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세기에 원나라 대도에서 생활하기 위해 한어를 배우려 했던 고려인들을 위한 회화서 『박통사(朴通事)』 속에 실린 원-고려 시기 출산 문화와 육아 문화를 생생한 대화의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 이야기 속의 대화가 원-고려 시기 출산 문화와 육아 문화의 전반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유물도 말해 줄 수 없는 언어적 용도로서의 출산 문화와 육아 문화의 유형적, 무형적 문화소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박통사(朴通事)』의 이 두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특히 출산 문화에서 보여주는 요람의 구성이나 한 달 잔치, 백일잔치, 돌잔치 등의 동질성이라든지, 육아 문화에서 보여 주는 ‘완낙질-죔죔/죄암죄암’, ‘‘정정이질-곤두곤두’ 등의 연결은 언어와 문화 면에서 동북아시아적 전통이 생각보다 훨씬 멀리서부터 그 끈이 이어져 있음을 말해 주는 중요한 간접 증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출산 및 육아 문화를 말해주는 각종 유물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간접적 사례들이 모일 때 좀 더 분명하고 폭넓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 본문 37쪽
● 여성의 기본 인권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임신·출산권은 피임, 임신, 임신중단, 출산과 관련된 소극적·적극적 권리가 모두 포함되는 자기결정권이다. 여기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회피할 수 있는 권리’인 피임권, ‘건강하게 임신하거나 임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임신권, ‘건강하게 출산할 권리’인 출산권과 ‘출산하지 않을 권리’로서 임신중단권이 포함되며, 이 모든 권리가 보장될 때 비로소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서의 임신·출산권이 보장된다.(김채윤·김용화 2017: 110) 또한 출산권이란 여성 건강의 변화 및 위험성에 대한 각별한 주의 및 충분하고 안전한 의료서비스 하에 출산할 권리와 출산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한다.(김채윤·김용화 2017: 118) 후자의 기술은 출산권에 대한 정의는 아니며, 출산권이 출산할 권리와 더불어 출산하지 않을 권리, 즉 임신중단권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같은 단락의 언급을 고려하면, 논문의 저자들은 출산권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출산을 선택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 본문 58쪽
● 조산사란 전통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이다.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면서 산파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았고, 해방 후 조산원을 거쳐 현재 조산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산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조산사란 출산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출산에 인공적으로 개입하기보다 자연적인 출산을 도와주는 의료인이다. 이상분만을 산부인과 의사가 맡는다면, 정상분만은 조산사가 맡는다는 역할 분담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현재 한국에서 조산사는 소멸하는, 아니, 이미 소멸한 직업이다. 조산사의 소멸과 관련하여 이 글은 조산사가 사용한 의료기구와 약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산사의 위상이 약화된 원인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새롭게 개발된 의료기구와 약제를 사용하며 출산에서 관할 범위를 넓혀나갔다면, 조산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태아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초음파 기기가 대표적이다. 조산사의 초음파 기기 사용이 금지되면서 조산사들은 산전 진단에서 산부인과 의사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 본문 66쪽
●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출산은 여성과 가정, 산파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경부터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산부인과 의사와 남성 산파 같은 전문직 남성이 출산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여성 산파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여 비위생적이며 출산에 수반될 수 있는 질병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산과겸자(産科鉗子, 분만겸자)가 등장하면서 전문직 남성의 개입은 더욱 용이해졌다. 산과겸자의 사용과 관련해서는 17세기 영국 체임벌린 가문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커다란 집게처럼 보이는 산과용 겸자를 이용했다. 이 도구는 태아의 위치가 출산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에서 태아의 머리를 잡아끌어 산도(産道)로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피터 체임벌린은 1645년경 산과용 겸자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이 도구의 사용법을 100여년 간 가족 내의 비밀로 숨겼다. 겸자는 좀 더 안전한 출산을 바라는 여성의 희망이 담긴 것이었으며, 동시에 남성의 출산 개입의 상징이 되었다. 19세기 들어 중산층 여성은 남성 산부인과 의사를 찾고 가난한 여성들은 산파를 찾는 계층 분화가 정착되었다. - 본문 99쪽
● 청말-민국 시대 이후 서양의학과 의약이 사회에 영향력이 커지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성의 임신, 출산과 관련된 ‘보혈’의 개념과 ‘보혈약’은 여전히 중국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문의 의약 광고에서는 이러한 보혈약에 여전히 전종접대의 가치가 반영되면서도 ‘강종(强種)’, ‘종족 개량’과 같은 새로운 가치 및 서양의학, 화학, 과학 등이 차지하는 영향이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광고의 대상이 남성에서 여성 일반으로 확대되면서 보혈약 광고에 신여성의 모습이 등장하고, 여성의 자유가 언급되거나 여성 자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이 반영되는 변화도 나타났다. 즉 여성의 임신, 출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물질문화인 의약품에는 당시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가치관이 투영되었고,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는 욕망, 동시에 여성 자신이 사회에게 바라는 욕망이 동시에 개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본문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