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다- 책 '생과 사의 인문학'을 잃고전희식 통계 또는 보도를 통해서나 접하던 죽음이 내 주변에서 발생하면 잠시 숨이 멎기도 하고 인생무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의외의 죽음은 더 그렇다. 그러나 이도 잠시, 다시 삶의 쳇바퀴 속에서 천 년이라도 살 것처럼 허겁지겁 살아간다. 최근 연명의료결정법(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시행되면서 죽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좋은 죽음을 맞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뜻 있게 마무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연 '10만인 특강'에 죽음학 강연자로 나가면서 다시 읽었던 책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삶에 대한 집착은 의도적으로 죽음을 멀리하게 한다.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에서 엮은 <생과 사의 인문학(모시는 사람들. 2015)>은 죽음과 삶을 같은 비중으로 다룬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런 연장으로 보기 때문이리라. 각각 6명씩의 필자가 전공 분야별로 생명사상, 죽음에 대한 이해, 장례 풍습, 종교나 민족별 생사관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첫 글은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어떤 조건에서 인정할 것인가이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등 의학적 조치들에 대해 미리 견해를 밝혀두는 '사전의료 의향서'의 효력과 한계, 보완책 등을 다루고 있다. 글을 쓴 진교훈은 환자 상태에 대한 판단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연명의료 중단 법제화에 반대한다. 미성년자와 의식불명의 환자도 자기결정권 행사의 효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생명의 존엄성은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와는 가깝고도 먼 일본의 생사관은 빈발하는 자연재해와 긴밀하다. 죽음을 수용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그들의 모습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눠 살피고 있다. 일본의 화장률이 세계 최고인 99.9%라는 사실도 지진과 해일로 인한 대량 재해사망자의 발생과 관계가 깊다고 분석한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의 방식에 따르는 셈이다. 한국의 무속에서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저승에서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이라고 소개된다(235쪽 이용범의 글). 동해안의 오구굿을 보면, 살아 있는 가족들이 "금세상에 못다 산 한으로 저승 가서 오래오래 사시라"고 하는 것이나 제주도의 영개울림에서 죽은 자가 "가족들이 사이좋게 살다가 저승으로 오면 저승문에서 기다리다 마중"하겠다는 것이 같은 이치다. 이승 가족과 저승 가족 간의 단절이 없다. 그래서 이승의 삶에 지나친 집착과 미련을 갖지 말라고 한다. 전통 굿은 죽은 자를 달래가며 저승길로 잘 가도록 인도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 자살에 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롭다. 삶의 극단적 마감인 자살을 정조 시대의 판례 모음집인 '심리록'을 토대로 분석하는데 가해자와 피해자로 접근하는 관점이 이채롭다. 자살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성을 띈다는 관점이다. 자살의 원인과 함께 관련자를 성별로 분류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상을 엿보게 한다(146쪽).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 여성에 대한 칭송이 좋은 예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일까. 글쓴이 양정연은 불교의 초기 경전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룬다(309~329쪽).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 감정 세계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정리한다. 죽음의 순간까지 나눔을 실천하고, 삶을 반성하고 수정하며, 보다 나은 삶이 되게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출처: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92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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