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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이누 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1. 17. 16:11

어느 아이누 이야기

징용조선인과 소수민족 사이에서 태어난 한 아이누의 일생

■ 이 책은…

일본 소수민족의 하나인 아이누민족 여성을 어머니로, 일제강점기 징용 한국인 남성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저자가 아이누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가며, 일본 내에서 아이누의 권리,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중의 굴레를 헤쳐 나온 일생을 회고한 책이다.




  • 분야 : 일본문학, 회고록, 자서전
  • 저자 : 오가와 류키치
  • 구성 : 타키자와 타다시
  • 번역 : 박상연
  • 발행일 : 2019년 1월 25일
  • 가격 : 15,000원
  • 페이지 : 280쪽(두께 13mm)
  • 제책 : 무선
  • 판형 : 140×210mm
  • ISBN : 979-11-88765-32-4 (03830)

■ 출판사 서평

청년 시절 시만 개척지에서 사슴사냥 동료들과 함께. 앞열 중앙이 류키치

저자의 결혼기념사진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오래전에 시작된,
현재 진행형인, 미래로 세계로 열린 이야기이다!

홋카이도는 우리에게 일제강점기 한인 강제징용자들의 고난의 땅으로 인식된다. 본디 홋카이도는 일본 소수민족인 아이누민족 세거지였다. 홋카이도에는 아이누 외에도 서너 개의 소수민족이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왔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손길을 외부로 뻗치기 직전 1870년 이후로 활발히 ‘개척’한 땅이 홋카이도였다.

일본민족(야마토)과 확연히 다른 언어와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던 아이누민족의 수난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야마토 민족의 홋카이도 이주는 곧 아이누민족의 쇠락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이 세계대전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홋카이도는 전쟁물자(광산)를 생산하는 주요 기지가 되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도 숱하게 동원됐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와 우리(조선민족)의 연결고리는 이때 성립된다.

저자 오가와 류키치의 부친[李秀夫]은 1930년대 초쯤 일본인의 노동자 모집 광고를 보고 홋카이도로 왔다. 그러나 자기 일이 노동자들을 감독 감시, 구타하는 것임을 알고 집단 탈출을 도모하여 아이누민족의 마을에 은거하였다. 그곳에서 저자의 모친인 아이누인 오가와 나츠코(전 남편과 사별)와 결혼하여 오가와 류키치를 낳았으나, 그의 부친은 오가와가 채 3세가 되기도 전에 한국에서 그를 찾으러 온 가족을 따라 귀국해 버렸다. 그때부터 오가와는 모친과 이부형(異父兄)의 슬하에서 아이누민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오가와 류키치 씨는 일본 국토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살았으면서도 소수민족으로서 민족적 차별, 인간적 모멸을 받아온 아이누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아이누 여인[사나에]을 만나 결혼하면서, 아이누로서의 정체성에 눈뜨게 되었고,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아이누민족의 권리 찾기와 인권 운동에 뛰어든다.
그 이후의 오가와 류키치 씨의 행적은 아이누민족 공유재산 재판, 아이누문화진흥법의 모순과 왜곡 시정, 아이누인 선조 유골을 반환하려는 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위하여 UN선주민족 회의에까지 참가하면서, 결국 아이누민족의 문제가 세계사적인 지평을 갖는 것임을 자각하고, 운동의 질적 심화를 이룬다.

한편, 1995년에는 홋카이도대학 한 강당에 방치되어 있던 동학군 유골이 발견되어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동학군 유골은 우여곡절 끝에 국내로 반환되었으나, 여전히 최종 안식처를 얻지 못한 채 임시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국내에 큰 파장을 일으킨 동학군 유골 발굴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실상 아이누민족 유골이 같은 형식으로, 그러나 그 숫자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다수(1천 구 이상)로 발견된 데 있다. 아이누민족의 유골이 홋카이도대학 동물실험실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83년 무렵이었고, 그때부터 오가와 류키치 씨를 비롯한 아이누민족 운동가들은 그 경위와 실상에 대한 조사를 학교 당국 및 일본 정부에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 동학군 유골 발견(1995)도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다(이때, 동학군 유골과 함께 아이누, 윌터 등 소수민족의 유골도 다수 발굴되었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라는 무덤덤한(?) 제목과는 달리 책에서는 오가와 류키치 씨의 시선과 행적을 따라 이러한 역사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 사람의 삶이 세계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소박하지만, 역설적으로는 담대하게 그려 보인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에는 아이누민족은 물론 일본 내 소수민족, 나아가 전 세계 소수민족의 수난, 약소민족의 고난 등이 가로 세로 놓여 있다. 그 가운데 우리 한민족(조선민족)도 뚜렷이 자리 잡고 따로 또 같이 수난과 고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과거에 집착하고 천착하여 진실을 밝히고, 굽어진 것을 바로 펴고자 하는 것은 거기에 얽매여서가 아니다. 그것이 실패와 좌절 없이 밝고 아름답고 행복하며 공존-상생하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배상, 강제 징용자에 대한 배상 문제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야기에 귀 막고 도리질을 치고 싶은 사람들, ‘이제 그만!’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이 문제의 현재성을 반증해 준다.

삿포로지방 재판소 앞에서 지원자와 함께 유골 반환을 요구하며. 가운데가 저자

이제 독립된 국가의 일원으로 지나간 세월의 피해 배상과 사죄를 당당히 요구하는 우리의 처지는 그나마 행복한 상황이다. 아이누민족이 처한 상황은 여전한 식민치하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이 당면한 과제는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비추어 주는 우리 이야기이다.


■ 책 속으로

● 나는 우라카와정(浦河町) 키네우스촌(杵臼村)에서 아버지 이수부(李秀夫)라는 조선인, 어머니 오가와 나츠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이 토미나 아이키치(富菜愛吉)의 마구간이었다는 것을 토미나 아이키치 씨에게서 후에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오랫동안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 누이에게 물어 보니 아버지를 데리러 온 사람은 ‘스무 살 정도의 덩치 큰 청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둘이서 집의 허술한 부분을 고치곤 하면서 한 달 정도 함께 있었다고도 말했다. 누이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적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조선에 돌아간 후 한 번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본 적은 없다. <17~24쪽>

● 사나에(早苗)와 결혼했을 때가 쇼와37년(1962), 내가 스물일곱일 때, 사나에가 스물 둘일 때이다. 개척단에 사나에의 숙부가 계셨는데, 형에게 “동생에게 여자가 있나?”라고 물었던 모양이다. ‘없다’는 대답을 듣고 이야기가 진척되었다. (69쪽) 사나에는 특히 아이누로서의 자각이 강했고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의 반은 사나에라고 할 수 있다. 사나에는 결혼식 다음 날부터 이쪽저쪽으로 야채를 팔러 다니는 등 일을 시작했다. 손님 상대가 능숙해서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73쪽>

● 삿포로에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시계탑을 보러갔다. ‘삿포로 시의 새벽과 인구’라는 전시가 있었는데 그중 ‘아이누는 있었으나 극소수’라는 기술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반감을 느꼈다. ‘삿포로에는 많은 아이누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삿포로에 우타리협회의 지부를 조직해야겠다는 결심이 강해졌다.(81쪽) ... [쇼와46(1971)년] 12월 22일에 다시 한 번 결성총회를 했다. ... 지부 발족 후 삿포로 거주 아이누의 생활 실태 조사는 사나에와 토요카와 씨의 부인 테루코 씨가 힘을 써 주었다. 이름, 주소, 가족 구성, 직업 등의 항목을 만들어 회원들로부터 들은 정보에 의지하여 사나에와 테루코 씨 등이 찾아다니곤 했다. 그즈음 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 조사가 결정적으로 보탬이 되어 삿포로 권의 아이누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81~87쪽>

● 한국에는 몇 차례 방문했다. ... [두 번째 한국 방문] 도착한 다음 날에는 큰 박물관[천안 독립기념관]에 갔다. 그곳에는 일본군이 자행한 일들이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함께 간 모두 깜짝 놀랐다. 예를 들면 갓난아기를 공중에 들어 올려 총검으로 찌르는 장면이 컬러로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설명원이 능숙한 일본어로 설명했다. 굉장히 진지하고 박력이 있었다. 일본의 가이드 따위와는 전혀 달랐다. 종군위안부의 그림도 있었다. 보는 것 하나하나가 가슴에 꾸욱 와 닿아서 앞으로 갈 때마다 점점 나 자신이 작아졌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움직였다. 단장입니다, 따위의 말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박물관에 작은 꼬맹이들 30명 정도가 단체로 선생님들의 손에 이끌려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20쪽>

● 홋카이도립 케이세이(啓成) 고등학교 지리B의 수업에서 교사가, ‘아이누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라는 식의 표제를 칠판에 크게 썼습니다. 뒷자리에서 웃고 있는 여학생을 가리키며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제대로 공부해라.” 교실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중략) “너희들은 이후에도 홋카이도에서 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누와의 결혼을 피할 것. (중략) 그렇기 때문에 구분이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교실에 아이누 학생이 있어서 다음날 아침 9시에 학생과 부모가 생활관의 데스크 앞에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나도 심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마침 모여 있던 본부의 세 책임자에게 전달하였고 놀란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무국장은 해당 학교장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146쪽>

● 1995년(평성7), 홋카이도대학 문학부의 요시자키 마사카즈 교수가 퇴임하면서 후루카와 강당에 있던 연구실을 정리하게 되어 교수와 친한 아이누 청년이 도우러 갔다. 요시자키 교수는 이시카리의 모미지야마(紅葉山) 유적을 발굴할 때 이 청년과 알게 되어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리 도중 책장 위에 있던 박스 안에 사람의 두개골이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189쪽) ... 이것이, 홋카이도대학 후루카와 강당 인골사건의 출발점이다. (190쪽) ... 했다. “아이누인 내가 왜 이곳에 서 있는가. 그것은 홋카이도대에 치시마에서 발견된 유골 51구, 카라후토(사할린) 아이누 유골 91구가 있는데, 이번과 같이 그들의 고향에 유골을 돌려주기 위한 예비 조사를 위해 와 있는 것이다. 홋카이도대에는 아이누의 유골도 1000구나 있다. 잘 해결하고 싶다.” <192~193쪽>

● 구 토인보호법 실행으로부터 110년, 홋카이도지사의 관리 이후 70년. 그 사이 이 법의 개정 검토는 네 번 있었는데 아이누민족 자신과 가족과 직결되는 권리 등은 전부 삭제하는 삭제의 향연이 펼쳐진 결과가 오늘날의 아이누민족에 대한 법률의 실태입니다. 아이누민족의 긍지를 회복시킨다고 문화법 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생물의 목숨에 관한 이오만테(아이누 마을에 방문한 카무이(곰과 올빼미 등)를 카무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제사. 아이누 문화에서의 최대의 제사)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문화입니다. 자연계의 생물, 인간 아이누, 카무이와의 사이에서 교환된 약속입니다. ‘생명을 본래의 자연에 돌려보낸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아이누민족이 태어난 것이며, 길고 긴 차별에 견뎌 온 에카시, 후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싹틀 수 있는 사업을 시행하고 함께 참가했을 때, 민족의 긍지란 이러한 시간에 걸쳐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228쪽>

● 이것은 나의 마지막 싸움이다. [2012년(평성24) 9월 14일, 오가와 류키치, 죠노구치 유리 외 1명이, 평성20년 이후 홋카이도대로부터 개시된 ‘아이누민족 인골발굴대장’ 등으로부터 밝혀진 우라카와정 ‘키네우스’의 발굴 기록을 기반으로, 홋카이도대학에 대해, 유골반환과 선조의 제사를 방해당한 것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여 삿포로 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 전국에서 아이누의 인골이 1,635구나 소장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242~244쪽>

● 본서의 저자이자 주인공 오가와 류키치 씨는 홋카이도의 선주민족인 아이누이자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이 된 두 민족-조선인과 아이누-사이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마이너리티로서의 ‘이중의 굴레’에 온몸으로 맞서 싸워 온 인물이다. 류키치 씨의 특수한 정체성과 그가 살아온 시대, 본서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일본과 한국, 그리고 넓게는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때문에 본서는 한 사람의 자서전이자 동시에 우리가 꼭 알고 가야 할, 제국주의 시대에 희생되어 온 많은 이들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256쪽, 옮긴이의 말>


■ 차례

제1장 ― 나의 출생
제2장 ― 형과 누이와의 생활
제3장 ― 시만(シマン)의 입식지(入植地)
제4장 ― 카츠라자와 댐 건설 현장
제5장 ― 결혼, 삿포로로
제6장 ― ‘우타리협회 이시카리지부’ 창립 무렵
제7장 ― 전국 아이누 이야기회
제8장 ― 아이누 민예품 기업조합
제9장 ― 한국 방문
제10장 ― 사할린 이주순난자 위령묘전제 발족
제11장 ― 삿포로 시 학교에서의 차별 강연과 수업
제12장 ― 홋카이도대학 의학부 동물실험실
제13장 ― ‘아이누민족에 관한 법률(안)’ 작성 무렵
제14장 ― UN 선주민족 작업부회 참가
제15장 ― 홋카이도대학 후루카와 강당 인골사건 당시
제16장 ― 아이누민족 공유재산재판
제17장 ― 건강 상태
제18장 ― 연어 밀어(鮭密漁)
제19장 ― 아이누 문화진흥법의 재검토
제20장 ― 홋카이도대학이 소장 중인 선조의 유골
제21장 ― 유골 반환 소송
제22장 ― 최근 상황

구성자(기록자)의 후기
옮긴이의 말
어느 아이누 이야기 인명 색인
홋카이도 지도 및 본서 관련 지명 오가와 류키치 연보


■ 저자, 구성자, 옮긴이 소개

저자 오가와 류키치(小川隆吉). 상풍관 자신의 방에서(2013.12)

저자_ 오가와 류키치:
1935년(쇼와10) 홋카이도 우라카와정 키네우스 출생. 1971년, 홋카이도 우타리협회 이시카리지부(이후 삿포로지부) 설립, 초대 지부장이 되다. 1976년, 홋카이도 우타리협회 본부이사(삿포로지부 선출)가 되다. 1987년, 국제연합 선주민 작업부회(스위스 제네바)에 노무라 이사장, 사토 사무국 차장과 함께 참가. 1997년,「홋카이도 구 토인보호법에 기반한 공유재산재판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 대표가 되다. 1999년,「홋카이도 구 토인공유재산 등 반환수속 무효 확인 청구사건」을 삿포로 지방재판소에 제소, 원고단장이 되다(2005년, 최고재판소,「아이누민족 공유재산재판」 상고기각). 2012년, 홋카이도대학 소장 중이었던 우라카와정 키네우스로부터 발굴된 선조의 유골 반환을 요구하며「유골반환 청구사건」을 삿포로 지방재판소에 그 외 2명과 함께 제소. 2016년 7월 홋카이도대학과의 합의가 성립, 우라카와정 키네우스에서 발굴된 유골 12구는 반환되었다.

구성자_ 타키자와 타다시:
1943년(쇼와18) 홋카이도 이와나이정 출생. 야마가타대학 문리부 졸업 후, 홋카이도에서 고교교원이 된다. 2004년, 고교교원 정년 은퇴. 2009년, 홋카이도대학 문학연구과(일본사학) 후기박사과정 취득퇴학. 현재 삿포로 시 거주.

옮긴이_ 박상연: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유년기를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거주하며 현지의 아이누, 재일교포들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일본어 강사, 영상 및 실무 번역, 통역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중 본서를 만나 첫 번역서로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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