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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대동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10. 18:18

민중과 대동

민중사상의 연원과 조선시대 민중사상의 전개

■ 이 책은…

이 책은 ‘민중(民衆)이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사회 속에서 살아왔는지,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세상을 이루고자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결국 그 모든 것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대장정(大長征)이었음을, 그리고 이제 서서히 그 실현의 역사 속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밝히는 책이다.



  • 지은이 : 이창일
  • 발행일 :    2018년 5월 10일
  • 가  격 :    15,000원
  • 페이지 :   336쪽(두께 16mm)
  • 제  책 :    무선
  • 판  형 :    152mm ✕ 225mm (신국판)
  • ISBN : 979-11-88765-12-6 (93910)

■ 출판사 서평

이 땅에서 전개된 ‘민중과 대동’의 역사

한반도는 이 세계를 어디로 이끄는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평화적인 촛불혁명과 정권교체, 그리고 만 1년도 되기 전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과, 그것을 계기로 한반도로 집중되는 중/미/러/일을 비롯한 세계열강들의 이목과 왕래는 일찍이 우리 역사에서 있어 본 적이 없던 “한반도 중심”의 세계사 전개의 한 단면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청일전쟁(1894)이나 6.25전쟁(1950) 같은 ‘국제전쟁’이나 올림픽(1988/2018)과 월드컵(2002) 정도가 세계인의 이목을 한반도로 집중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전자는 ‘비극적 불가항력’으로서 귀감으로 삼을 수 없는 바요, 후자는 그 영향이 다방면에 파급된다 하더라도 한반도 ‘고유’ ‘자생’ ‘자주’의 것이라 할 수 없을뿐더러, 최근 한반도 평화무드에 평창올림픽이 역할을 하는 것처럼 종속적인 의미만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므로, 최근의 정세 변화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남과 북, 중미/러일 사이[間]의 일거수일투족은 그 자체로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이며, 무엇보다도 한반도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의 새로운 단계/차원[新紀元]을 열어나가는 ‘역사적인 사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문재인 정부가 표방한 ‘한반도 운전자론’이 성취되어 가는 놀라운 장면이며, 장기적으로는 지난 수백 년간 이 땅의 민중들이 끊임없이 추구해 온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의 진면목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사태를 좋고 보면 ‘한반도 운전자론’은 ‘한반도의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뜻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남북)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운전자가 되겠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현실 적합해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한반도(남북)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간다면, 최소한 그동안 세계 질서의 하위구조로서만 작동해 오던 한반도가, 세계 신(新)질서 구축의 실질적인 일원이 된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운전자는 이 세계를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위민과 여민, 그리고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인수위원회’도 없이 내몰리듯 청와대로 들어가자마자 ‘어쩌면’ 처음으로 한 일은 대통령 참모들이 근무하는 공간의 이름을 ‘위민관(爲民觀)’에서 ‘여민관(與民觀)’으로 바꾸었다. 혹자는 그것이 노무현 정부 때의 명칭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흘겨보았으나, 그것은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바 정치의 본질, 나아가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오해를 무릅쓰고서라도 양보할 수 없는 ‘거사(擧事)’였다는 것이 더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위민’이든 ‘여민’이든 그 용어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쓰여 오던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위민’사상이 ‘여민’사상을 압도한 채 진행되어 온 것이 인류(동아시아) 역사의 전개 과정이었다. (‘爲民’이란 ‘백성을 위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爲] 다스리다’라는 군주 중심의 정치를 대변하는 말이다.)

위민과 여민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래된 미래의 대답’이 있다. 바로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세상)’이라는 말이다. ‘백성(民)이 주인 되는 나라’를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민주주의-선거에 의한 정부 구성’라는 제도로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차원에서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란 피상적인 ‘주권재민’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 천부인권의 사회적 구현, 양극화의 극복, 환경민주주의의 실현과 같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말이다. 또한 한 나라의 정체(政體)가 이미 자기 자신만의 힘과 노력과 바람만으로 고립/완결되지 않는 세계화 시대에 이는 곧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世界]’의 지향과 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여민정치란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세상)의 정치를 일컫는 본래 이름이다.

이러한 나라(세상)를 향한 지향(실천)과 비전(꿈)은 일찍이 정여립에 의해 ‘대동사상’이 적극적으로 표방되던 것이 1598년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소한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것이다. (또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한정하더라도 한반도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은, 오직 서구에서 유입된 것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것이 아니라, 민유방본(民有邦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 전통 속에도 이미 내재해 있던 사상과 체제로부터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대동사상’이 동아시아 사상의 시원으로 삼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 사상이 주자에 의해 재편집되기 전의 본래 모습으로서의 정수라고 본다. “주자학-성리학-예치(禮治)의 소강(小康)사회”가 ‘전통사회’의 정치이념에서 이상사회론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야말로 현실 역사의 퇴행이라는 것이다. 소강사회는 신분제와 권력 세습을 기반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최고 이념으로 본다면, 대동사회는 탈신분제와 선양 내지 관작(官爵)의 선출제 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서 오히려 근대사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전개되어 온 민(民)의 변란과 그 최종 결실로서의 동학의 개벽사상, 동학농민혁명의 지향은 이러한 ‘대동세상’ 지향의 시대적 변천 과정이라는 것이 이 책, 󰡔민중과 대동󰡕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민들[民衆]’이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대원칙을 쟁취하기까지 품었던 생각[思想], 특히 조선시대의 민중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민중사상의 연원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의 관점에서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오랫동안 지배계층이 자기 지배 권력을 강화하는 근거로 삼아왔던 제 사상들이 실은 민중(주인)사상의 근거로 주어졌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이 그러하고, 불교의 이상사회(미륵하생) 지향도 그러하며, 유학중심의 세계에서 잡합(雜學)으로 천시되어 왔던 여러 실용적인 자연학(自然學) 들이 모두 이 세계의 실상(實相)을 기반으로 일하는 민들[民衆]이 이 세계의 주인임을 뒷받침하는 사상들이다.

반면에 실제 역사에서 수천 년 동안 ‘억눌림’의 대상이 되어 왔던 민중들은 거듭 쌓인 울분을 산발적인 민란과 반란으로 표출해 오다가, ‘정감록’ 등의 도움을 받아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조차, 그리고 심지어 태평성대라고 일컬어지는 ’세종연간‘에서조차 이러한 민중들의 혁명 시도는 단 한 시기도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막바지에 이르러 민중(주인)사상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 바, 그것이 ‘혁명에서 개벽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의 ‘혁명(반란)의 실패를 한꺼번에 만회하는 데서 나아가, 민들[民衆]의 의식적 각성(覺性), 즉 사람이 한울님(고귀함)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내면화를 통해 멀리 공맹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을 지향하는 데에부터 가까이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자임(自任)하는 데까지 두루 확장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왕조타도’ 운동이 아닌 까닭은 이제 ‘조선왕조’는 ‘이씨왕조’이거나 ‘양반유생’의 왕조가 아니라, 민들[民衆]이지지[支撑]하여 후천개벽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매개로 삼는 국민국가(國民國家)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민 스스로의 각성(覺性)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1894-2018, 우리가 걸어온 역사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전사(前史)를 배경으로, 한반도에서의 지난 120년의 역사는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해 내달려온 인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런 점에 오늘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한반도 역사의 의의가 있다.

그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 한반도의 원주민들은 수십만, 수백만의 죽음/학살과 그만큼의 이산가족 등의 지옥/ 혹은 식민치하와 독재체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고 인간의 존엄성, 인격의 잠재적 가능성을 훼손당하는 고통의 시간를 견디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내력은 한반도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지평에서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아, 남아메리카, 근동(아랍)지역에 이르기까지 그 직접적인 발발(勃發)의 원인이나 행태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 대동소이한 길을 걸어,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 단지 정치적으로서만이 아니라, 경제, 사상, 문화, 인권 등의 제 방면에서 인간[生命]의 가치가 존중되고 실현되는 세상을 향한 걸음을 걸어온 역사이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을 배경으로 지난 120년간의 한반도 역사를 되짚어 보면,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전쟁, 3.1운동과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분단저지운동과 4.19혁명, 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2000년대의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민들[民衆]이 자기 운명의 참된 주인이 되고, 민족 혹은 국가가 자주적인 자기 운명의 결정권자가 되어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는 세상을 향한 길을 개척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과 그 두 사건을 전후로 활발하게 전개되는 남북중미러일 및 그 밖의 나라들의 활활발발(活活發發)한 교류와 협력, 견제와 균형 추구 등의 움직임은 세계사적인 지평을 갖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남북 정상회담의 사례를 보고, 세계 화약고 중의 하나인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화해 모색을 추진한다는 외신이 한반도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변’의 앞으로의 파장의 일단을 짐작케 해 준다.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을 지탱하는 ‘민중사상’, 특히 그 최종 결실로서의 동학은 ‘민중만이 주인되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 [심지어는 ‘人間’이라는 一個 種이] 이 세계(지구)를 사유화하는 것을 반대하고, 공(公共)하는 세계, 다시 말해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전개된 ‘민중과 대동’의 역사이다.

■ 책 속으로




민중이 요구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부당한 착취와 억압, 굴종이 없는 세상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주권재민의 이상이 명분으로나마 실현된 오늘의 시대에 이르기 전인 조선시대에 전개된 민중사상을 탐구하려고 한다. 민중은 누구이며, 그들이 속한 사회는 어떤 사회였는지, 그들은 무엇을 원하였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얼마만큼 성취하고 좌절하였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민중의 역사적 노력과 이에 대한 생각, 기록과 흔적, 평가를 살펴본다. <12~13쪽>


우리의 역사가 근대화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근대화 자체는 서구나 외세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생각, 구체적으로 근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지속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구로부터의 영향 이상으로 내부로부터 민중들의 사상과 실천이라는 지속적인 압력과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성취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근대화라는 역사적 경험은 서구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더욱 본질적인 계기와 동력은 내부의 요건 즉 민중사상의 적극적인 역사적 개입이라고 보는 것이다. <37~38쪽>


대동사상의 복지론은 맹자에 이어져서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인심이 좋아지게 하여 도덕생활을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취지에서 양민론(養民論)이 주창된다. 민중을 부자로 만든다는 부민론(富民論)의 전제로서 맹자는 먼저 백성과 치자의 욕망을, 위정자와 백성이 함께 풍요를 즐기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논리로 해방한다. 이러한 양민의 근본 원리는 소강사회의 예치가 아니라, 대동의 무위이다. 즉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시키지 않고, 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59쪽>


정치사상적으로 보았을 때, 천주교가 민중사상에 끼친 영향중에 중요한 것은 소중화(小中華)에 머문 조선의 인식을 깨트린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중심은 중화(中華)뿐 아니라 다른 중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종말론적 세계에 대한 교설은 『정감록』과 같은 변혁운동의 사상적 동력이 되어 준 민중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를 접한 뒤에 『정감록』은 마치 미륵불교를 접한 뒤에 미륵불교의 사상을 흡수한 것처럼, 천국(天國)의 도래에 앞서서 지상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학설을 흡수했다. 말세에는 괴질(怪疾)과 전쟁이 지상을 휩쓸 것이며, 이러한 심판 뒤에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내용이다. <86쪽>


민중의 지도자는 군국체와 사대부국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림의 자리에 민중이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율곡의 사상은 민중사상의 연원이 되지만, 그것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조선 역사에서 소강이라는 차선의 사회개혁을 말하는 이는, 비록 성리학으로 해석된 대동일지라도 대동을 전면에 내세워 논의한 율곡이 유일했다. 그리고 (조선 성리학의 틀 안에서의) 대동의 논의는 이로써 종언을 고한다. <115-116쪽>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정여립의 사상은 대동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유가의 급진적이며 이상적인 정치사상으로써, 대동과 소강의 두 사상적 패러다임이 혼합되어 있는 공맹사상의 성격과 소강의 패러다임이 부각되는 후대의 사상사적 경향으로 인해서 은닉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정여립은 유가의 이상사회론을 재발견하여, 대동사회가 지향하는 선양제에 기초한 권력 구도, 군주세습제 비판, 신분제 타파 등을 구현한 대동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이며, 체제전복적인 불온한 사상이었다. (중략) (정여립의) 대동사상의 제기는 혼란한 시대상을 개혁하려는 당대 율곡과 같은 인식에서 시작된 것이나, 율곡의 성리학적 해석을 거친 보수적인 형식이 아니라, 공맹의 이상주의적 정치사상을 재해석한 급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30-131쪽>


허균은 민중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구분한다. 호민은 『수호지』의 양산박(梁山泊)이나 『홍길동전』의 활빈당에서처럼 기존 체제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호걸(豪傑)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수의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고, 실력으로 기존 왕조를 부수고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반역자’들이다. (141쪽) 허균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허균이 만든 이상사회인 율도국은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관권의 압제, 부정부패, 빈곤과 차별이 없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는 소강의 최대치에 해당하는 사회였다. <143쪽>


정조의 개혁 정책은 왕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 이른바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천하는 본래 공물(公物)이지만, 세도정치란 천하가 ‘사물(私物)’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물이 된 천하에서 공적인 정책은 기대할 수 없다. 과거제도는 사적 집단에 편입하는 수단이 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매관매직을 위해 세도가들의 문지방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이러한 관료들은 벌열(閥閱)을 이루고, 부세(賦稅)와 요역(徭役)의 대상인 민중을 마소처럼 부렸다. 민중은 오래전부터 마소처럼 단지 생산과 사역(使役)을 위한 대상으로만 취급을 받아왔으나, 이 시기만큼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고통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국가의 사유화는 각지에서 호민들이 작당하게 만들었고, 유래가 없을 정도로 한 세기 내내 민중의 난이 일어나는 이른바 ‘민란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811년 관서지방의 홍경래(洪景來)란, 1862년의 경술(庚戌)민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이어졌다. <247쪽>


이러한 민란에서 주목되는 것이 민회이다. 기존 향회가 지방의 사족이나 수령의 이해 중심으로 운영된 반면, 민회는 몰락양반과 관직을 지낸 사족, 그리고 요호부민(饒戶富民,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부농층)과 양·천민들을 포괄하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기구로 기능하면서 저항조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민회는 민중들의 의사 결정 과정에 의해서 구성되고 움직인 것이라면, 이는 문자든 구전이든 『정감록』의 학습을 포함해서, 더욱 중요하게는 기초적 유가의 학습, 즉 ‘성인이 이미 수천 년 전에 말한 민본(民本)을 너희들은 왜 지키지 않는가?’라는 본원적인 의문의 해답을 구하면서, 민중이 각성된 것이라 보여진다. <254-255쪽>


그(이필제)는 단순히 명화적도 아니고,『 정감록』에 미친 광인도 아니며 폭력을 일삼는 ‘직업적 봉기꾼’이라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가이다. 이씨 왕조의 성(姓)을 혁파하고, 새로운 명으로 갈아야 한다는 혁명 이념에 충실한 자였다. <261쪽>


이필제가 죽고 나자 이제 역성혁명이 아닌, 더욱더 근본적인 혁명, 즉, 개벽(開闢)의 사상이 도래했다. 이는『 정감록』에서 유구하게 흐르고 있던 역성혁명의 사상이 새로운 물줄기를 타고 커다란 민중의 본류(本流)로 흘러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필제는 최후의 역성혁명론자였고, 이제 민중은 혁명을 넘어선 개벽을 원하고 있었다. <262쪽>


수운의 개벽은 선천개벽이 아니라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자연이나 인류 문명 전체가 대전환을 하는 시기이며, 후천은 선천과 달리 음이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에 투쟁보다는 평화의 시대가 된다는, 소강절과 전혀 다른 이론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역학의 일반적인 관점은 양은 군자이고 소인이 음이듯이 양을 우위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벽론은 최수운 이후 더 보강되면서 개발된 논리이다. (265쪽) 그래서 다시개벽은 실제 후천개벽이며 ‘궁궁’이고 무극의 대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의 극을 세운 모든 가치들은 ‘극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극을 포섭하는’ 무극의 대도로 통합된다. <272쪽>


개벽(開闢)은 예전부터 전개되어 온 민중사상의 성격이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기존 민중사상의 연원들이 착종되어 형성된 성격, 즉 왕조전복론과 진인도래론, 그리고 여기에 부속된 도참론 등에 깔린 원한 서린 적대감이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어, 이전 지배층의 논리로 봉사했던 공맹의 도와 대동의 도가 왜곡이나 은폐 없이 민중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적용되었다. 말하자면 민중들이 의식화가 되자, 본래부터 성인의 말씀에는 생민(生民) 전체에 대한 존중과 천하를 공물로 생각하는 공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특정 집단에 의해서 사유화된 성인의 말씀을 다시 공의로 되돌리는 일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려는 각성된 의지가 생겨났다. 이로부터 과거 특정 집단의 사유화 속에서 주장되었던 이념들이 민중의 각성 속에서 새로운 문명중심주의(신중화주의)와 신존왕주의를 토대로 한 민중의 사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민중혁명으로 승화되고 내부로부터의 근대화의 동력이 되어 대한제국을 탄생시킨 힘이 되었다. 곧 한국 최초의 근대국가가 생겨난 것이다. <279쪽>


세계사의 조류에 참여하는 시대를 맞이해, 민중에게 착취와 억압을 자행했던 기존 문명의 조건을 단지 혐오로만 일관하지 않고, 내 문명의 가치를 세계 중심의 가치로 선양(宣揚)하는 ‘조선중화의식’이 생겨났다. 여기에 시대적 사명을 척왜(斥倭)와 척양(斥洋)으로 파악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주, 민중의 안위와 안락 즉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성취하는 주체가 귀족 지배층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는 비록 역술(易術)에 기반을 둔 인식이지만, 당시의 우주론적 사변의 웅장한 결론, 즉 새로운 시대의 우주론적 도래를 전망하는 후천(後天)개벽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사상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국가가 수립될 수 있게 만들어준 커다란 내적 자산으로 작용하게 된다. 서구의 근대사상이 이 땅에 도입되면서, 그것을 안정적으로 확산하고 구축하기 위한 내적 자산, 즉 안정된 격의의 구조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중사상이 먼저 토대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외래의 새로운 사상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289쪽>

■ 차례

1장 민중의 개념

1. 고전의 민(民) 개념
2. 초기 유가의 민(民) 이해
3. 민중과 근대화

2장 민중사상의 연원

1. 대동(大同)의 세상과 공맹(孔孟)의 사상
2. 자연주의사상과 미륵불교사상

3장 왕과 사대부의 나라

1. 조선의 국체(國體)와 성리학
2. 개혁과 변혁의 사상
3. 비판적 지식인들의 민중론

4장 민중사상과 민란의 전개

1. 조선전기(태조~성종) : 군도(群盜)의 활동
2. 조선중기(연산군~정조) : 민중사상의 착종과 변란(變亂)
3. 조선후기(순조~순종) : 혁명(革命)에서 개벽(開闢)으로

나가며 : 민중사상, 공(公)의 보루(堡壘)



■ 저자 소개

이창일_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박사(「소강절의 선천역학과 상관적 사유」, 2005), 서울불교대학교 상담심리학 박사(「성격유형론 연구-까르마에토스(KarmaEthos)」, 2013).『천명도설(天命圖說), 성리학의 우주론과 인간론』(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공저), 『심리학의 도(道)』(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공역), 『주역점쾌』(연암서가, 2016), 『자연의 해석과 정신』(연암서가, 2015, 번역), 『<심경(心經)>철학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공저), 『주역, 인간의 법칙』(위즈덤하우스, 2011) 등 저역서가 있다.
관심 주제는 동아시아 자연학과 인간학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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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