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들 책이야기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1. 4. 17:58

■ 책을 말하다: 《근대와 民》

이영재_ 한양대 학술연구교수



* 이 글은 개벽신문 80호(2018년 12월 15일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국외 망명지인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공포했다. 필자가 관심 있게 본 임시헌장의 조항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임시헌장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의 폭압을 뚫고 일어난 3.1운동의 동력을 발판 삼은 것이고, 본토(한반도)에서 분투(奮鬪)하는 대한국민의 간절한 정치적 여망(輿望)을 응축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학 전공인 필자는 임시헌장이 현행 헌법의 민주적 가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근대화를 추동한 동력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우리 내부의 토양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흔히 우리나라의 정치적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니, 미군정기의 선물이니 하는 학계에 팽배해 있던 소위 ‘외부이식론’ 또는 ‘외삽국가론’의 영향 탓에 으레 우리나라 정치적 근대화는 서구로부터 얻어 입은 옷이겠거니 하고 있던 필자의 편견에 혼란이 생겼다.

부끄러운 외부 이식론

이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비교헌법학 분야의 연구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우리 임시헌장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앞선 시점에 ‘민주·공화’를 헌법에 명시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확한 시점을 따져보면, 유럽에서 가장 빨랐다는 체코슬로바키아가 1920년 2월에 와서야 ‘민주공화국(democratische Republik)’을 헌법에 명기했고, 이보다 8개월 뒤에 오스트리아연방헌법에 ‘민주공화국’이 쓰였다. 이는 우리의 정치적 근대화가 외삽적이었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우리 임시헌장은 유럽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 수많은 국가의 헌법문서 가운데에서도 독창적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 학계의 거대한 편견 탓에 이러한 사실에 둔감했다고 핑계거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이미 붉어진 낯빛을 감추기는 어렵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1919년 본토에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이 한창일 때 망명지에서 발표한 임시헌장에 담긴 정치적 지향은 최소한 우리 국민들에게 생경하거나 반감을 불러오지 않는 것이리라. 낯선 외부의 기표, 즉 ‘민주’와 ‘공화’를 이식했다는 것은 시점 상으로도 맞지 않는다. 설령 민주와 공화라는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개념들과 부합하는 정치적 토양이 없었다면 이 정치적 레토릭들은 임시헌장에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민주’·‘공화’라는 기표 자체는 외부로부터 수용한 것일 수 있지만, 우리 내부에 그에 관한 사상적 토대가 배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헌법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기울어진 마당에서 독해하는 우리 근대사

이 사상적 토대를 탐침해 들어가야 했다. 더불어 우리 근대화가 외부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근대의 추동 주체는 누구인가? 의문이 생겼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을 『근대와 民』으로, 부제를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으로 삼게 된 동기이다. 이 책은 기존 견해들과 달리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한 주체가 민(民)이고, 우리 근대화의 특성을 지식인 중심의 근대화나 위로부터의 근대화, 식민시기의 타율적 근대화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라고 제안한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직면한 가장 큰 난관은 심각하게 기울어진 마당, 즉 편중된 사료의 비대칭성이었다.
사료의 비대칭성 문제는 19세기에 들어서면 다소 개선되지만, 19세기로 넘어 온다고 해서 완전히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료 생산의 주체는 여전히 개화지식인과 관 중심이었기 때문에 19세기 말엽 활자화되어 공간된 대부분의 사료들은 민의 사상을 실증적으로 독해하기 곤란하다. 가령 『일본공사관기록』을 비롯해 친일파 및 개화파 지식인들의 저서와 기록, 개인의 일기, 논설, 이들의 미담·일화집과 전기, 그리고 당시 동학농민군과 의병에 적대적이었던 공론장의 신문과 잡지류, 그리고 민의 사상이 드러나는 동학·민중사상·민족종교를 ‘이단’과 ‘사설(邪說)’로 배척한 성리학유생들의 문집과 유고집 들이 이 시대를 대변하는 주된 사료들이다. 반면, 백성의 고통과 신음소리, 동학농민·의병·해산국군의 아우성·분노·함성, 이들이 직접 경험한 전투와 투쟁, 목격담 등은 활자화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또한 우리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구적 편견에 입각해 표면적 사건만을 보고 쓴 일부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저술은 그 사료적 정당성을 면밀히 따져 봐야 한다.
이 사료의 비대칭성 문제는 절대 실증주의로 해소될 수 없다. 한 역사학자의 다음과 같은 성찰과 같이 “역사학계는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났어도 남아 있는 문서 사료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신뢰하고 이용의 편의만을 고려했을 뿐, 사료 생산의 주체나 사회적 맥락을 짚어보는 사료 비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기존 사료를 민의 관점에서 독해하기 위해 가급적 사료의 생산주체, 정치적 상황, 사회·경제적 구조 등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지배권력과 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사료를 해석하고자 했다.

민유방본이 포지(抱持)한 민주

민주정체가 자연스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오랜 정치철학적 전통인 민유방본, 즉 민본의 본유적 혁명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리학자든 실학자든 조선의 사대부들은 ‘민유방본론’과 ‘민귀군경론’이 ‘백성자치론’으로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민유방본론’과 ‘민귀군경론’은 그 의미를 아무리 소극적으로 제한하더라도 종국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결국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나가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유방본의 본의는 시혜적 ‘위민(爲民)정치’가 아니라 ‘주권재민’ 또는 ‘백성의 본연적 주인 지위’를 내포한 정치철학이다. 19세기를 전후해 평민 공론장까지 확장된 적극적 함의의 ‘민유방본’ 이념은 근대적 민주주의의 의미를 우리의 정체성 위에서 수용할 수 있는 비등점까지 육박해 있었다. 
 그렇다고, 민유방본의 원리가 곧 민주주의 원리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민본원리가 민주주의를 포용하기 위한 적극적 디딤 발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강조하고자 했다. 1894년 3월 20일(양 4. 25) 동학농민군은 봉기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원리로 민유방본을 활용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약해지면 국가가 잔멸하게 되는데(民爲國本 本削國殘) 보국안민의 방법은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지으며 오직 저 혼자만 잘될 생각으로 벼슬자리만 엿보는 것이 어찌 올바른 정치이겠는가.” 1894년 4월 19일(양 5. 19)경 초토사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민유방본을 바탕으로 봉기의 정당성을 설명한다.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안녕하다(民者國之本也 本國邦寧)’는 옛 성현의 유훈으로서 시무의 대강입니다. (…) 오늘 저희들의 행동은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손에 병장기를 거머쥐고 오직 살아갈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입니다.”
민유방본의 원리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위에 민주의 원리를 수용하는 척도였다. 『황성신문』의 한 논설(1899. 2. 22)은 영국의 의회주의 원리를 평가하면서 “이 ‘민·위·방·본’ 네 글자의 의리는 고금천하의 정치가들의 요무이기에 동서양에 나라가 있은 이래 넘을 수 없는 원칙”이라고, ‘민유방본’과 ‘민심즉천심’을 결합하여 설명한 바 있다. 20세기 초에는 민유방본의 의미가 한층 더 ‘민주’의 의미를 포지한 채 활용되었다. 호남 유생 변승기는 1907년 ‘민유방본’을 맹자의 천하공물론, 천(天)·민(민)동위론 등과 연결시켜 바로 “국민의 국가” 개념을 도출하고 여기로부터 호남지역 국채보상운동 발기문의 핵심논지를 구성했다. 이상설도 1909년 3월 “무릇 임금은 나라를 위하여 둔 것이오, 나라는 임금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니, 이러함으로 임금이란 것은 인민이 자기의 사무를 위탁한 공편(公便)된 종일뿐이요, 인민이란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저의 직역을 진력케 하는 최초의 상정이라”고 천명하고, 그 철학적 근거로 “백성이 중하며 사직이 버금이요 임금이 가볍다”는 맹자의 명제를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나란히 들었다. 1920년 <개벽>에 실린 한 논설은 링컨의 민주주의에 관한 연설과 민유방본의 원리를 연계하여 논했다. “일즉 米國 대통령 린컨의 유명한 연설 중에 「인민을 위하는 정치, 인민에게 의한 정치」라 云한 언구가 잇섯다. 전자 즉 인민을 위하는 정치란 언구에 의하고 보면 이곳 민본주의의 사상인데 이른바 國의 정치의 목적은 民을 本으로 할 것이라 함이니 즉 民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정치의 주안이라 함이엇다.”

인간존중(만민평등)과 신분해방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핵심인 민주공화국에 내재된 ‘공화’ 이념은 ‘민주’와 직접 호응하는 개념으로 단순히 왕이 존재하지 않는 정체 이상의 사상적 지향을 담보하는 것이다. 근대 정치원리인 ‘의회’, ‘참정권’ 등이 확립되기 이전 ‘민주’와 ‘공화’를 향한 사상적 요체는 만만평등 원리에 기초한 ‘신분해방’ 사상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조선시대 민의 영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대동사회’·‘개벽세상’의 ‘보편적 평등관’이 민의 사상적 지류(支流)로 자리 잡아 왔다. 대동사상은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때로는 이상사회론, 참위사상 등과 호응하기도 하고, 16세기 정여립의 ‘대동계’로 실체화되기도 하고, 18세기 각종 민란과 괘서사건의 배후 사상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동사상에 내재한 보편적 평등관은 19세기 중반까지 면면히 이어졌고, 1860년 동학 창도로 집대성되었다.
동학사상의 실천 지침으로 수차례 강조된 보편적 인간존중·평등사상은 19세기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민의 공감대를 충분히 반영한 사상적 지표이자 근대사회를 예비하는 사상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은 근대적 신분해방의 임계점에 육박해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어떤 형태로든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82년 ‘신분해방령’과 1886년 3월 ‘노비해방절목’의 반포는 제도적 차원에서 민의 신분타파 요구에 호응한 조치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 관리의 등용에 있어 신분제약이 잔존했고, 노비제도 역시 일거에 타파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기득권층의 양반질서 옹호가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 구석구석까지 신분해방이 관철되기에는 아래로부터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가 근대적 신분해방이 관철되는 역사적 결절점이었다는 사실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동학농민군은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관민공치의 실험이었던 ‘집강소(執綱所)’를 통해 삼남 전역에서 신분제적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신분타파 조치를 실행에 옮겼고 그 영향은 상당한 것이었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는 18세기를 경유하며 ‘양반의 잔반화·평민화’, ‘평민의 중인화·양반화’, ‘노비의 평민화·양반화’ 추세에 따라 사회 전반적으로 신분차별 의식이 희석되었고, 신분경계가 모호해졌다. 이 시기 향촌의 지배구조가 백성의 자치·참정의 방향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대동-해방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동학이 창도되던 시기는 이미 이러한 향촌의 신분제적 변화가 변곡점을 넘은 후였다. ‘재지사족의 고전적 향회’가 18세기에 ‘유향의 향회’로 발전하고, 이것이 19세기에 다시 ‘소민의 민회’로 발전한 양상 또한 근대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19세기 말 국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동학농민군이 선택한 일군만민이념과 자주적 조선중화론에 기초한 척왜·척화의 기치는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정교하게 재론될 필요가 있다.

맺으며

그동안 우리 근대 국가의 성격과 관련하여 19세기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주나 공화 개념의 수용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민의 사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비록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성긴 논리전개가 곳곳에 있지만 이 책이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한 민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근대와 民》 도서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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