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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民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15. 13:48

근대와 民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

■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민(民)의 지향을 공감해석학으로 독해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가 지식인 중심의 위로부터의, 식민시기 타율적 근대화가 아니라, 동학사상에서 완성을 본 인간존중과 신분해방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민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근대화라는 점을 밝힌다.



  • 지은이 : 이영재
  • 발행일 :    2018년 5월 10일
  • 가  격 :    15,000원
  • 페이지 :   312쪽(두께 15mm)
  • 제  책 :    무선
  • 판  형 :    152mm ✕ 225mm (신국판)
  • ISBN : 979-11-88765-13-3 (93910)

■ 출판사 서평

1. ‘우리가 만난 기적’

돌이켜보면, 오늘의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 역사적인 대장정의 직접적인 출발지는 팽목항을 그대로 옮겨온, ‘광화문 광장’이다. 그리고 그 광장을 만들어 간 촛불시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 부르던 노래는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이 노래는 세월호 참사를 접하고 울부짖던, “이게 나라냐?”라는 자성(自省)과 분노(忿怒)과 뒤섞인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새삼스럽게 발견’된 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실로 이 말을 수호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수 백 만의 사람들은 차디찬 거리에서, 수 천 만의 국민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오매불망하며 “거짓을 내치며 진실을 밝히는 길”을 내달려온 결과로 오늘 우리는 밝고 맑고 아름다운 한반도 역사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2. 아래로부터 만든 우리의 민주공화국 형성사

여기서 첫 번째 질문. 우리의 헌법 제1조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조항은 언제 어디서부터 우리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였을까? 1차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이 절대 명제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부터 비롯된다.

두 번째 질문. 뜻있는 사람들은 한민족의 역사 이래로 대부분 ‘왕정국가’였던 한반도에서 어떻게 국권 상실 10년 만에, ‘공화’와 ‘민주’ 이념/개념이 헌법(헌장) 제1조를 차지하게 되는가를 묻는다. 지금까지는 민주·공화 개념이 외부로부터 이식되었다는 입장이 주된 견해였다. 이에 따르면, 민주공화정은 우리의 내적인 정치적 전통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서구 개념의 이식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이미 오래전부터 한민족 인민들이 민주와 공화 개념에 충분히 노출되어 있었기에, 3.1운동의 성과를 계승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이를 <대한민국임시헌장>에 반영할 수 있었고, 다시 그로부터 100년이 흘러오는 우여곡절의 한국 현대사에서도, 그 조항만큼은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민주(民主)’·‘공화(共和)라는 기표 자체는 외부로부터 수용한 것일 수 있지만, 우리 내부에 그에 관한 사상적 토대가 배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헌법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3. 한국 근대화를 이끈 사상적 동력은 민의 사상이다

세 번째 질문. 그 ‘사상적 토대’란 무엇인가? 『근대와 民-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만든 민주공화국』(이영재 지음)에서는 그 사상적 토대가 인간존중과 신분해방사상이라고 밝힌다.

이영재는 한국 근대화의 동력은 19세기 중엽 성립된 동학사상이 실천 지침으로 강조하고 있는 인간존중과 신분해방사상으로서, 그것은 19세기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민의 공감대를 반영하여 근대적 신분해방의 임계점에 육박해 간 사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 동학사상은 최소한 조선 왕조 내내 아래-민(民)들의 끊임없는 저항과 모색 가운데서 형성된 경험과 실천을 계승하고 심화 발전시켜 마침내 서구적인 의미의 인간평등이라는 기준을 초월하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절정의 이념으로 승화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네 번째 질문.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언제 시작되었고, 근대화를 이끈 주체는 누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한편에서는 독립협회를 주축으로 한 개화파 지식인이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한제국기 고종의 광무개혁으로 근대가 개시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의 강점은 잘못되었지만, 식민시기에 근대화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렇듯 한국 근대화에 대한 견해가 천차만별인 것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근대사에 각인된, 일제강점에 따른 폐습과 식민사관의 잔재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와 民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은 기존 견해들과 달리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한 주체가 민(民)이고, 우리 근대화의 특성을 지식인 중심의 근대화나 위로부터의 근대화, 식민시기의 타율적 근대화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라고 제안한다.

4. 촛불혁명과 남북 평화협정의 체결은 민(民)의 자기 실현 과정

최근의 ‘촛불혁명’에서 광화문 광장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사에서 ‘민’이 스스로를 ‘통치 대상’으로부터 역사의 주인으로 자기 정체성의 혁명을 진척시킨 곳도 ‘역사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아직도 ‘민란’이라고, 때로는 ‘반란’이라고 부르는, 조선 왕조 시대 내내  진행되었던 사건들은 그때 그때 민들이 자기의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는 한편으로 동양의 전통에서 보더라도 수천 년의 내력을 가진 ‘민유방본’ 내지 ‘대동사상’의 현실화를 위해 요구하고, 투쟁하고, 때로는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그 현장은 ‘민’의 학습의 현장이었다.

그 속에서 ‘민본’ 의식은 진화를 거듭하였다. 애초에는 통치 집단이 통치를 정당화하는 레토릭에 불과했던 ‘민본’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민회(民會)’라는, 아래로부터의 의사 관철 기구로 구체화되었다. 그 무렵 임금 스스로 실제 신천/실현의 목표로서의 ‘민국(民國)’과 ‘민본(民本)’을 표방하기에까지 이른다. 이런 임금은 이제 ‘타도’나 ‘전복’의 대상이 아니라 ‘존왕(尊王)’의 대상이 되어, 민(民)들은 무능부패하고 탐욕이기하는 양반 지배층을 배제/우회하여 ‘존왕’의 주역임을 자임하고 나아가 ‘공화’를 지향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전쟁)의 내면의 흐름이다.

우리 역사를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의 의미와 근거(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좀 더 뚜렷이 알 수 있고, 또한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촛불혁명의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는 120여 년 전 동학농민들이 내세웠던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현대적 계승이며, 다시 말해서 그 구호는 이미 선취(先取)된 가치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한반도 차원의 공화국의 실현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한정되지 않고, 남과 북의 ‘통일’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최근의 종전선언 추진, 평화협정 전망의 정세변화는 감격적인 데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100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지향해 왔던 ‘민유방본의 대동세상’을 향해 가는 ‘오래된 혁명’의 노래이다.

5. 한반도 운전자론의 혁명적 의의 재고

한반도의 원주민(한민족)이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이룩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의 이 사변이 전개되기 전에 그것은 주변 4대 강국 중 어느 나라도 ‘진정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는 것이 그동안 우리들의 상식이었다. 물론 통일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 장벽, 특히 극심한 남남갈등의 장벽 속에서 극단적인 ‘신(新)북진통일–체제통일’을 부르짖는 극우 보수세력의 존재도 통일의 걸림돌로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존재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우리’ 내부의 일로서, 우리가 좌우할 문제이다.

그러나 4대강국의 입장은 단순히 남북이 분단되던 때로 돌아가서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또한 대부분 우리 손을 벗어난, ‘자기들의 입장’에 따른 문제로서 우리의 노력이 미치는 데 한계가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 어려움의 크기가 전자에 비견할 수준이 아니었다. 4대 강국이 한반도 통일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한반도 내의 남과 북 두 정권을 ‘취급’하는 관점은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동북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역학관계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한반도 운전자론’의 성취과정을 보면, 어쩌면 이것은 그동안 그 어떤 통일론에서도 ‘가능태로서는 상상되지 못했던’ 방식과 속도로 진척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북한 정권이 일본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대하 소위 ‘합의’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정의로운 한일관계의 빚까지 통쾌하게 갚아 나가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일본에게 원수를 갚는 식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지정학적인’ 처지를 ‘불리하고, 부정적으로만 실현시켜 온’ 한반도의 위정자와 백성(한민족)들이 비로소 자주 독립된 국가[남과 북]로서의 위상을 되찾아 가고 있으며, 실천적으로 실현해 가고 있는 증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6. 한반도의 민주공화국 – 오래된 미래의 역사

『근대와 民-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의 내용에 담긴 담론들, 즉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근대화론과 자생적인 ‘민주공화국’ 지향 등의 이론은 천지돌출로 하루아침에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2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적지 않은 학자들이 철옹성 같던 식민사관을 하나씩 허물어뜨리며 진전해온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성과물이 이렇게 ‘민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제자리를 찾아나가는 이 시대에 빛을 보게 된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닐 듯하다. 그만큼, 현재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사변들은 단지 ‘최순실-박근혜’와 같은 돌연변이적 위정자의 실정(失政)에 따른 반사 이익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연원(淵源)을 갖고 있는 운동의 한 결실임이 분명하다. 바로 그러므로, 한반도의 근대사는 지금부터 새롭게, 처음으로 정당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다만, 그 미래는 이 땅의 ‘민’들이 이미 오래전에 성취하였던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 책 속으로


1.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민주공화국
1919년 3·1운동으로 분출한 전 국민의 독립 열망을 동력으로 삼아 국외 망명지인 상해에 세운 임시정부가 4월 발표한 「임시헌장」은 한반도에서 분투하던 국민들의 열망을 응축한 정치적 지향을 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임시헌장」에서 천명한 ‘민주공화국’의 정치적 지향은 최소한 우리 국민들에게 생경하거나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최소한 1919년 이전부터 민주와 공화의 원리가 민의 영역에서 경험되고, 체득되었기에 「임시헌장」에 ‘민주공화국’을 명문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6쪽>


2. 공감적 해석학
한국 근대화를 추동한 ‘민’의 사상과 역할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시대사와 사상사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연구 방법론이 필요하다. (중략) 최근 이러한 공감적 사료 독해의 관점을 바탕으로 실증주의적 역사연구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역사 방법론이 ‘공감적 해석학’이라는 틀로 정식화되었다. <15쪽>


3. 근대화와 민(民)과 민국(民國)
‘민’을 한국 근대화를 추동한 주체로 상정하는 것은 사료상의 제약, 역사연구의 편향적 관점 등으로 인해 기존 역사학이나 정치사 연구 맥락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중략) 한국의 근대화가 내재적 근대화 경로를 따라 진행된 것인지, 식민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근대화가 시작된 것인지에 대한 입장 차이, 즉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24-25쪽) (중략) 18세기 민의 성장은 기존의 정치적 지배 질서로는 담아 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흐름이었고, 민의 실체적 성장에 대한 지배질서의 호응이 민국정체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30쪽>


4. 실학의 재평가 – 실학은 근대화의 전조(前兆)가 아니다
최근 실학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 사상으로 군림해 온 실학에 대한 비판적·회의적 평가가 부쩍 많아진 것이다. (중략) 첫째, 실학은 성리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학문이 아니라 제도개혁과 실용성을 추구한 일종의 ‘실용적 성리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실학이 곧 근대화를 추동한 동력이라는 기존 견해와 달리 근대화의 특성으로 실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41-42쪽>


5. 민중 사학, 그리고 내재적 발전론
민중사학은 (중략) 어나 민이 역사발전의 주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민중사학은 그동안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던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함으로써 민중 주체성과 민중 지향성을 제기하였으며, 역사를 민중의 자기 해방 과정으로 인식함으로써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강한 신념을 나타냈다. 무엇보다도 역사학의 존재 이유 혹은 역사가의 임무를 ‘민중해방에 기여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학문의 실천성’을 역설했다는 점에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58쪽>


6. 식민지 근대화론
일제가 열등적·패배적 역사관으로 정립해 놓은 식민사학의 핵심은 ‘당파성론’, ‘타율성론’, ‘정체성론’ 등이다. (중략) 그런 가운데 (식민지 치하에서의 근대화가 진행되기 이전에) 한국역사가 내재적으로 근대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 경향을 통칭 내재적 발전론, 또는 ... 수탈론이라고 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사회가 식민지화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근대적 생산관계를 만들었으며, 이 근대적 생산관계들이 자리 잡기 전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식민지화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일제강점체제 하의 민족차별과 수탈로 자생적 이행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자율적 문명화가 압살된 것으로 파악한다. <59-60쪽>


7. 국가와 민의 관계, 민국, 민본주의
탕평군주(영정조)에 의해 주창된 ‘민국’ 정체(政體) 시기 ‘민본주의’는 이전의 수사적 도구로 활용된 ‘민본주의’와 질적으로 다른 실체를 갖는 것이었다. (중략) 19세기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면서 (중략) 군주의 영향력을 사적으로 대체한 세도 가문의 ‘반동정체’가 개시되면서 ‘민’은 18세기 민국 정체에서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공공성의 담지자로 ... 부상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에서 주창된 척왜양, 보국안민의 기치는 반동정체가 국가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 공공성의 비상상황에서 기왕의 ‘민본’, ‘민국’ 사상을 재전유하여 조선의 국가공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민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공공성 창출 노력이라고 평할 수 있다. <80-81쪽>


8. 민, 민본론, 민유방본
조선초기 ‘민’은 명확하게 농민이나 피지배층을 지칭하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첫째, 유교적 민본론에 기초하여 왕을 포함한 광의의 민으로 쓰인 경우 (중략) 둘째, 왕을 제외한 일국의 모든 백성 또는 수령방백이 다스리는 특정지역 내의 모든 지방백성을 지칭하는 말 (중략) 셋째, (중략) 조선시대 민본적 공공성을 강조할 때에는 민이 특정하게 피통치자 계층으로 지칭되었다. <90쪽>


9. 민국(民國)의 이념
‘민국’ 이념이 제기되는 18세기에 이르면, (중략) ‘민’이 ... 정치권력이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18세기는 “군주가 사·서의 구분보다, 동포니 동류니 대동이니 ‘균’을 내세우면서 백성에게 좀 더 다가가려” 한 시기이다. 조선초기의 적자, 보민 단계와 비교하여 보면, 민의 지위가 격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95쪽>


10. 민의 사상, 대동사상과 개벽사상
조선시대 민의 결사체 영역을 관통한 이념의 정수가 바로 이 대동사상, 개벽사상의 해방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114쪽>


11. 민의 영역의 사회구조 변화
18세기를 전후해서는 ‘민’의 삶의 영역인 향촌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는 이제까지 단순한 보호의 대상, 지배의 대상으로만 여겨져 온 민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공론 구조를 창출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중략)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향촌사회는 기존 재지사림의 신분적 변화와 더불어 자발적 결사체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체도 ‘민’ 일반으로 넓어지는 구조적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 군주 입장에서 민국이념으로 호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민압(民壓)으로 작용했다. 이 민압의 이면에는 여전히 천하가 하늘과 백성의 공유물이므로 백성이 현능자들 중에서 군주와 관리를 뽑아 써야 한다는 정여립 이래의 역성혁명적 정씨왕조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2-123쪽>


12. 문해인민의 등장
18세기 신분적 변동의 토대 위에서 문해인민(文解人民, literate people)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양반사족들이 그들의 문자인 한문을 통해 의사소통과 의견 개진을 하면서 그들의 ‘역사’를 써 나갔다면, 문해인민들은 언문을 통하여 자신들의 현실을 돌아보고 독자적인 형상들을 만들어 갔다. <130쪽>


13. 민회 이야기
19세기 중반부터 소민들의 위력시위와 민란이 일상화되자, ‘민회’는 이 시위·민란 과정에서 향회를 제치고 확산되었다. (중략) 요컨대 마을의 대·소민이 참여할 수 있는 리회·면회의 존재는 면리가 여론을 형성하는 단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소민들의 사회적·경제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회는 수백, 수천, 때로는 수만의 백성들이 한 마당에 집결해 정부에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요구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민의 대표적 ‘참정·의결’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135-136쪽>


14. 민회와 동학
동학농민혁명 이전의 가장 대표적인 ‘민회’는 1893년 3월 10일 교조신원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위해 동학교도 2만여 명이 참여한 보은집회일 것이다. (중략)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아예 민회 또는 민회소라는 명칭과 모임형태가 일반화되었고, 1894년 6월 11일 전주화약(全州和約) 후에 조선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관민공치기구인 집강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민회’라는 말은 더욱 일반화되었고, 1897-1898년에는 심지어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도 종종 스스로를 민회라고 지칭했다. <137쪽>


15. 대동사상과 동학사상
조선의 유학적 전통 안으로부터 근대적 지평을 연 동력을 꼽으라면, 단연 대동사상일 것이다. 대동세상의 요체는 천하와 나라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기(公器)라는 것이다. (중략)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대동사회란 사회복지·완전고용·평화안전이 완전하게 보장되는 사회일 것이다. 또한 대동세상은 제 부모, 제 자식을 먼저 챙기지만 제 부모, 제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는 범애(汎愛)·범인(汎仁)의 세상을 이상세계로 삼았다. (141-142쪽) 동학사상이 동시대의 개화사상이나 위정척사사상과 달리 절대 다수의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 인간존중에 기초한 보편적 평등, 즉 대동-해방의 희구라는 민의 지향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44쪽>


16. 해월의 동학사상과 인간존중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 와서 (중략) 동학사상의 실천 지침으로 수차례 강조된 보편적 인간존중·평등사상은 결코 공허한 외침이 아니었다. 19세기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민의 공감대를 충분히 반영한 것이었다.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은 근대적 신분해방의 임계점에 육박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어떤 형태로든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6-148쪽>


17. 성리학의 민유방본론, 민귀군경론, 칙군자치론
성리학자든 실학자든 조선의 사대부들은 ‘민유방본론’과 ‘민귀군경론’이 ‘백성자치론’으로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략)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민의 실체적 성장과 더불어 ‘백성의 나라’로서의 ‘민국’ 이념은 ‘민유방본론’·‘민귀군경론’과 ‘칙군자치론’의 결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잉태되어 나왔다. 이것은 ‘민국’이라는 술어가 관민(官民) 양측에서 점차 일반화되어 정착한 역사적 사실로도 입증되는 것이다. <150쪽>


18. 18세기, 민의 성장, 민-중심 사상, 동학사상의 대두
18세기 향촌의 변화와 신분질서의 균열, 민의 성장과 이에 대한 민국정체의 등장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1801년 정조의 유훈을 받은 순조의 공노비 해방부터 민국이념의 계승을 표방한 고종이 1882·1883년 ‘신분혁파령’과 1886년 ‘노비해방령’을 반포한 19세기는 조선에서 신분해방이 제도적으로 관철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략) 1860년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고, 보편적 인간존중·평등 원리에 입각한 ‘시천주(侍天主)’를 설파한 이래, 1865년 해월의 인내천 설법의 전개와 더불어 동학도들이 가파른 속도로 늘어갔다. (중략) 근대를 향한 신분제적 균열의 경험이 18세기 조선의 생활세계에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학의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민의 공감대 속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다. <155쪽>


19. 경복궁 무력침공은 갑오왜란이다!!
경복궁 무력침공은 청일전쟁의 부수적 사건이 아니다. 일본의 궁극적 전략목표는 군사정복과 이를 통한 ‘조선의 보호국화’이자 ‘조선정복전쟁’인 것이다. 정작 청일전쟁은 이 조선정복전쟁으로서의 ‘갑오왜란’을 위해 부수적으로 필요한 지류(支流)의 전쟁일 뿐이었다. 따라서 ‘경복궁 무력침공’은 ‘갑오왜란’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왕후, 전봉준, 의병장 등을 포함한 당시 조선인들의 사태인식, 범궐작전계획서의 발굴, 최근의 새로운 국내외 논의 등을 근거로 우리는 6월 26일 서울점령과 7월 23일 경복궁 침공, 그리고 이후 이어진, 전국 각 지방에 대한 왜군의 일련의 무력점령 활동을 ‘전쟁’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이 제안하듯이 ‘조선전쟁’이니, ‘조일전쟁’이니, ‘한일전쟁’이니 부르는 것은 국제법적 침략범죄성을 불분명하게 호도하는 측면이 있는 명칭이기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란이라는 뜻에서 이 전쟁은―‘임진왜란’에 빗대어―‘갑오왜란’으로 불려야 한다. <222쪽>


20. 동학농민혁명 – 갑오왜란 / 청일전쟁이 아니라 조일전쟁
척왜양(斥倭洋)·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광제창생(廣濟蒼生)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군이 충군애국사상을 바탕으로 ‘척왜양’의 단일 기치를 천명하자, 조선점령전쟁을 일으킨 일본으로서는 동학농민군을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했고, ‘섬멸’ 작전을 전개했다. (중략) 1894년에 막이 오른 갑오척왜전쟁은 이렇게 처절한 결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의병전쟁·독립전쟁으로 계속되어, 고려시대의 항몽전쟁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51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처절한 전쟁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영웅적 전쟁이었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보건대 충군애국사상을 바탕으로 ‘척왜양’의 기치로 기포한 동학농민혁명을 공화제가 아닌 왕정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봉건적 복고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긴박성과 급선무를 도외시한 편향적 해석이자 일종의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223-224쪽>


21. 동학과 일군만민사상 – 근대화의 정치 동력
동학농민군의 충군애국사상을 단순히 왕정을 주장했다는 것으로 평가하면 곤란하다. (중략) 일군만민사상으로 표상되는 이 충군애국사상은 동학 창도의 사상적 지향과 무관치 않으며, 아래로부터 근대화를 추동하는 정치적 동력을 내포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24쪽>


22. 충군애국사상 – 신존왕주의
‘신’존왕주의는 근대적 신분해방의 혁명적 추동력일 수밖에 없었다. 또 이런 의미에서 ‘신’존왕주의는 그 자체가 새로운 혁명적, 근대적 이데올로기였다.” (중략) 신존왕주의로 명명할 수 있는 민의 충군애국사상이 실천적 기치로 대두되는 1890년대의 긴박한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는 (중략) 민의 영역에서 특징적으로 대두되는 흐름이 ‘자주적’ 조선중화론이다. 이는 성리학적 존화주의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세계관의 흐름이 역전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30-231쪽) 이 자주적 조선중화론은 전통적·성리학적 존왕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일군만민의 ‘신(新)존왕의식’은 일체의 권귀를 배척하는 동시에 ‘우리 임금’의 권위를 뒷전으로 제치거나 상대화시키는 일체의 존화주의(尊華主義)도 인정하지 않는 기반이 되었다. 자주적 조선중화론에 기초한 신존왕주의는 대외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 속에서, 그리고 이양선의 출몰과 영불연합군에 의한 북경함락(1860)으로 표현된 서세동점의 문명위기 속에서 청국·일본·서양에 대한 강한 방어의식과 ‘민중적 조선중화론’으로서의 조선중심주의를 동반했다. 이런 점에서 신존왕주의는 대외적으로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추동할 수 있는 맹아적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재기포에서는 ‘척왜’의 단일한 기치로 일본의 무력침공에 저항하는 동력이 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독립투쟁의 동력이 되었다. <230-234쪽>


23. 헌법 제1장 제1조 민주공화국의 유래
우리 헌정질서의 핵심원리인 헌법 제1장 1조에 천명된 ‘민주공화국’은 어떻게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왔을까? (중략)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법적 연원을 추적하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민족독립을 위해 국외 망명지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마자 「임시헌장」에 ‘민주공화국’을 명시한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의 열기가 계속되고 있던 시점에 「임시헌장」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임시헌장」은 본토(한반도)에 있는 우리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응축된 국가적 지향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239-240쪽>


24. 공화 이념의 역사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핵심인 민주공화국에 내재된 ‘공화’ 이념은 ‘민주’와 직접 호응하는 개념으로 (중략) ‘민주공화’의 ‘공화’는 신분제 국가를 탈피한 ‘민의 나라’를 전제로 한 공화다. ‘공화’의 이념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겠지만,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며(isonomia), 누구든지 의회나 공공장소에 말하고 싶은 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isegoria), 출신배경과 상관없이 시민이면 누구든지 참정권을 가지며(isogonia), 오늘 다스리는 사람이 내일 다스림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isokratia)”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근대 정치원리인 ‘의회’, ‘참정권’ 등이 확립되기 이전 ‘민주’와 ‘공화’를 향한 사상적 요체는 만만평등 원리에 기초한 ‘신분해방’ 사상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중략) 우리 근현대사에서 재평가해야 할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가 근대적 신분해방이 관철되는 역사적 결절점이었다는 사실이다. <247-249쪽>


27. 민주공화국은 자생적인 정체(政體)이다
1919년 4월 11일 「임시헌장」에서 천명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서구로부터 이식된 수입산이 아니고, 우리의 정치사상적 전통이 능동적 패치워크를 통해 형성한 정체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18세기 말부터 문해인민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던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1850년대 무렵이면 확장된 평민공론장에서는 서구적 함의의 ‘공화’와 ‘민주’ 개념과 접촉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개념들이 우리 정치적 전통에서 전적으로 이질적이고 생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능동적 패치워크가 일어날 수 있었다. <251쪽>

■ 차례

1장 서론

1. 공감적 해석학의 필요성
2. 근대화의 개념

2장 한국의 근대화를 설명한 사상들

1. 한국 근대화 논의 : 실학    
1) 실학담론
2) 실학의 근대적 신화
2. 근대화 논의 검토
1) 민중사학
2) 내재적 발전론 대 식민지근대화론

3장 18-19세기 정치구조의 변화와 ‘민’

1. ‘민’과 정치     
1) 민유방본의 정치적 전통
2) 상호성 원리에 기초한 국가와 민의 관계
2. ‘민’의 정치적 역할 변화
1) 정치적 공공성의 시대적 전환과 민
2) 민의 정치적 위상 변화

4장 18-19세기 사회구조의 변화와 ‘민’

1. 근대적 인민과 주체의 이해
1) 자발적 결사체
2) 조선시대 시민사회 논쟁
2. 민의 영역에 나타난 사회구조적 변화
1) 향촌사회의 구조 변화 : 향회와 두레
2) 문해(文解)인민의 등장
3) 민회

5장 대동-해방 사상의 전개

1. 대동-해방 이념     
1) 동학의 인간존중과 신분해방 사상
2) 신분해방 조치들
2. 동학농민혁명과 신분해방
1) 동학농민군의 신분해방운동
2) 『동학사』와 폐정개혁안의 사료적 논란
3) 폐정개혁안과 갑오개혁의 관계

6장 일군만민-충군애국 사상

1. 동학농민혁명의 발생 배경
1) 대원군사주설
2) 대원군 활용설
3) 동학농민혁명의 원인과 배경
2. 충군애국사상의 기치
1) 충군사상에 대한 논란
2) 경복궁 무력점령과 충군애국사상의 기치
3. 충군애국사상의 성격
1) 동학과 일군만민사상
2) 자주적 조선중화론과 신존왕주의

7장 맺으며

1. 외부 이식론 비판
2. 민주·공화 개념의 패치워크
3. 민유방본의 적극적 해석 : 민주의 포지
4. 인간존중(만민평등)과 신분해방 사상
5. 소회와 기대

■ 저자 소개

이영재_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동국대학교 정치학 박사(『하버마스의 소통적 권력과 민주주의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2004)), 한국정치사상학회 연구이사, 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 『민주주의 강의4』(민주화기념사업회, 2010, 공저),『민의 나라, 조선』(태학사, 2015),『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 교육민주화운동사』(2016),『공장과 신화』(학민사, 2016) 등의 저서와「조선시대 정치적 공공성의 성격 변화」(2013),「조선시대 시민사회 논쟁의 비판적 재해석」(2014),「다층적 이행기 정의의 포괄적 청산과 화해 실험」(2015),「대원군 사주에 의한 동학농민전쟁설 비판」(2016),「동정심에 관한 통섭적 고찰」(2017),「소통적 연대 원리의 공감이론적 재구축을 위한 시론적 모색」(2018) 등의 논문이 있다. 최근 동서 정치사상의 비교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한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나눔문화, 연대원리, 공감장의 이론화와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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