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소개

<다르지만 조화한다> 미디어 붓다에 소개되었습니다.

소걸음 2015. 10. 27. 14:53

“불교가 미래 사회 주도권 쥐려면 기독교 공부해야”

두 종교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이찬수 교수의 내통기

 

 

※ 출처 : 미디어 붓다 2015.10.26 (월)          기사원문보기

 

‘강남대 이찬수 목사’. 늘 붙어 다녔던 그 학교명과 이름과 직함은 한동안 우리 사회의 뜻있는 종교인들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단어였다. 그는 2003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종교간 조화와 관용을 이야기하며 불상에 절을 했다. 그 뒤 우상숭배를 했다는 이유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많은 사회·종교단체가 대책위를 꾸려 그를 지지했고, 법정 소송을 통해 2010년 9월 강남대로 복직했다. 2012년부터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유명한 신학자 라이문도 파니카(1918-2010)의 고백은 이렇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힌두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 돌아왔다.”

 

이를 빌려 이찬수 교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가 궁극적 차원에서는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과정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의 신학 역정과 신앙 모색은 멈추질 않았다.

 

이찬수 교수가 이번에는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을 이야기했다. 책 제목은 『다르지만 조화한다』로,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그의 학문세계를 담고 있다. 그는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 불교를 공부했다. 그의 모든 연구 결과들은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과히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왔다.

 

“두 종교가 추구하는 그 종착점, 가령 공(空)과 하느님, 열반과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와 보살, 기도와 염불 등은 결국 비슷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주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이들의 객관적 동일성을 당장 확보하기는 힘들어도 궁극적 차원에서는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져왔다.”(8쪽, 머리말)

 

이 책 역시 불자와 기독자가 추구하는 의미 세계의 상통성을 염두에 두고 쓴 글들의 모음이다. 제목은 ‘상대와 조화하면서 차이도 인정한다(和而不同)’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차용했다.


불교적 그리스도인 폴 니터 조명

 

이 교수는 두 종교를 동시에 살아가는 대표적인 신학자로 미국의 폴 니터를 예로 든다. 니터는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기독교 신앙인이고, 여전히 명망 있는 신학자이다. 그러나 불교를 체화해 자신의 삶과 신학 안에 녹여낸 ‘불교적 그리스도인’이다.

 

“니터는 구도적이고 종교적인 양심을 가지고 인생의 마무리를 진솔하게 해 나가는 탁월한 학자의 모범을 잘 보여주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불교학자라 할 수 있다. 스님 가운데 신학을 자신의 일부로 소화해 신학자보다 더 신학자 같은 삶을 사는 스님을 볼 수 있을까. 니터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니터의 삶이 그만큼 진지하고 그 만큼 깊기 때문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165쪽, 두 종교를 동시에 살아가다)


불교를 학문의 주제로 삼아온 대표적인 신학자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도 이 교수의 시야에 들어 있다. 이 교수는 야기의 불교적 신학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하면서도 퇴색되지 않는 그의 창조성에 주목한다.

 

“그는 니시타 기타로, 타나베 하지메, 그리고 니시타니 케이지 등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일본적, 나아가서는 아시아적 기독교의 토착화 가능성을 성서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연결시킴으로써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성서 안에서도 불교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전혀 상반되는 듯한 불교와 기독교를 이어서 보려는 그의 노력은 이렇게 해서 양 종교를 다원 사회의 정다운 이웃으로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또 하나의 토대를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다.” (188쪽, 신학을 불교화하다)

 

이 교수는 이밖에도 원불교 사상과 기독교, 니시다의 철학과 기독교, 한국의 길희성과 타나베의 신학과 철학 등을 비교해보고, 독일 출신 예수회 신학자 한스 발덴펠스를 통해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구명한다.

 

이 교수의 관심은 종교 밖에 있는 한 실천적 지식인의 눈에 비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 주인공은 사민주의적 성향의 진보적 언론학자 리영희(1929-2010)이다.


『리영희-살아 있는 신화』의 저자 김만수의 리영희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예로 들면서 “‘종교적이지 않은’ 언어임에도 리영희를 사실상의 종교적 정신의 구현자로 보게 만드는데 충분해 보인다”고 말한다.

 

불교, 우물 안에만 안주할 건가

 

이 책은 ‘두 종교에 대한 애정 어린 요청과 기대’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저자는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해서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70%쯤 완성된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다.

 

“서구에서 불교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드디어 세계는 불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며 쉽사리 받아들이고, 과학적 세계관이 불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에는, 결국 서구 과학도 불교로 오게 되어 있다는, 다소 안일한 반응을 보인다. 서구의 사상 조류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서구에서 발전시킨 과학적 세계관, 그 사상적 근거를 꿰뚫어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279쪽, 90점 불교와 70점 기독교)

 

이 교수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한 수 위라는 심리적 위안감만을 가진 채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우물에만 안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30%를 채우려는 기독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불교가 나머지 10%의 노력을 기울여야 기독교가, 나아가 서양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을 제대로 보아야만 불교가 미래 사회에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280~281쪽, 90점 불교와 70점 기독교)

 

이 교수는 기독교에 대해 역시 불교를 수용하며 나머지 30%를 채워나가라고 충고한다.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딱히 ‘성인이랄 것도 따로 없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진리’를 공유하며 인류 정신계를 선도할 수 있는 공동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누군가를 위한 충고는 관심과 기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불교에 대해 이런 충고를 해준 사람이 언제 있었던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불교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다 남다른 고난의 길을 겪은 자의 말이기에 진정성이 담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 이찬수 지음, 모시는사람들 / 320쪽,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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