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들 책이야기

그들이 걸어온 걸음이 근대를 열었습니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11. 9. 18:07

힘든 길을 넘어온 그들에게 역사는 화답해야 합니다

■ 책을 말하다: 《근대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

김종욱_ 동국대학교 사회과학연구(SSK) 패치워크문명연구팀 연구교수(전문연구원)



* 이 글은 개벽신문 78호(2018년 10월 15일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근대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 조선후기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의 근대화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사상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며, 그 뿌리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 근대화의 여정을 거슬러 내려오는 길이다. 또한 조선의 근대는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며, 조선사회 내부에는 근대화의 힘이 없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특히, 역사 내내 사회적 약자로 존재했던 여성과 어린이의 해방과정에 대한 추적을 통해 조선사회 내부에 이미 근대화의 내재적 힘이 있었다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다.

젠더문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난제다. 사회는 이 문제로 신음하고 있고, 그 해결을 위한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그 사례가 바로 미투(me-too)운동이다. 2018년 벽두부터 대한민국은 미투(me-too)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도 피해자’라는 피해 경험의 고백을 통해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인하려는 운동이다. 2006년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가 성범죄에 취약한 유색 인종 여성 청소년을 위해 시작한 캠페인이, 2017년 10월 배우 알리사 밀라노(Alyssa Milano)가 트위터를 통해 제안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젠더 위계 속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감내해야만 했고, 그 아픈 기억들 때문에 고통 받으며 살아야 했다. 사회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치유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서두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고,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고…그러므로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공적 공리성에만 기초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차별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혁명에서 제시된 원칙이다. 그러나 25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남녀의 불평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고, 젠더의 차별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으로 따지자면, 2500년 전 공자의 “천하에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天下無生而貴者也)”는 인간평등의 천명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인간평등과 여성해방, 어린이존중의 사상이 면면이 이어져왔다. 그 흐름의 절정은 동학사상이었다.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이미 생활 속에서 이것을 체현하고 있었다. 양반의 눈으로 바라본 동학교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평등과 해방이었다. 「도남서원통문(道南書院通文)」(1863.12.1.)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같이 귀천의 차등을 두지 않고 백정과 술장사들이 어울리며 엷은 휘장을 치고 남녀가 뒤섞여서 홀어미와 홀아비가 가까이 하며 재물이 있든 없든 서로 돕기를 좋아하니 가난한 이들이 기뻐한다.” 양반들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동학교도들을 묘사한 것이니, 동학이야 말로 조선 후기 진정한 평등과 해방의 세상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이미 생활 속에서 이것을 체현하고 있었다. 양반의 눈으로 바라본 동학교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평등과 해방이었다.

수운 선생이 순도한 이후,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 선생은 수운선생 탄신기념일에 모인 제자들에게 “인(人)이 내천(乃天)이라. 고로 인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인이 인위로써 귀천을 분(分)함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니라. 우리 도인들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토록 하여 스승님의 본뜻을 따르도록 하자”고 말씀했다. 수운의 뒤를 이어 인간평등을 다시금 천명한 것이다. 동시에 수운선생은 1867넌 “나는 비록 부인(婦人) 소아(小兒)의 말이라도 또한 배울 것은 배우며 쫓을 것은 쫓나니 이는 모든 선은 다 천어”이기 때문이라고 일갈하면서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을 제시했다. 이것은 서양에서 남성으로서 여성해방을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1869)보다 앞선 것이다.

이렇듯 동학은 조선사회의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사상을 제기한 중심이었다. 인간은 평등하며, 따라서 신분적 차이도 없고, 여성도 동등한 인격체라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의 사상, 어린이도 한울님같이 생각하라는 어린이존중사상이 동학과 동학교도들 속에서 펼쳐졌다. 따라서 동학은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에 대한 혁명적 근대성을 만들어낸 중심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만들어진 배경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연동된 백성의 성장, 백성의 성장을 수용하여 소민을 보호하고 언로를 확대한 계몽군주(영조, 정조, 고종), 공자철학을 갱신한 동네유자들의 확산이었다.

조선사회 여성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성리학적 규범과 질서에 맞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해방의 과제들을 차츰차츰 실천해나갔다. 남녀차별은 없으며,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고, 부부는 동등하며, 여성도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변으로 퍼져나갔다. 여성을 억누르는 사상과 질서에 맞서 다양한 상상적 사유를 사회에 전파했다. 그 도구는 여성영웅소설이었는데, 그 소설 속에서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영웅의 이야기, 남장 여성, 동성애 등을 통해 조선사회가 부과한 젠더 역할과 규범에 도전했다. 즉, 여성들이 ‘동일성에 근거한 평등의 추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질서와 규범에 의한 압제 속에서도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행동했다. 그래서 여성들은 이런 삶을 그냥 인내하지 만은 않았다. 성리학적 질서와 규범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정체성, 인간의 자주성을 드러냈다. 성리학적 질서와 직접 충돌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자가 되어 성리학이 남성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성리학적 규범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혼자 살아가기’를 감행했고, 문학과 가상의 세상을 통한 여성영웅 만들기와 동성애 담론의 과감한 노출을 통해 남성권력을 비웃기도 했다. 또한 과부의 재가 불허를 현실에서 무너뜨리기도 했고, 가부장적 질서를 교란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분투했다. 이런 노력은 동학과 결합되어 신분해방, 여성해방 사상으로 나타났고, 신분 철폐와 청춘과부 재가 허용이라는 현실적 투쟁으로 실천되었다.

조선시대의 어린이들은 가족 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고, 동아시아의 오래된 교육철학과 보통교육제도로 많은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았고, 부모 없는 아이와 굶는 어린이들은 법률을 통해 구제했다. 특히 동학은 어린아이를 한울님으로 대해야 하며, 어린이에 대한 일체의 폭력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해월은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으로 “일체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렇듯 어린이에 대한 존중은 동학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으며, 이 흐름은 제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어른과 동일한 인격체로서 어린이를 대하는 일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미래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어린이해방에서 긴요한 과제였다. 방정환과 김기전이 주동하여 시작된 어린이운동과 어린이날 제정은 우리 역사에서 획기적인 이정표였으며, 세계사적으로도 터키 바로 다음으로 앞선 것이기도 했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는 어린이운동은 동시에 짓밟히고 학대받은 조국의 미래와 독립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신분해방과 인간평등의 세상을 향한 동학의 거대한 족적은 어린이운동과 어린이날 제정으로 나타났으며, ‘어린이존중사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동의 발견’을 넘어 인간평등의 한울님으로 어린이를 존중하는 사상이 조선후기에 잉태하여 사회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사회의 내재적 힘이 집약된 동학은 인간평등·신분해방·여성해방의 가치 실현을 통해 ‘대동 평등’ 세상을 실현하려고 했으며,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이 실천되는 ‘모정사회’를 지향했다. 동시에 동학의 거대한 족적은 어린이날의 제정과 어린이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어린이를 한울님으로 존중하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중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폭발시킨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대한제국 시대에 대한 다른 접근을 제공했다. 그러나 어쩌면 ‘미스터 션샤인’이 담고자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대화되고 백성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왜냐하면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해 광무개혁을 추진했던 대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지만, 우리 국민은 백성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제에 맞서 51년의 항쟁을 전개했다. 그 와중에 진행된 3.1독립운동은 동학을 뒤이은 천도교 300만 교도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와 목숨을 건 만세운동 속에서 진행되었다. 천도교의 정신을 이어받은 천도교도들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선 백성 전체가 움직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의 굴곡을 겪지 않았다면 300만 명의 신도를 자랑하는 동학이 여성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는 모정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남녀평등을 넘어서는 어머니의 사랑이 펼쳐지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사회의 내재적 힘이 집약된 동학은 인간평등·신분해방·여성해방의 가치 실현을 통해 ‘대동 평등’ 세상을 실현하려고 했으며,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이 실천되는 ‘모정사회’를 지향했다. 동시에 동학의 거대한 족적은 어린이날의 제정과 어린이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어린이를 한울님으로 존중하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 책은 여성과 어린이문제에 대해 동서양 비교연구도 진행했다. 지금까지 통념은 서양보다 뒤떨어진 여성해방과 어린이에 대한 존중이 부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선, 동서양 모두 근대화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와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여성해방의 방향을 모색했다. 둘째, 조선사회와 서양에서 남성의 목소리로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셋째,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의 분출이 국가와 남성권력에 의해 실패했으며, 새로운 돌파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거대한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문제의 경우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아시아가 훨씬 이전부터 교육과 보육차원에서 각종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시행했다.

이처럼 여성과 어린이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서양에 뒤쳐진 동양이라는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 핵심은 선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가치와 전통을 알고 이를 사회에 적용하여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사상을 더욱 확실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서양예외주의’에 의해 제대로 우리의 역사를 알지 못했을 때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알았다면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조선사회 내내 ‘낮은 근대’의 어둠을 뚫고 ‘높은 근대’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한민국의 여성해방과 어린이존중사상의 기원과 힘을 밝히려는 것이며, 이 길을 걸어왔던 무명의 백성들이 만든 역사에 바치는 헌정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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