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자(老子)는 고대 중국의 철학자로, 공자(孔子)와 동시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자와 공자가 살던 시대는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인 ‘춘추시대’라고 불리는 혼란기였다(기원전 770년~기원전 403년).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는 주(周)나라 말기에 해당하고, 세계사적으로는 소크라테스나 붓다가 태어난 이른바 축의 시대(axial age)이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말기가 되면 사회가 혼란스럽듯이, 이 시기도 전통적인 지배 체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과도기였다. 그 새로운 질서를 노자는 ‘도(道)’라고 하였다. 도란 ‘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노자가 말하는 도는 ‘새 길’로 풀이될 수 있다. - 본문 14쪽
● 노자가 보기에 자연은 생명의 성립 조건이다. 그것은 꽃과 비료의 관계와 같다. 한 생명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자연이라는 비료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생명인 이상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의 주변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조건이자 토대가 된다. 노자가 천지(天地)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지는 ‘하늘과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지구시스템’을 가리킨다. 만물을 생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지구 환경이 바로 천지이다. - 본문 40-41쪽
● ‘자연(自然)’은 노장 사상의 핵심 개념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해석도 각양각색이다. 게다가 자연을 얘기한 것이 노자만은 아니다. 노자 이후 『장자(莊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춘추번로(春秋繁露)』, 『회남자(淮南子)』, 『문자(文子)』, 『논형(論衡)』 등 여러 책에서 모두 자연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왕필(王弼)(『老子注』), 하상공(河上公)(『道德真經河上公注』), 곽상(郭象)도 각각 『노자』에 주석을 달면서 자연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세 사람은 명실공히 노자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니, 그들의 해석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 본문 100쪽
● 노자의 철학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무위와 자연(=天)이 합해져 천인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땅과 하늘 사이에 살고, 그들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자연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에, 땅을 본받고 하늘을 본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녹아낸 정치를 통해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자연은 그야말로 노자철학의 핵심인 무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존재이다.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다. 현대에는 과학이 발달하여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정치도 자연처럼 행해져야 한다. 그래서 노자의 도는 현(玄)이라고 말해진다. ‘현’은 오묘하다는 뜻이다. - 본문 119쪽
● 옌푸는 전통 속에서 서구의 가치들, 즉 자유, 민주, 평등, 인권 등의 요소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유가 전통 속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는 서(恕), 혈구(絜矩)에서 서구의 자유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서구적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지만, 같다고는 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중국의 사상 전통에서 서구적 가치들을 발견하기 위한 길을 유가가 아닌 도가에서 찾았다. 그가 노장 사상에서 발견한 서구적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 민주·과학 사상, 둘째, 자유주의 사상이다. - 본문 90쪽
● 노장 사상은 기본적으로 양생을 중시한다. 개인적 수양을 통해 더 오래, 더 잘 살기를 추구한다. 오늘날 우리도 그 점을 중시한다. 한국이나 중국 모두 건강식품이 잘 팔리는 나라라는 것도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노장 사상은 오늘날 충분한 유의미한 반응을 얻을 수 있다. 노장 사상에서 강조하는 사회적 품성은 각자 자신에 맞는 일을 하고, 그것에 자족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했고, 잘난 체 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오늘날 경쟁이 과도한 사회에서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이른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다. - 본문 160쪽
● 한국에서 교단화된 도교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비교적 분명하게 등장한다. ‘무상단’(無相壇)이라는 이름의 이 교단은 삼성(三聖), 즉 관성제군(關聖帝君), 문창제군(文昌帝君), 부우제군(孚佑帝君)을 모시는 여덟 명의 도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들은 이 신들이 자신의 몸에 강림하여 가르침을 글로 쓰게 하는 강필(降筆)의 술수로 여러 권의 경전을 만들어 출판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 이후에 등장한 동학, 증산, 단군계 종교들, 그리고 20세기 말 이후 활발히 나타난 수행 단체들은 노자나 『도덕경』과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는 동학의 핵심 상징인 영부(靈符)를 ‘선약’(仙藥)이라고 불렀고, 동학 계열 종교 가운데 하나인 청림교(靑林敎)는 강필을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삼았다. - 본문 208쪽
● 『도덕경』이 한국인의 텍스트라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했다. 이는 내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의식으로부터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대의 체제는 언제나 문제를 은폐하고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텍스트 읽기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권력이 현실에서 은폐한 문제를 저항 없이 들추어낼 수 있는 핵심적 투쟁이자, ‘반자’(反者)의 움직임이며 ‘도’이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반자’는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한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인류세 시대 모든 곳이 이미 지구촌화된 세상에서 ‘한국’은 더 이상 지리적으로 한반도에 국한된 장소를 단순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성(locality)에서 세계로 연결된 지구성(globality)을 동시에 함의한다. 따라서 한국적 문제의식이 지구의 문제를 품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지구적 의식이란 언제나 자신이 구체적으로 터한 시공간의 자리(독일어의 da 혹은 영어의 t/here)를 품고 말해져야 한다. 이 장(章)은 그러한 맥락에서 여전히 많은 성찰이 필요한 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이라는 텍스트를 한국의 문화적 반자(反者) 속에서 찾아보았다. - 본문 220쪽
● 인류세 시대를 향한 『도덕경』의 지혜는 지난 수십 년간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대한 계속된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전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도덕경』이 본래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다스리는 자들을 위한 통치술을 담고 있는 텍스트임을 앞에서 인지한 바 있다. 그렇게 우리는 『도덕경』이 본래 당대의 정치 지도자(들)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유념하면서, 우리 시대를 위한 정치적 지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천하의 선/악과 미/추의 이분법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모든 구별은 반자(反者)의 움직이는 도에 있으니, 결국 유/무는 어느 것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도는 이치라는 것, 다스리는 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정치를 하면, 백성들이 사라질 것이니, 다스리는 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정치 즉 무위(無爲)의 정치를 한다면, 사람들은 선을 행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란 정치적 지혜를 『도덕경』은 담고 있다. 즉 정치 지도자가 “비움의 자리를 차지하면, 사람들이 충만 혹은 현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다(Mueller, 58). - 본문 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