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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남원 동학농민혁명

소걸음 2015. 2. 27. 14:42


동학 총서 002

전라도 남원 동학농민혁명

 ■ 이 책은 

각 지역의 동학에 대해 알아보고자 기획된 동학총서 두 번째. 이 책에서는 남원 지역 동학의 정체성과 의의를 밝히고 있다. 동학 교조 최제우(수운) 선생은 전라도 남원에서 동학 경전을 저술하며 동학의 교리를 완성하였고, 이때 편찬된 「논학문」에서는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명칭이 쓰이기도 했다. 또 이곳은 갑오년(1894)에 김개남의 주도 하에 전라좌도 대도소가 설치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책은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가치를 21세기 글로컬(Glocal) 시대의 시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남원 지역 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함과 동시에 발전적 과제에 대한 통찰을 통해 미래적 전망을 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 기 획 : 동학학회
■ 저 자 : 최민자 이이화 신영우 이병규 임형진 조규태 조극훈 채길순
■ 분 야 : 역사
■ 발행일 : 2015년 2월 25일
■ 발행처 :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 페이지 : 320쪽
■ 가 격 : 15,000원
■ 판 형 : 152mm ✕ 225mm (두께 15mm)
■ ISBN : 978-89-97472-91-8 부가기호 94900
■ ISBN : 978-89-97472-72-7(세트) 부가기호 94900
■ 문 의 : 02-735-7173


■ 출판사 서평

수운(최제우)의 남원 은적암(隱寂庵)행 - ‘동학’이라는 이름의 탄생

경주를 떠난 수운(최제우)은 1861년 남원 교룡산성 내의 은적암(隱寂庵)에 머무르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여 완성했다. 여기서 지은 「논학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동학’이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남원은 단순히 동학과 관련된 지역 중 하나가 아니라 경주에 못지않은 동학의 성지이고 호남 동학의 출발지이다. 수운이 자신의 사상, 즉 동학을 이곳 주민들에게도 전파했으니 호남 동학의 출발지가 남원인 셈이다. 1894년 동학혁명에서 전라도 여느 지역 못지않게 남원 전 지역을 망라해 참여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대 한국 사상의 열매를 맺다

남원은 위대한 근대 한국 사상이 열매를 맺은 지역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특히 은적암은 수운이 조용히 흔적도 남기지 않고자 숨어 살면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곳이다. 영남의 경주 용담에서 탄생한 동학이 호남의 남원 은적암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남원은 동학의 종교적 사상적인 기초를 다진 유서 깊은 지역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발발과 중심지 남원

동학농민전쟁 당시 남원은 전라좌도에 속해 있으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상우도와 접경을 이루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남원에 근거지를 둔 동학농민군은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나서 지리산을 넘어 안의와 함양으로 진출했다. 또한 전주성 함락 후 각 지역에서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전봉준은 전라우도, 손화중은 전라 아랫 지역, 김개남은 전라좌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특히 부정한 벼슬아치와 횡포한 양반배를 가혹하게 징치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남원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 ‘김개남’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의 포(包) 조직의 대표자 격인 대접주였다. 전봉준 등의 인물보다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94년 3월 1차 봉기 이후에 남원에서의 그의 세력이 매우 커져 7월 60여 일 동안 결집한 세력이 적어도 5~6만 명, 최대 7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또한 남접농민군 지도부 중 유일하게 9월 봉기를 주장한 사람이 김개남이다. 그러나 전봉준 등은 이를 반대하였다. 김개남은 “해산하게 되면 다시 모이기가 어렵다.”고 하여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치르기 위해 9월 재봉기를 주장하였지만, 전봉준은 “우리가 비록 인원수가 많기는 하나 모두 (신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므로 쉽게 무너져”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여 결국 이때 재봉기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개남군은 청주성 공격을 위해 북상하였으나 일본군과 조우하여 패배한데다 읍내를 태우는 등의 잔혹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민심을 잃었고, 결국 해산하게 되었다.

 

7만여 명이 모인 ‘남원 대회’

김개남은 7월 15일 전봉준과 함께 대규모 농민 집회인 ‘남원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7만여 명의 농민군이 남원에 모였고, 새로운 집강소 질서가 탄생되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벼슬아치와 양반들에 대해 강경 노선이던 김개남군의 활동이 유해지는 경향을 띄었다.

 

 

■ 차례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을 위한 소고| 최민자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성격과 현재적 의의| 이이화

1894년 남원 대도소의 9월 봉기론과 김개남군의 해산 배경| 신영우

남원지역 토착 동학농민군의 활동| 이병규

은적암과 초기 남원지역의 동학 전파| 임형진

동학농민운동 이후 남원 출신 동학인과 천도교인의 활동| 조규태

동학 경전에 나타난 근대성과 남원의 정체성| 조극훈

사적지를 중심으로 본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 채길순

부록 – 남원 동학농민혁명 유물 유적 표지석 문안

 

 

■ 저자 소개 

최민자 __ 성신여자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이화 __ 전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신영우 __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병규 __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임형진 __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조규태 __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

조극훈 __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채길순 __ 소설가,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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