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들 책이야기

개벽파선언, 개벽하는 사람이 한울사람이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8. 5. 11:27

■ 개벽의 창

박길수_ 개벽신문 주간·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

*이 글은 《개벽신문》 86호(2019년 7월 15일 발행)에 게재되었습니다

1.

필자가 대표로 있는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 『개벽파선언』을 단행본으로 발간하기 위한 텀블벅(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다(7월 17일~8월 18일). 크라우드펀딩은 다수의 후원자로부터 프로젝트(출간, 제품제작, 영화 등 기타 창작물 제작) 추진을 위한 자금을 후원받고, 그에 따르는 보상(도서 등 프로젝트 결과물과 추가 기념품)을 제공하는 것이다. 애초에, 기성 제작 환경에서는 제작될 수 없는 개인적인, 대중성이 희박한, 사회적 관심 자장이 형성되지 않은 프로젝트에 대한 후원으로부터 시작하였으나, 최근에는 기성의 제작 환경(책의 경우 기성의 출판사)을 갖춘 주체들도 속속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하고 있다. 『개벽파선언』 단행본 출간 프로젝트도 그 경우에 해당한다. 오늘날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출판 부문은 새로운 시대환경(‘제4차 산업혁명’) 속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출판의 기본 구조(원고집필·편집제작·판매홍보)와는 다른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사례와 범위가 많아지고, 넓어지고 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출판도 그중 하나다.

텀블벅 사이트에서 진행 중인 여러 크라우드펀딩 출판 프로젝트들

책 읽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격감하고, 그에 따라 출판계의 혈관과도 같은 서점이 잇따라 폐업하며, 주된 독서 부문이 변화하는 것 등이 전통적인 출판 환경의 변화를 야기하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인류는 지난 수십만 년의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읽고, 많이 쓰면서 살고 있다. 각종 SNS에 하루에도 수십 건의 글을 쓰는 사람이 늘어났는가 하면, 글쓰기 강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나아가 책을 펴내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이 기이한(전통적인 글쓰기와 출판의 쇠락 vs 새로운 출판 사례의 확장) 현상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개벽적 국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그에 따른 각종 첨단 물질문명보다 출판(글쓰기/말하기)의 변화가 훨씬 더 ‘국면의 개벽’이라는 현 시대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하기/듣기/쓰기/읽기’는 일찍이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성장하는 데에서 그것을 추동한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가 일찍이 수운 선생이 선창하신바 ‘호모데우스’, 신이 된 인간의 도래와 맞물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2.

이러한 시기에 시대의 획기를 표방하는 『개벽파선언』이 나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크라우드펀딩’이라고 하는 새 시대의 ‘소통/유통/참여’의 방식을 택해서 진행한다는 것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 그 의미들의 대부분은 사전에 기획하거나 계획한 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어지기보다는, 앞으로 『개벽파선언』과 그것을 떠받치거나 둘러싼 ‘개벽파’ ‘개벽학’ ‘개벽청년(벽청)’ 등등이, 격동하는 시대와 상호교감하며 생생(生生)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아니, 우리가 개벽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벽파선언의 저자 조성환

 

개벽파선언의 저자 이병한

『개벽파선언』은 ‘단일한 선언문’이 아니라, ‘개벽파’, ‘개벽학’을 향해 가는 길을 모색하는 이병한, 조성환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집이다. 애초에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서로의 장점을 기반으로 질문과 대답, 비판과 반론, 격려와 고무 등을 통해서,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와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세계와 지구)이 새로운 단계로 진전하기를 희망하고 전망하며, 상상하고 상징하며, 예견하고 예고하는 글들―인터넷 매체 <다른백년>에 연재되었다―로 채워졌다. 그러므로, 이 『개벽파선언』에 실린 글들은 순진한 팩트나 견해를 전달하는 사실적인 언어(텍스트)만이 아니라 드러난 문맥 사이(행간)와 너머(비유와 암유)까지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개벽파선언의 열린 구조를 낳는 한 요소이다.

『개벽파선언』의 특징은 무엇보다 ‘열린 구조’라는 데에 있다. 물론 『개벽파선언』의 본문은 모두 24개의 장(각자 12개 장)으로서, 그 자체로는 “속 시원히 할 말을 다했다”는 것으로 마감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속 시원함은 모든 일을 끝마친 후 손을 털고 일어서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벽하러 가는 길을 찾았다”는, “개벽을 살기로 참 잘 마음먹었다”는 다시 출발, 다시 개벽의 선언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개벽파선언이 단지 두 사람의 수다가 아니라 다수한 잠재적 개벽파, 잠수한 오래된 개벽파, 잠재한 미래의 개벽파들과 더불어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의 끝이 비로소 출발선이다. 이 책이 전형적인 ‘선언’이 아니면서도, 『개벽파선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책(본문) 전체―200자 원고로 1,100매 분량―가 하나의 ‘가름끈’처럼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획기적’인 사건으로서의 의미이자, ‘출발선’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선-끈으로서의 개벽파선언은 말 그대로의 천개지벽(天開地闢)은 물론이요 인간-사회(땅)-하늘 전반이 ‘선을 넘어’ 새로운 세계/우주로 나아감을 게시하고 계시하고 과시하는 일이다. 세계의 궁극적인 실체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끈 이론’은 현재 인류의 과학적 지성이 도달한 최후 단계의 이론이다. 그 끈은 사실, 물질과 비물질의 구분이 무색한, 유와 무의 경계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가름끈’이란 전후를 일도양단하는 ‘분열적인 끈’이 아니라 전후좌우-상하사방의 차이를 무화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차원이동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은 ‘개벽’이라는 말밖에 더 좋은 다른 말이 없다. 개벽파선언이 ‘획기적’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 가시적인 선을 긋는 일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어 부활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획기적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뜨는 일. 새 길을 찾는다는 것은 도시 속에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내는 것이거나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 혹은 깊은 숲속의 길을 찾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잊혀졌던, 묻혔던 내 안의 시선, 내 안의 밝음을 찾아 나를 새롭게 드러내고, 세상을 새롭게 비추는 일이다. 그 빛 아래에 세상에 새로운 길이 드러나고 만들어지고 시작되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개벽파선언은 저자 두 사람만의 선언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두의 선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방으로 제시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축(自祝)하고, 자생(自生)하고, 자발(自發)하는 선언이다. 두 사람이 중창으로 선창하고 우리가 후창하여 이루는 합창이다.

3.

‘개벽’이란 문자 그대로 ‘오래된(過去) 미지(未至=未來)의 지금여기(現在)’에서 ‘새 눈’을 뜨고, ‘새 길’을 걷고 ‘새 삶’을 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1860년 동학 창도는 ‘개벽파’가 ‘분출’하는 다시개벽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동학 창도조차도 그에 선행하는 ‘포태’의 시간이 있었고, 동학 창도 이후로도 끊임없이 개벽적 사건들이 계계승승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나 3.1운동 같은 역사적, 혁명적 사건으로 분출되기도 했고, 증산교나 원불교의 창도와 행도 같은 종교적인 사건으로 점철되기도 했다. 개벽파에 값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촛불로 불태워 세상에, 사람 사이에, 숲 속과 하늘에 개벽의 길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구세대, 선천이 마지막으로 발호하는 발버둥질의 위력 또한 만만치 않아서, 우리가 아는 대로 지난 150여 년(혹은 300년)의 역사는 ‘서세동점’이나 ‘개화-서구적 근대화’ ‘물질문명의 폭등’ ‘과학주의의 기고만장’ 등으로 도도하였다. 한반도는 식민지가 되고, 뒤이어 분단되었으며, 그 와중에도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하여 성장과 발전의 궤도열차에 올라타기는 했으나, 그 사이에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우정 내다버린 가치―생명과 평화, 행복과 안녕, 염치와 도리 등등―가 결국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개벽파는 그것을 한마디로 개화파가 득세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때 ‘개화파의 득세’는 좁게는 한반도에서의 개화좌파-산업화와 개화우파-민주화의 양갈래로 이어져 온 한국 근현대사 흐름을 말하며, 본질적으로는 세계 차원에서 자본주의-자유주의의 세계화로 대변되는 세계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잠깐,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시간과 무궁한 단계, 무한한 차원이 중첩된 다차원, 다공간, 다시간의 세계이다. 21세기를 살지만, 20세기, 심지어 19세기의 마음/태도/인식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남북 화해 무드가 대세요 미래인 시대에 여전히 ‘반공이데올로기’를 지상가치로 여기고 고집하고 강요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첨단 ‘신인류’, ‘포스트휴먼’의 세계-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조선시대 권문세가의 연장선상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당시의 노비보다 못한 삶을 여전히 살아내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땅과 더불어 하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발바닥(신발바닥)을 흙에 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행아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제각각의 삶은 ‘현실’이라는 ‘매트릭스’ 시공간에서 하나의 세계로 교접하며 ‘우리가 함께 사는 지금-여기’라는 희소한 시공간을 빚어낸다. <개벽>은 그 희소한 ‘우리의 지금 여기’ ‘지금 여기의 우리(나) 삶’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이론이며 제안이며 암시(祕訣)이다.

이 세계와 우주는 하나의 4차원이 아니라, 무궁한 ‘4차원들’의 겹겹세계, 다중(衆多)우주이다. 『개벽파선언』은 최근 150년 동안 인류가 걸어온 바 개화파(좌-우) 일방적인 흐름 위에서 인류와 생명, 지구 전체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더 이상 행복지수의 향상의 추구가 가능하지 않다는 전망에서 출발한다. 지금 이 세계를 주도하는 이념과 이론, 독주와 독선으로서는 양극화나 기후붕괴, 대멸종과 같은 파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진단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지난 150년 동안 우리 삶의 향상을 실질적으로 추동했던 생명력은 ‘산업화-민주화’가 아니라, 그 이면의, 그 내면, 그 반면의 <개벽파>의 사상과 철학, 실천과 감성이었음을 발견하고, 깨달은 사람들의 증언에 기반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 밖에서 새로운 사상과 이론, 전에 없던 역사를 가지고 들어와 이식하는 일이 아니라, 개벽의 관점으로 지나온 역사를 재조명하고, 개벽의 눈으로 지금 여기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것을, 인위적인 사건으로서 당위론으로 제기하고 제창(한목소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가장 평안하고 행복하고 정의롭고 조화롭게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그 믿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4.

“‘개벽’은 ‘우리의 지금 여기’ ‘지금 여기의 우리(나) 삶’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며 제안이며 암시(祕訣)이다.” 이 말이 어렵다면, ‘개벽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답하는 일’이라고 바꾸어 쉽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경우의 수는 무한하고, 거기에 대한 답도 무한하다. 하나로써 그 무한에 대응하는 일은 무망하고 허망하다. 그럼에도 ‘개벽’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연계해서 말하는 까닭은, 우리 인간(人-間)의 실존이 ‘천-지-인’의 삼위로 인식할 수 있고, 오늘의 세계가 ‘천-지-인’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人物, 사람과 만물과 그것이 구성하는 시공간] 실존이 위기에 처하게 된바, 그 위기를 포월(包越)하는 궁극의 이치가 바로 개벽이기 때문이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한마디로 ‘천-지-인’ 삼재(三才) 개벽이다. 이것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도할 당시 읽어 낸 운수의 결이기도 하다. 수운 선생은 한울님과 더불어 당대 우리(天人相與)가 처한 위기가 천-지-인 삼재의 위기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였다(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吾心卽汝心). 그런 문제의식 끝에 나온 것이 ‘다시 개벽’이다. 그러니, 개벽으로 사는 길 / 개벽을 사는 길은 천-지-인 삼재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길일 수밖에 없다. 지난 150여 년의 역사에서, 개벽의 마음과 기운은 도로먹이는 것보다 소진하는 데로 휩쓸려 왔다. 발호하는 개화파의 작란(作亂)에 갓 몸을 얻은 개벽파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뒤틀리기까지 하며 근신근신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개벽은 죽지 않고 살아, 생생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드디어 촛불혁명으로 분출된 기운을 힘입어, 『개벽파선언』으로 깃발을 높이 세웠다.

5.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개벽하고, 어떻게 개벽파의 세력을 확장할 것인가. 그 또한 천-지-인 개벽을 하는 일일 뿐이다. 우선 지금-여기 내 삶을 어떻게 개벽할 것인가. 내 안의 빛을 빛나게 할 일이다. 사람 개벽이다. 시천주(侍天主)를 깨닫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만물을 빛나게 하는 일이다. 나 홀로의 빛으로도 감당할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더불어 해야 한다. ‘너’를 만나는 일이다. ‘타인’이고 ‘타자’이며 ‘환경’을 아우른다. ‘땅 개벽’이다. 조화정(造化定)이다. 마지막으로는 세상을 빛나게 하는 일이다. 나와 너(사람과 만물)를 아울러 세상이 된다. 그 세상은 곧 한울님이다. 그 한울이 성공하는 일이며, 만사지(萬事知)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서 내 삶을 개벽하는 것은 ‘개벽의 생태계’를 회복/복원하여 사막화한 인간과 지구와 한울에 생명의 바람과 물이 불고 흐르게 하는 일이다. 다시 한 걸음. 개벽하는 삶, 삶의 개벽은 지금-여기의 내가 너와 나아가 한울과 이어져 있음을, 아래 위, 상하사방은 물론(外有氣化) 안팎과 고금을 통틀어 이어져 있음(內有神靈)을 자각하고, 거기에 값하는 삶을 사는 일이다. 그 천지인의 존재 방식의 결에 역주행하지 않는 일이다(順天命 順天理).

당장의 일은 ‘개벽생태계’를 재생하는 재기하는 재활하는 일이다. 생태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양한 것’이다. 생태계를 정의하는 바른 길은 그것이 ‘다양한 것’이라는 열린 정의이다. 그러므로, 개벽의 생태계를 회복/복원하는 길은, 지금-여기에서 개벽하는 최우선은 개벽을 다양화하는 일이다. 『개벽파선언』에는 무수한 ‘개벽들’이 등장한다. 명시, 암시적으로 이미 등장한 ‘개벽들’은 예컨대 이런 식이다. 하늘개벽, 지상개벽, 사람개벽, 다시개벽, 정신개벽, 세대개벽, 인심개벽, 영성개벽, 사회개벽, 제도개벽, 문명개벽, 교육개벽, 개벽학당, 개벽세대, 개벽대학, 개벽포럼, 개벽마을, 개벽도시, 개벽문학, 개벽경제, 개벽사상, 개벽교육, 개벽청년, 개벽사전, 개벽잡지, 개벽방송, 개벽아카데미, 개벽학센터, 개벽라키비움, 개벽론, 개벽화, 개벽학, 개벽절, 개벽당, 개벽길, 개벽세…. 그러나 이것은 겨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몇 십, 몇 백 배의 ‘개벽들’이 앞으로 속속 개화(改火)하고 개화(開花)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이에서 이합과 집산을 거듭할 것이다.

6.

그것은 ‘사막화된/되는’ 이 세상에 뿌려지는 ‘개벽씨’이다. 물 만나지 못하여 동면에 들어 있던 (개벽)씨알도 있고, ‘화이트홀’에서 생성되는 시공간처럼, 새롭게 창조된/되는 ‘씨알’도 있다. 개벽파선언은 이제 그 씨앗을 뿌리고, 씨뿌리기를 계속하는 한편으로, 다음으로 그 씨에 물을 주고 바람을 부르고, 햇빛을 들이는 단계로도 나아갈 것이다.

『개벽파선언』에는 수많은 ‘개벽씨’들이 숨어 있다. 개벽씨는 개벽싹[開闢芽]이고 개벽아(開闢我)고 무궁아(無窮我)다. 무궁아라고 하니, 그것을 찾자면 우주 끄트머리까지 가 보거나, 블랙홀 속이라도 헤매야 할 것 같지만, 실은 그 씨앗 찾기란 바닷가에서 바늘 찾기에 비해 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쉬운 일이고,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다. 단 하나의 조건 충족이 필요하다. 개벽씨를 볼 줄 아는 눈이다. 그 눈의 뿌리는 마음(지혜)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이다. 모르면, 안 보인다. 보고도 몰라보고, 보아도 안 보인다. 모르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안 보이니 못 찾는 것은 사필귀정. 손쉽게 개벽씨를 찾는 길은 『개벽파선언』을 거듭 읽는 것도 한 방법이고, 더불어 읽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서 답을 찾는 것도 문제 해결의 손쉬운 길일 수 있다. 그러나 답을 듣는 것만으로는 기어이 편식을 면치 못한다. 가장 좋은 방법, 가장 근본적인 최후의 길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개벽파선언』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질문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내 삶을 묻고, 내 삶이 깃든 지금-여기를 묻고, 어제-오늘-내일이 결합된 이 세계의 그러함과 그렇지 않음(不然其然)을 묻는 것이다. 묻는 것은 몸으로 묻는 것이다. 실행하고 실수하고 실망함으로서 아는 것이다. 행하지 않고 아는 것은 개벽지(開闢知)가 될 수 없다. 개벽지에 이르는 궁행(躬行)과 궁행(弓行)을 수도라 하고 수행이라 한다. 수행과 수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수양이라 한다. 수도-수행-수양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진짜다. 사회와 역사의 그 켜켜마다 실천궁행함으로써 개벽씨와 개벽씨가 만나 개벽파선언이 잉태(孕胎)되고, 수도-수행-수양이라는 포태(胞胎)의 시간을 지나 개벽파선언은 산출(産出)된다. 꽃 안에 다시 (꽃)씨가 깃들 듯이, 개벽파선언에는 또 다시 개벽씨가 깃들어 있다. 그것을 찾는 사람이 임자다. 살고 살리는(生活)사람이 주인이다. 개벽하는 사람이 성인군자 사이-넘어 한울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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