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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해방선언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5. 20. 14:21

글로컬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해방선언

■ 이 책은…

이 책은 “철학과 문화는 지리(장소)를 기반으로 생성하고 작동한다”는 명제를 구명한다. 이는 지리적인 국경을 무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여 지식과 문화의 다양성을 옹호함으로써 글로벌 표준화와 선진적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시도되는 서구의 세계 지배에 균열을 일으키고, 포스트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연구의 맥락에서 지리와 철학, 지리와 문화의 관계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또한 각 로컬, 특히 제3세계권 국가들에서 지리적 자각을 통해, 전통의 서구(유럽)중심적 보편주의에 맞서서 자기 철학을 구축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과 그 당위성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종국적으로 도달하려는 지평은 결국 ‘모든 로컬(all the locals)’이 각기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 분야 : 철학
  • 저자 : 박치완
  • 발행일 : 2021년 5월 31일
  • 가격 : 25,000원
  • 페이지 : 480쪽 (두께 23mm)
  • 제책 : 무선
  • 판형 : 152×225mm(신국판)
  • ISBN : 979-11-6629-032-9 (03100)

모든 철학과 문화는 지리(장소)를 기반으로 생성하고 작동한다!
문화-철학은 모두 지역 문화-철학이며,
모든 ‘지역-로컬’은 각각 세계의 중심이다!

■ 출판사 서평

1.

연전에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 황금종려상 수상을 앞두고 미국 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은 ‘로컬’”이라고 밝힌 말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이 말은 한편으로 ‘아카데미상’의 지독한 미국중심주의에를 환기시키고 비판하는 말로 읽혔을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카데미상의 미국 중심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중심주의일 수밖에 없는 아카데미상이야말로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자처하고, ‘가장 세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추종하는 경향에 대한 자각과 반성, 그리고 일침의 말로 이해함이 옳다.

한석규와 최민식이 각각 세종과 장영실로 분(粉)하여 열연한 영화 <천문>은 그 표제를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의 역법과 다른 조선의 역법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다시 말해 ‘조선의 천문학’을 만들고자 하는 두 사람의 역정(歷程)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출발점, 그리고 실제로 세종과 장영실이 추구했던 조선 천문학의 출발점은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고, 계절의 순환을 살피는 것은 조선에서나 중국에서나 동일한 사건이지만, 그 장소와 시간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현실과 필요에 부응하는 학문이야말로 살아 있는 학문이고, 이것이 조선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임금에서부터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추구해야 할 학문적 태도이며 학문적 지향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20년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한 이래 현재까지 지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한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여준 비교적 성공적인 방역의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도 기본적으로 그리고 새삼스럽게 재확인하는 핵심은, ‘서구가 틀렸다’ ‘동양이 옳았다’는 식의 이분법이나 미러링이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흐름으로 강요되다시피 하는 서구적인 문화 양식이 세계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보편타당한 기준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이처럼 문화나 학문의 영역에서 ‘지리와 공간’ 그리고 ‘시간’을 살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지만, 지난 1세기 (길게는 2세기) 동안 세계 역사는 지리적 구분을 지우고, 공간을 오직 하나로 일원화(세계화)하는 데만 골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의 정점에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학문, 그중에서도 철학의 영역이다.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철학’이라기보다는 ‘한국’철학이고 ‘동양’철학이라는 의식, 그러기에 ‘보편적인 철학’이 아니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철학’은 100여 년 전 ‘(서구적)근대화’가 시대적 흐름의 전면에 부각된 이래로 끊임없이 서구로 달려가고, 여전히 서구화에 매달리며, 한결같이 서구적인 것에 기울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경향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오늘(시간) 대한민국(공간)에서, 한국사람(주체)이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철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되돌아보자고 제안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분명 서구(유럽+미국)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철학은 누구를 위해(for Whom), 어디서(Where), 언제(When), 왜(Why)라는 질문과 함께 작동되는 아주 ‘특이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무엇을(What), 어떻게(How)”만을 문제 삼아 왔다는 것이다.

“지역-로컬에서 한국철학을 하기”의 대척점에는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명제가 놓여 있다. 즉 오늘날 ‘서양철학’이라는 것이 유럽의 극히 일부 지역(프랑스, 영국, 독일과 미국 등)의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지역(한국에서의 철학자들 포함)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 보편적인 철학으로 간주하고 접근하고, 유럽(미국)인들이 자신의 철학을 세계 보편 철학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처하는 것을 반성적으로,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서구(유럽)철학을 지역화하고, 한국철학의 정체성을 ‘지역-학’으로서 확실히 명료하게 하여 세계 지식계에 한국철학을 문자 그대로 ‘한국철학’으로 알리고 인정받는 것이, 이 책에서 추구하는 철학-하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이며, 한국철학을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는 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세계화’라는 미명-폭력 하에 강제되어 왔던 세계(글로벌) → 지역(로컬)화가 아닌 지역(로컬) → 세계(글로벌)화의 관점에서 철학-하기를 궁구한다. 그 어떤 철학도, 탄생/생산의 과정에서건 수용/소비/향유의 과정에서건, 기본적으로는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철학-하기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 시대’에 “인류공동체, 인류평화, 공공선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인문학적으로 기대할 때 지녀야 하는 태도, 바로 모든 로컬의 역사, 문화, 지식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3.

이러한 태도, 즉 로컬 지식의 회복 운동은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서구(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꾸준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추구되어 왔다. 이러한, 서구중심적·획일적 세계인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획득한 지역-로컬 지식의 회복 운동은 곧 지역-로컬을 역사·문화적으로 바로 세우고, 학문적으로 독립하기 위한 사유 운동이라는 데 이의가 있다. 이는 오늘날 그 위세가 높아지고, 그런만큼 그 골이 깊어지고 그 그늘이 짙어지는 세계화 시대, 지구촌 시대에 이렇듯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로컬-지리 위의 인간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왔고, 현재에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도(定道)라는 것을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결론적으로 철학,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로컬-지리적 선입견, 로컬-지리적 영향과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학문이라는 것,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 철학’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 각기 자신의 지리에 뚜렷이 서서, 지식다양성, 문화다양성이 꽃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로벌문화’, ‘글로벌 보편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제 ‘Korea’라는 지역-로컬 기반의 문화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세계무대를 지향하는 일대 ‘인식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지역-로컬이 망각된 곳, ‘장소의 영혼(genius loci)’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된 곳, 이런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얼굴이, 이름이, 신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존재 위치가 부여될 리 만무하다. 이 책은 이러한 필자의 학문적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자 실존적 물음에 대한 변론서”라는 것이다.

4.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지리와 철학: 글로벌 표준화에서 로컬의 특수성으로’라는 주제로 로컬/글로벌, 상대성/보편성의 경계에 선 철학과 문화가 세계화 시대에 즈음해 어떻게 재서구화(재식민화)되는 것을 방어하고 지역-로컬 고유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지의 문제를 집중 조명해 보았다.
제2부에서는 ‘문화와 지리: ‘공유’의 발판인가 ‘재식민화’의 도구인가?’라는 주제로 문화적 전환의 시대, 글로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화인식론에 근거해 전통의 유일-보편문화론이 갖는 야만적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시도해 보았다.
제3부에서는 ‘서구유럽의 보편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해석과 대응’이라는 주제로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 2000년대를 전후해 부상한 서구 유럽의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작업과 그 대응을 종합해 보았다.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일고 있는 ‘탈식민주의 운동’, ‘해방철학 운동’은 여전히 친서구유럽적 철학에 익숙한 대한민국에서의 철학교육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고유의 철학적 실천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겨 애써 소개해 보았다.

■ 차례

○프롤로그 : 새로운 개념만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
○제1부 지리와 철학: 글로벌 표준화에서 로컬의 특수성으로

제1장 로컬과 글로벌, 상대성과 보편성의 경계에 선 철학
1. y = f(x)와 철학
2. 지역-학으로서 철학
3. 철학함의 개시, 생활세계, ‘있는바 그대로의 세계’로부터
4. 지리가 접두사로 덧붙여진 시대의 철학의 위상
제2장 지식의 세계화 시대, 한국철학의 위상
1. 철학의 지형도 변화와 새로운 화두의 출현
2. 글로컬적 관점에서 본 로컬-지리 철학과 한국철학의 위상
3. 모든 철학에는 지역성이 반영되어 있다
제3장 글로컬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의 새로운 지형도
1. (동서) 사상의 교류와 (글로벌) 공공선
2. 문화적 로컬리티, 지리-철학의 부상과 한국 인문학문의 현주소
3. 제2의 암초 출현
4. 로컬과 글로벌의 간발적 교류, 글로컬 지식과 그 이념

○제2부 문화와 지리: 문화, ‘공유’의 발판인가 ‘재식민화’의 도구인가?

제4장 문화적 정체성의 물음과 글로컬 시대의 문화인식론
1. 21세기, 문화적 정체성의 회오리 시대
2. 안과 밖, 내재성과 외재성의 양간에 선 현대인과 현대철학
3. 차이의 강조에서 공존, 공생을 위한 거리와 사이의 인정으로
4. ‘문화적인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화합과 조화의 토대다
제5장 문화적 전환의 시대, ‘문화’는 보편적으로 매개되고 있는가?
1. 죽은 유령-개념이 아니라 생동하는 생물로서의 문화
2. 문화적 전환과 탈식민적 인식의 전환
3. 탈식민적 인식의 전환 요구
4. 상호문화성의 확보
제6장 문화의 재식민화 과정과 유일보편문화론의 비판
1. 유일보편문화론의 진화와 재식민화의 도정에 처한 지구촌
2. 문화적 차이 개념의 의미 재고와 식민주의적 타자관 비판
3. 로컬 문화의 생기와 간수발적 문화교류의 필요성
4. 서구인의 씻을 수 없는 원죄, ‘인간동물원’의 개원
제7장 우리/그들, 동양/서양의 야만적 이분법 재고
1. 상호/횡단 문화의 시대, 문화교류의 과거사와 현재의 화두
2. 동서양 문화의 가교
3. 공통세계 건설을 위한 문화적 참여

○제3부 서구유럽의 보편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해석과 대응

제8장 제3세계의 탈유럽화, 탈식민화 운동과 계몽의 역설
1. 문화적 정체성 찾기로서 ‘로컬-인문학’의 발흥
2. 인문학의 탈서구화와 탈식민화
3. 로컬 지식의 독립 선언
4. ‘보편적인 것의 야만’으로부터 탈피하기
제9장 서구유럽의 세계 계몽에 대한 환상과 ‘유럽의 지방화’ 논제
1. 서구유럽의 세계 계몽에 대한 환상
2.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의 지방화 논제’의 지향과 목표
3. 각 지역-로컬에서 ‘지금’ ‘직접’ 써야 하는 보편적 역사
제10장 지역-로컬 지식의 재건 운동과 ‘지역세계화’의 의미
1. 지역세계화는 세계화, 세계지역화와 정반대 방향에서 시작된다
2. 토착-정신(지식)의 회복을 위한 지역-로컬의 행동(실천)
3. ‘인간’을 버리고 ‘이념’을 취한 철학의 위험성

○에필로그 문화와 철학의 재지성과 본토성에 대한 일 성찰

 

■ 책 속으로

○ 대한민국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철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데 저술의 목표를 두었다. 서구식으로, 보편적으로, ‘철학을 한다(철학을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만으로 “‘대한민국에서’ 철학은 한다”는 것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반성이 필자에게는 늘 있었다. 철학은 누구를 위해(for Whom), 어디서(Where), 언제(When), 왜(Why)라는 질문과 함께 작동되는 아주 ‘특이한 학문’이다.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만 매달려 온 대한민국의 철학은 이런 점에서 한쪽 다리가 없는 상태나 다를 바 없다. <본문 28쪽>

○ ‘보편적 지식’, ‘절대적 지식’을 추구한다는 철학의 경우도 결과적으로 ‘지역’에 따라 구분된다는, 즉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지역에 따라 상대적’으로 해석되고 수용된다는 점을 어김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그 지역 안에서도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에 대한 위반과 교착 생장(transcroissance)은 지속된다.” 말하자면, 시공간을 초월해 빛나는 ‘태양’으로 상징되곤 했던, 그렇게 진리의 ‘빛(Lumière)’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철학은 이제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20세기 후반부터 제기된 다각적 논의를 통해 보건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체계로서 철학은 실제 존재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모든 철학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철학이란 존재할 수 없다.” 부언컨대 이 지구상에는 ‘하나의 진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들’이 존재한다. 이는 결국 지역에 뿌리를 둔 각각의 철학은 각기 고유성(그것은 상대적이건 특수한 것이건)을 담고 있으며, 그래서 메를로 퐁티의 “철학의 중심은 도처에 있다”는 명제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결국 “그 영향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본문 44~45쪽>

○ 태양과 별을 바라보는 것은 어디에서나 동일 사건일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장소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바로 그 일상의 장소, 즉 삶-생활 연관적 지역-로컬을 망각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실존과 삶-생활의 터전인 문화적 영토마저 포기하고서 ‘경제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하에 아래에서는 글로컬적 관점에서 한국철학을 포함한 로컬-지리 철학(독일철학, 프랑스철학, 영미철학 등)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를 시도할 계획이며, 지식 탐구와 철학의 위상까지도 위협하고 있는 작금의 세계화를 <세계(글로벌) → 지역(로컬)화>가 아닌 지역(로컬) → 세계(글로벌)화>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는 자리를 마련해 볼까 한다. <본문 83쪽>

○ 지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적으로 소유되거나 독점되기보다 널리 공개되어 시민(대중)의 양식과 양심을 고양하고 국가나 인류의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지식의 지향점이 여타의 산업이나 상품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식의 공개는 한 국가의 단위에서는 물론이고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문화권과 문화권 등 지구촌의 차원에서도 공공선의 실현에 공헌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 철학은 기본적으로 ‘글로벌 하늘’에서 단비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로컬 토양’에서 가뭄을 견디며 고통의 결실로 탄생하며, 바로 그 로컬에서 로컬민들이 대를 이어 가꾸어 가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경우라야 그것을 일러 우리는 마침내 ‘한국철학’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 탄생한 철학과의 본격적 비교도 가능할 것이고, 어떻게 교류되고 있는지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곧 다양한 장소”라 했다. 하늘이 둘이 아닌 한 이는 지고의 진리이다. 인문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에도 소위 “땅의 정령(genius loci)”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그 때문에 이제는 발신지가 불투명한 글로벌 공공철학,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보편지의 망령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본문 149쪽>

○ 단적으로 말해 ‘나의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보다 더 우선시되는 시대에 많은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건(노동이민, 국제결혼, 해외 취업 등) 비자발적 선택에 의해서건(정치적 망명, 전쟁 피해자 등)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문화적으로 낯선 곳에서 부득이 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당사자의 존재 자체를 심리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는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본문 163쪽>

○ 인간은 이기적 존재인 만큼이나 이타적인 존재이다. ... 타자와의 공감 확대를 통해 문화들 간의 갈등과 반목이 사라지고, 그동안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척진 갈등과 반목을 지성과 이성의 능력으로 잘 다스려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렇다. ‘문화적인 것’은 결코 갈등과 반목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화합과 조화를 가능케 할 원천이다. <본문 185쪽>

○ 오늘날 제3세계에서 문화 논의는 서구적 식민/탈식민 논제가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 제3세계에서의 문화 논의가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세계체제를 정면으로 겨냥하게 된 배경은 기존의 서구의 지배 신화가 IMF, WB, NATO, WEF 등이 동원돼 ‘글로벌 식민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로컬적 자각에 기초한다. <본문 194쪽>

○ ‘보편적인 것’은 당연 ‘거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바로 ‘지금-여기’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지금-여기’에서 ‘문화’가 상호적으로 매개될 때 인류의 공통 토대는 견고해질 것이고, 그때 우리는 ‘문화’가 매매의 대상이나 소비품목,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널리 향유되면서 나/타자, 자문화/타문화, 로컬/글로벌 간에 가로놓인 장벽을 허무는 평화의 문이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본문 224쪽>

○ ‘인간’이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 될 때 오늘날과 같이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온 지구촌을 휘감고 있는 가상-시뮬라크르가 현실-실재의 세계를 조롱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타자 담론의 생산자(서구인)와 피식민 타자(아프리카인)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머지않은 장래에 그들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타자는, 스피박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낯섦에서 친숙함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식민주의적 타자관은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글로벌 공공선이 전제된 복수공통문화론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급한 이유이다. 이코노사이드(Econocide)의 주범이기도 한 작금의 경제의 세계화의 환상에서 벗어나 문화적 다양성과 타자의 이타성을 ‘위대한 정신’, 아니 일종의 “정신혁명”을 통해 내화(內化)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문 257쪽>

○ 서구의 인종·민족중심주의에서의 동일성의 논리와 로컬 기반 문화에서의 동일성의 논리 간의 결정적 차이는 후자의 경우, 이미 앞서도 설명했듯, 타자, 타문화를 배제하지 않고 타고난 자연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타자, 타문화의 자연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설명하면 ‘나(우리)’의 문화가 중심을 전유해 ‘그(그들)’의 문화를 분리·구분해 ‘괴물’ 취급하며 배제하지 않고 ‘그(그들)’의 문화에도 ‘나(우리)’의 문화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본문 268쪽>

○ 로컬 지식은 이렇듯 로컬 문화, 로컬 전통 및 로컬 역사와 상호작용하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렇게 로컬 지식은 로컬 문화, 로컬 전통 및 로컬 역사를 참조하면서 코드화의 과정을 거쳐 보존되고 전승되며, 향유되고 창의된다. <본문 306쪽>

○ 역사와 철학은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기록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다. 지역-로컬을 위한 ‘진정한 현재’는 아무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진정한 현재’는 복수복합적 관점을 통해서 기술될 때만 고유하게 지역-로컬의 것이 될 수 있다. ‘보편주의’와 같은 사고의 표준화를 지양하려면 지역-로컬에 부과된 ‘진정한 현재’를 답파(踏破)해 새로운 사고의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유럽의 지방화 논제에서 차크라바르티가 제시한 ‘다른 세계’는 상상력이나 은유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세계’는 곧 유럽인이 겪었던 것과는 ‘다른 사람들의 현실’을 의미한다. 바로 “이 다른 현실들을 다르게(these different realities, differently) 수태(受胎)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이 K. 야시르의 『유럽을 지방화하기』에 대한 한 줄 요약이며, ‘무엇’을 수태할 것인지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우리-현실’을 바라볼 때 생생히 떠오를 것이다. <본문 367쪽>

○ 지역-로컬의 지리, 사유의 영토 개념이 이렇게 지식의 탐구 과정에서 중요 판단 기준으로 부상한 적이 있었던가? ‘지구촌’과 같은 글로벌 사회의 등장과 때를 같이 해서 이와 같이 지역-로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은 지식이란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로컬에서 발견해 가는 것이며, 외부로부터 이념이나 체계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지역-로컬의 개인과 집단이 공들여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는 상식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본문 416쪽>

○ 세계화 시대, 지구촌 시대로의 이행은 이렇듯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로컬-지리 위의 인간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왔고, 현재에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도(定道)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는 전례(前例)를 찾아보기 힘든 ‘세기적 발견’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철학,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로컬-지리적 선입견, 로컬-지리적 영향과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학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 철학’에 대한 헛된 꿈을 접고 각기 자신의 지리로 되돌아가 지식다양성, 문화다양성이 꽃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서로 다르게 존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불가침의 권리다. 크리스테바의 표현으로 이를 전환시키면, 사유의 중심이 유일-하나에서 다양-복수로 이동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본문 435쪽>

■ 저자

박치완 _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고,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Univ. de Bourgogne)에서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호모 글로칼리쿠스』,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가 있고, 공저로는 『공간의 시학과 무욕의 상상력』, 『비주얼 컬쳐 시대의 이해』, 『지식의 역사와 그 지형도』, 『문화콘텐츠와 문화코드』, 『근대한국, 개벽사상을 실천하다』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 「동일성의 폭력과 차이의 허구」, 「의심의 ‘한국’ 철학, 한국에서도 철학을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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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지구, 비상착륙 시나리오를 가동하라

동학의 천지마음

정동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