 끝없이 보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문 5쪽 중에서>

○ 시의 정치적 이념성을 강조하였던 이정구의 관점으로 보면, 오빠를 상실한 ‘나’와 남동생이 부젓가락에 비유되거나 연인과의 이별이 ‘비’와 ‘우산’ 등의 이미지와 결합하는 것은 아무런 이념도 상징하지 않는 무의미와 우연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화의 서간체 시에 나타난 감각들이 일견 우연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애도되는 타자를 어떠한 관념과도 동일시하지 않고 타자로서 보존하는 기억에서 그 감각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정구가 지적한 우연성이란 단독적 감각을 보존하는 상기이자 그것의 알레고리적 표현에 가깝다. 임화의 서간체 시에 나타나는 애도는 타자를 타자로서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억 속의 단독적 감각을 더불어 보존하는 것이다. <본문 68쪽 중에서>

○ 임화는 공식적 교리에 따른 마르크스주의란 “관념적 일탈─객관적 정세에 대한 추상적 유추”일 뿐이라고 비판하며, 이에 맞서서 변증법은 변전하는 현실을 “다면적인 관계에서 구체적인 다양성의 속에서” 진단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이처럼 임화에게 “진정한 변증법의 방법”이란 “추상적 분류학을 가지고 이것과 저것으로 구별”하지 않는 것이며, “서로 교착하는 복잡성과 다양성 속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임화가 이러한 변증법 개념을 문학에 적용한 것은 ‘기록’과 ‘형상’의 개념적 구분이다. 기록은 삶의 구체성을 추상적 개인으로 단일화하는 형이상학에 해당하며, 형상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다양성 및 복잡성을 드러내는 변증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본문 132쪽 중에서>

○ 「해협의 로맨티시즘」 전반부에서 보듯이, 현해탄 시편의 ‘청년’이라는 시적 화자는 최초에 서구=일본=근대문명을 동경함으로써 식민지 근대문명과 동화하려는 주체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자신을 식민지 근대문명과 동일시하는 순간, 원래 자신의 아이덴티티였던 조선 민족의 역사ㆍ문화 및 그것들을 체현한 타자들을 상실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동일시가 식민지 근대문명의 허울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조선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소외시켰다는 반성이 현해탄 연작에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현해탄 연작은 그 반성의 계기를 애도의 방식으로 포착한다. 「어린 태양이 말하되」에서 시적 화자는 “이제는 먼 고향이여! /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 나를 내치고, / 이내 아픈 신음 소리로 / 나를 부르는 / 그대의 마음은 / 너무나 잔망궂은 / 청년들의 운명이구나!”라고 노래한다. 고향이 자신을 멀리 밀어냈다는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을 견디기 어려워 일본으로 향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반면 고향이 아픈 신음으로 자신을 부른다는 표현은 상실된 타자에의 애도를 드러내며, 자신도 그 상실된 타자의 일부분임을 뜻하는 대목이다. 이는 ‘고향의 아픈 신음소리’를 듣는 애도의 방식을 통하여 자기 안에 조선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보존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서간체 시에서 애도가 타자를 시적 주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이었다면, 현해탄 연작에서의 애도는 ‘조선적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타자성을 주체의 식민지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본문 177쪽 중에서>

○ 임화는 자기 동지 이상춘의 죽음이 일제 말기의 페시미즘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 화자의 ‘동무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당대의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붙들지 못하고 삶을 부정하게 된 상황, 즉 ‘약자의 페시미즘’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위 시에서 ‘아직도 기억이 쓰라린 동무들의 무덤 앞을 묵묵히 지나는 나의 발길’은 페시미즘의 문명 속에서 삶을 부정한 타자에 대하여 시적 화자가 표하는 애도를 나타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화는 삶의 희망을 모색하는 인간들이 더 이상 스스로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법, ‘약자의 페시미즘’을 극복하는 방법을 시로 고민하였다. 이는 다름 아니라 희망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어버린 타자를 애도하는 것이며, 그러한 애도를 통하여 그 타자를 자신의 내부에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의 말미에 가서 화자는 자신도 상실된 타자처럼 ‘아직도’ 별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이 작품은 페시미즘의 문명 속에서도 희망을 추구하다가 죽어간 타자를 애도의 방식으로 주체의 내부에 보존함으로써, 희망의 추구와 그것의 상실로 인한 죽음마저도 긍정하는 ‘강자의 페시미즘’을 형상화한다. <본문 241쪽 중에서>

■ 저자

홍승진 _ 시는 사유를 개념화하는 언어와 개념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예술 사이의 길항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언어예술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간『다시개벽』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등으로 일하고 있으며 임화연구회 연구기획위원, 사단법인 방정환연구소 학술이사, 신동엽학회 연구이사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천상과 지상 사이의 형상─김종삼 시의 내재적 신성』,『가장자리에서 지금을─하종오 리얼리즘의 서정과 서사』,『김종삼 정집』(공편),『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공저),『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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