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들 책이야기

개벽파선언을 가방에 넣고 떠난 여름 여행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9. 11. 13:00

조개(박상희)

이 글은 《개벽신문》 88호(2019.9)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실 주】이 글은 '개벽학당' 공부의 일환으로 제출한 <개벽파선언> 비평문입니다.

1

러시아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나는 워낙 겁이 많아서 한국을 벗어나면 우선 겁부터 집어먹는다. 나와 동행한 친구 의미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만난 러시아 사람들이 모두 친절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을 놓는 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통통배까지 타고 들어가야 하는 바이칼 호수의 깊은 섬에서부터 육지의 시내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다 줄 사설 버스를 타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할 일도 없어서 창 밖을 내다보며 몇 가지 단어를 읇조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개벽학당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아름다운 단어들이었다.

개벽이란 뭘까? 그건 “포함삼교, 화랑, 일심이문, 행사, 시천주, 사사천 물물천, 이천식천, 인내천”이었다. 창밖으로 하늘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커다란 담수호가 보였다. 생존의 조건을 시선가득 확보해주는 것 같았다. 파아란 하늘이 보였다.

사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와 '의미'는 크라쥐를 당했다. 크라쥐는 러시아어로 강도인데, 그냥 강도라고 하면 어감이 너무 센 것 같아서 그렇게 썼다. 두 명의 남자 러시아인은 택시를 빙자하고 우리를 차에 태운 다음 문을 잠그고 300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깊은 공포와 자기 의지의 부재, 그로 인한 분노를 경험했다. 우리는 돈을 주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나는 원래도 겁이 많지만 그 순간에는 놀랍게도 더 겁이 많았고 또 빠져 나온 다음에도 의미를 전혀 위로해주지 못한 채 혼자 침대칸에 틀어박혔다. 나는 “하늘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며 울었다.

사건 직후 우리는 일정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침대 공간을 공유하게 된 두 명의 할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보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는 산발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장하는 우리는 그 칸에 타고 있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할머니들의 질문에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친구가 더듬더듬 설명했다. 두 남자… 차… 잠금… 강도… 300달러. 정도의 단어들이었다. 그중 300달러라는 단어는 유독 인상 깊은지 메아리처럼 가까운 침석에서 먼 곳으로 수군수군 울려퍼졌다.

횡단열차 안에서도 강도 신고가 가능했다. 우리는 순진함을 잃지 않은 채, 러시아에 대하서는 도대체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는 약점을 유지한 채, 몇 가지 단어로 우리가 겪은 사건들을 설명하고 경찰 진술서 몇 장을 남길 수 있었다. 경찰들과 할머니들과 옆 칸 사람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받았다. 세상은 굴러갔고 우리는 남은 일정을 여행할 힘을 얻었다.

새벽 2시, 횡단열차에서 경찰조사를 받고 침대칸으로 돌아온 우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문득 종착역인 모스크바에서 이병한 선생님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쥐가 아닌 다른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옆 칸에 누워있는 의미에게 이 생각을 들려주었다. 의미가 웃으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우리는 눈은 젖은 채 입은 웃은 채, 이병한을 만나기 전에 얼른 한국에서 챙겨온 『유라시아 견문』이랑 <개벽파선언>(원고-'다른백년' 연재: 편집자 주)이나 마저 읽자고 결심했다.

우리는 둘 다 침대 2층이었다.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한 명은 러시아가 나오는 『유라시아 견문 3』을 읽었고 한 명은 <개벽파선언>을 읽었다. 2층에는 앉아있을 공간이 없어서 반은 누워있었다. 의미가 『유라시아 견문』을 잠시 배 위에 내려놓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아니 근데, 푸틴이 동방에 주목을 하고 있다는 것이나 루블화로 가스 거래를 하는 것, 동방정교회나 러시아적인 것의 재발견 같은 것, 나는 러시아 통상학과니까. 학교에서도 익히 들었던 거란 말이지. 이게 뭐가 그렇게 특별한지 잘 모르겠어.”

나는 벽청으로서 아무거나라도 대답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러시아가 그렇게 가고 있는 길이 답답하지가 않잖아. 예를 들면 그 책 앞부분에 나오는 포르투갈 부분은 읽으면서 답답하단 말야. 유엔이나 나토,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다니다가 파산 위기에 처하고 불평등이 심해지고 그런 거 모두. 한국도 그래. 그냥 답답하기만 하잖아. 한국적인 게 뭔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뭘 따라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러시아는 정체성도 알고 있을뿐더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크게는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런 게 부러운 것 같아. 그래서 우리도 개벽을 돌아보고 있는 것 같고...”
“흠....”

짧은 대화를 마친 우리는 다시 어정쩡한 자세로 책읽기로 돌아갔다. 이후 책을 바꿔 읽었다. 의미는 '벽청'(개벽하는 청년들 = 개벽학당에서 수업을 듣는 청년/학생: 편집자 주)이 아니었음에도 빠른 속도로 <개벽파선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의미에게 그 책이 어떤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훔쳐보며 계속 소감을 물었다.

“읽을 만은 해?”
“응 계속 쭉쭉 읽히는데. 두 명이 얘기를 나누듯이 하니까 재밌어. 말투도 너무 달라서 재밌고.”

나중에는 이런 게임도 했다.

“새별인지 로샤인지 맞춰봐. ‘제가 생각하는 개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깨어있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아 새별이지. 이번엔 내가 해 본다. ‘독창이 번뜩이고 독보가 휘황한 글입니다.’”
“로샤, 로샤!”
“특징이 있어. 이병한 선생님은 절대 ‘저는 ~~ 생각합니다’ 같은 조심스러운 말을 안 한단 말야. 조성환 선생님은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면이 있고.”

우리가 <개벽파선언>을 다 읽은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다랐을 때였다. 긴 여정에 지쳐서 반 눕고 반 앉은 것도 아닌 거의 누운 자세로 허덕이고 있었다. 나는 의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래서 다 읽으니까 어떤데?”

의미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아직 실험된 바가 없으니까. <공산당선언>은 지난 실험이 여러 번 있었잖아.”

의미의 말에 나도 일부 동의했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생각하는 생활이 최상의 생산수단으로 전변(轉變)합니다. 생명과 생각과 생활과 생산이 선순환하는 디지털/글로벌 한살림 운동으로 궁궁의 그물망을 그려가야 하겠습니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라는 회의부터 드는 것이다. 그동안 디지털, 글로벌에 대한 경험은 환경, 생명을 파괴하는 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랄 만한 길은 <개벽파선언>에서 제시하는 길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내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수운의 주체론을 라이프3.0시대의 존재론으로” 삼는 것. <개벽파선언>에는 미래에 바랄만한 길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과학도 철학도 공부할 것이 산더미다. 나도 무언가를 믿고 또 미래를 꿈꾸고 싶기 때문이다.

2

모스크바를 찍은 다음 모로코에 갔다.

열 명용 봉고차를 타고 2박 3일동안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붉은 산이 펼쳐지고 또 펼쳐졌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할 일이 없다보니 어젯밤 일을 생각했다. 지난 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스페인에서 온 여자 의사분과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의미는 수다쟁이처럼 말을 많이 쏟아놓았다.

의사일 줄 알았다. 지금은 유급 휴가를 받아 여행 온 것인가?

그분이 대답했다.

그렇다. 4주의 유급 휴가를 받아 모로코로 여행왔다.

그러자 의미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지금 같은 (무직) 청년 시기가 아니면 그렇게 오랫동안 휴가를 받는 게 대게 불가능하다. 직장을 그만두고서야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대개 며칠간의 짧은 휴가를 받는데 그마저도 무급 휴가이다.

이런 내용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자 나는 의미의 어깨를 잡고 '그녀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좌중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일을 생각하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뒷자리에 앉은 벽청 '결'이 말을 걸었다. 결과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개벽파가 뭔지 남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처럼, 그냥 단어만 말하면 그 뒤에 그들의 투쟁과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까지 스윽 보이는 그런 게 아니었다. 개벽파는 정치적 의견이 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다양한 정당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은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시대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그 가치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도가 무엇인지 말야. 움직여야 되는 길이 있고 그 길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면 좋겠어.”
“큰 가치를 공유하고 그 길로 나아가고 있기만 하다면 장기집권이든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아.”
“개벽파라는 말이 묶어주는 어떤 세력, 사상이 있다고 생각해.”
“근데 그게 뭘까?”
“아직 집권해보지 못한 세력일 것 같아.”

모로코에는 페즈라는 도시가 있다. 거의 신라 시대 즈음에 생긴 도시이고 오랫동안 안달루시아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미로 같은 중세의 메디나가 구 시가지에 아직 남아있다. 나는 메디나 안에서 싸고 배부르게 밥을 먹기 위해서 케밥집에 갔다. 하루종일 제대로 된 끼니를 먹지 못했던 차였다. 닭고기와 야채를 넣은 캐밥과 굵직한 감자튀김, 캐찹과 특제 마요네즈소스가 한 접시 가득 나왔다. 감자튀김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말도 안 통하는데 여기에 와서 캐밥을 시키기까지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되새겨 보았다. 그 작은 원테이블 식탁에 앉아 현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자체도 무서웠다.

스물한 살에 대륙의 서쪽 끝 모로코를 떠나 동남아시아까지 갔을 이븐 바투타를 생각해보았다. 그는 낮선 곳이, 자신의 위치가, 죽음의 위협이 무섭지 않았을까? 그는 여행 중에 아랍어를 사용했을 것이라 한다. 이슬람교의 권역, 쿠란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갔던 것이니. (모로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현지 어인 베르베르어와 아랍어를 할 줄 안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는 신성이 있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메카로 떠났고, 그 곳에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던 것이니까. 부러웠다. 그의 넓은 문화적 영역권과 종교적 신념이.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니 다시 개벽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개벽에 바라는 것은 참 많았다. 세계를 구원할 정치적 신념도 되어주고 나 자신을 구원할 종교적 신념도 되어주고 나를 지탱해줄 문화적 배경도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런 한국판 고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유대인에게 <탈무드>가 있고, 서양인에게 <성경>이 있고, 중국인들에게 <논어>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국민고전’이 한 권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그 범위를 유학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원효의 「화쟁론」이나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그리고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나 세종의 <훈민정음 해례본>, 나아가서는 개벽파의 핵심구절이나 「기미독립선언문」 등 한국사상을 대표할만한 핵심 사상들을 망라하는 것입니다.”

<개벽파선언>에 이런 말을 쓰고 '새별(조성환)'이 개벽학당에서 가르친 단어들은 다음과 같았다.
"원효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최치원의 포함삼교", "정약용의 행사(行事)를 통해 인의예지를 습득하는 것" "최시형의 하늘을 내 안에 품은 귀한 만물"
언제나 깊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름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지 않나?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포함할 수 있을까? 저 단어들 사이에 내가 믿고 의지할 신이 있을까?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나? 공기처럼 이것저것 사이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다.

동학은 가까운 과거에 생긴 사상이고 그리고 가까운 과거에 전쟁(동학농민혁명)에 나갔다가 '거의' 전멸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사상이다. 이처럼 선언이 나왔으니 잘 들여다보고 또 잘 만들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다시 개벽의 역사가 만들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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