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순은 이러한 지금 여기에 ‘죽음’을 엄숙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죽음은 우리가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은 우리가 함부로 대해 온 이 세계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공감이며 포용이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지점들을 어둠 속에서 포옹하게 한다. 그것이 김혜순의 시인 것이다. 김혜순은 이러한 ‘죽음’을 통해서 다시 인간을 발견한다. 이제 인간은 모두 짐승이며, 아시안이고, 무엇보다 여자이다. 이것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김혜순은 ‘여자짐승아시아’를 ‘하기’로 만든다. 김혜순에게서 ‘죽음’은 그렇게 하여 남자 아버지도 여자로, 진정한 ‘죽음’의 품으로 애도하면서 마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공동체가 되어서 ‘죽음’을 넓히고 공유하고 우리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모든 벽들을 허물고 대지적인 차원으로 돌아간다. ‘죽음’은 우리를 진정한 대지로 인도하는 애도의 길이다. - 본문 48쪽
● 허수경은 시에서 ‘죽음’의 공간을 가시화하면서 그 공간에서 단 한번도 서로 동일한 시간을 살지 못한 여러 다른 나-자신의 해후와 대화를 표현하고 그 모든 것들을 긍정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기 애도의 행위를 수행한다. 이렇게 하여 ‘죽음’은 삶을 마지막에 이르러 긍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으로 손을 흔들어주는 작별인사임이 드러난다. 허수경이 노래한 ‘죽음’은 그런 점에서 단순한 생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에 올 새로운 존재들이 삶을 환대하도록 이끄는 거대한 제의이다. - 본문 70쪽
●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양에 불과하다. 돈을 벌 수 있을 때 그는 가게에서는 믿음직한 세일즈맨이었고, 가정에서는 사랑받는 아들이요 오빠였다. 하지만 돈을 벌지 못하고 벌레가 된 그는 철저한 소외자이며, 해충에 불과할 따름이다. 더 이상 가족의 일원일 수도 없었으며, 특히 아버지의 가학적 공격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변신 전후에 보이는 이 같은 가족 구성원 간의 부조리한 행위,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횡포, 소외 등의 밑바탕에 돈의 문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아들과 오빠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실존적 상황,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서만 세일즈맨을 치부한 비인간적인 고용주의 태도, 욕망하는 기계인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톱니바퀴……. 이 정도라면 사람의 상황이라기보다는 벌레의 상황이라고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 본문 118쪽
● 끔찍할 정도로 아픈 슬픔의 마음을 우리는 종종 ‘단장(斷腸)’의 슬픔이라 표현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슬픔이라는 의미이다. 슬픔 중에 가장 고통스럽게 아픈 것이라는, 가족의 죽음, 그중에서도 자식의 이른 죽음이 안겨주는 슬픔의 크기는 단장의 슬픔이라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아마도 동서고금의 작가들이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 안에서 자식의 죽음을 다시 표현해 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슬픔을 승화시켜 낸 결과일 것이다. 독자들은 그것을 읽으며 또 한 번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슬픔을 정화하고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 본문 145쪽에서
● 과거 제사장의 역할, 마법사의 역할, 과학이 대신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과학은 마치 인간의 취약함을, 유한함을 뛰어넘게 해줄 것처럼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새삼 깨닫게 해준 것처럼, 인간의 과학은 아직 미비할 뿐이고, 인간은 취약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의 한계 덕분에, 다시 말해서 죽음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함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인간이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두려워할 때, 인간은 가치를 탐색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본문 177쪽
● 미아스마(miasma, 오염)는 19세기 중엽 콜레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었다. 장기설이라고 번역되는 이 미아스마 이론은 나쁜 공기, 즉 미아스마 때문에 유행병이 돈다고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미아스마 때문에 나쁜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는 전염병을 포함하는, 그러나 더 넓은 개념이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비극 작가들은 나쁜 운명의 원인이 되는 미아스마와 그 영향, 그리고 이를 극복하거나 후대에 이어지지 않도록 단절하는 방법 등을 고민했다. 이들에게 있어 미아스마는 피를 흘린 경우, 즉 살해가 행해진 경우에 생기는 것이었다. 이는 피로써 복수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연속된 미아스마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띠었다. 그래서 미아스마는 운명의 굴레였으며, 단절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화의식을 통해서 단절되거나, 그리고 신의 능력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단절의 방법으로는 인간의 방법인 추방을 제시했다. - 본문 203쪽
● 그리스와 트로이아는 서로 다른 문화였을 테지만, 호메로스가 아마도 하나의 문화로 혼동하여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기원전 8세기 당시 사람들이 영웅들의 장례에 시신을 화장했고, 뼈를 골라내어 황금 항아리에 담아 화장한 자리에 놓고 봉분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의 영웅 숭배와 조금 후대의 조상 숭배는 이러한 문헌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영웅들의 죽음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한 완고함 때문에 영예롭다. 이들은 신들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놓인 것이면서도 이를 담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슬픔은 여전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사람들은 온몸에 더러운 것을 묻히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인을 애도했다. 그리고 고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편안히 하데스로 갈 수 있도록 장례를 치렀다. 이는 그리스의 영웅 파트로클로스와 트로이아의 영웅 헥토르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것으로 호메로스가 강조하고자 했던 죽음의 관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 본문 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