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전환이야기 입니다.
전환은, 무엇을 전환해야 하는가? 무엇으로의 전환인가? 무엇을 동력으로 하는 전환인가?
전환은 증류인가 - 오염된 물에 열을 가하여 낡고 더러운 것을 찌꺼기로 남겨 두고, 정화(기화)된 수분만 다시 액화시키는 것
침전인가 - 오염된 물을 가만히 내버려 두어 낡고 더러운 것이 가라앉도록 기다리는 것
아니면 운동인가 - 흐르는 물이 스스로를 정화하듯 흘러가게 함/흘러감으로써 정화되도록 하는 것인가
주요섭 님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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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동(東)’은 ‘서(西)’에 맞선 동이기기도 했거니와 오히려 동의 질서를 다시 개벽으로, 창조적으로 부활시키고자 한 운동의 이름으로서의 동이다.
개벽은 no-where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now-here의 유토피아다. 지금 여기 ‘현재에 와 있는 희망’이다. 개벽은 질적 비약, 차원 변화다. 나팔꽃이 열리는 아침을 맞으면 개벽 세상이 된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나누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공동체 안에서 이미 개벽 세상이 실현되었다.
동학은 민초들의 장생(長生)의 꿈, 즉 생명 살림의 염원을 사회적으로 실현코자 했다. 선천(先天)의 질서를 안고, 또 동시에 넘어서 후천(後天)의 질서를 꿈꾸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향한 꿈이었다.
궁궁의 열망은 개벽으로 실현된다. 문명 전환이다. 그 출발점은 하나됨 체험이다. 하나됨의 열망은 공동체 만들기로 이어지고 보국안민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궁을/궁궁이 문명을 바꾼다[弓乙回文明].” 즉 문명 전환이다. 가치의 전환, 생활의 전환, 시스템의 전환, 기술의 전환, 정치의 전환…. 무엇보다 삶/사람의 전환,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탈바꿈이다.
신분으로 차별되고, 적서로 차별되고, 남녀로 차별되는 선천의 질서, 상극으로 서로를 죽이는 선천 세상을 넘어서, 노비와 주인이 어우러지고, 적자와 서자가 차별 없고,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닌 후천세상으로의 개벽적 전환을 꿈꾸었다.
특별히 동학은 새로운 사람, 즉 하늘사람을 꿈꾸었다. 모든 이들이 하늘사람으로 거듭남으로써만 진정한 개벽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주요섭, 전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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