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청년과 신문화운동
천도교 청년 신문화운동 전개하다
■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왕성한 청년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청우당의 창립과정과 조직변천, 그들이 전개한 신문화운동과 개벽운동의 배경사상과 전개양상의 연구를 통해 한국 근대사에서 부당하게 소외되었으며, 우리 사회의 미래에 새로운 길의 가능성을 제안해 주는 자주적, 주체적, 개벽적 근대의 길을 제시한 천도교청우당을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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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청년’ 언제나 시대의 화두 – 천도교청년회 100주년
우리 역사에서 ‘청년’은 언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가. 자의식을 가진 계층으로서, 그리고 시대적 사명감을 자임하는 집단으로서 청년은 1910년 일제의 국권 피탈에 직면하여 한민족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 역사에 등장한다. 그들은 일본 등지를 유학한 유학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세계 신사조를 익히고, 세계 정국(政局)을 파악하고, 자신의 실존적(인간적), 민족사적 위치를 자각하면서 서서히 민족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3.1운동은 이러한 흐름을 귀납하고 다시 빅뱅을 일으키며, 청년을 위시하여 ‘여성’ ‘학생’ 등의 계승이 새롭게 우리 역사에 정체성과 그 면모를 부각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천도교청년회(청년당, 청우당)’이다. 그 청년회는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천도교청우당, 또하나의 한국근대사
단일조직으로서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청년단체였던 천도교청우당은 1919년 9월 2일 창립되었다. 창립당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라는 연구 교양 단체로 출발하여, 8개월 만에 ‘천도교청년회’라는 청년조직으로 성장하고, 그리고 만 4년만인 1923년 9월 2일에는 ‘천도교청년당’이라는 ‘전위조직’으로 성장하여 이후 천도교청년동맹과 일시적 분화를 겪었으나 이후 천도교청우당으로 통합되면서 20년간 7대 부문운동과 통속운동, 전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일제의 전시체제하에서 해체되었던 천도교청년당은 해방 직후 부활하여,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익을 넘나들며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남과 북의 주류로부터 모두 탄압을 받고, 1949년 전후로 해체되거나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천도교청우당(현, 청년회)의 창립과 운동전개, 그리고 그 부침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결을 그대로 같이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적폐 청산이나, 분단 극복을 위한 민족사적 과제에 골몰하는 까닭도 모두 천도교청년회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 속에서 그 원형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천도교청우당은 ‘개화’와 ‘척사’ 너머 ‘개벽적 근대’를 지향해 온, 우리 한국근대사의 숨은 숨결이다. 우리 사회의 선진화, 통일조국의 건설은 이 천도교청우당의 복권과 재활이라는 과제와 한배를 탄 운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천도교청우당의 조직적 위용
최대 4만 명, 평북 강계에서부터 전남 고흥에 이르기까지, 멀리 일본과 만주(간도) 등지에 이르기까지 최대 4만 명, 200여 개의 지부조직을 실제 자료에 따라 조직(임원), 지역, 설립과 주요 활동 등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도표화하여 제시하였다. 그리고 회의록이나 신문기사 등을 통해 그 활동을 세밀히 분석하고, 전체 규모와 종합적인 의미 등을 망라하였다. 청년단체 조직의 내부 부문에서도 포덕부, 지육부, 강연부, 음악부, 편집부 등으로 나뉜 부서활동에 실제와 그것이 조직 내적으로나 대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친 상황을 실증 사료에 근거하여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천도교청년당은 단일조직으로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국(해외)적인 분포와 조직적인 활동, 다양한 부문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이 이처럼 폭넓게 확장된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확산되던 청년활동의 전 부문을 망라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으므로, 천도교청년당의 활동 내역을 검토함으로써 당시 청년운동 일반의 동향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천도교청우당의 개벽운동과 신문화운동
천도교 청년들의 신문화운동은 한편으로는 천도교의 종교적 포덕(布敎)운동이면서 한 교단사적 의미를 넘어서는 공공성을 띠고 진행되었다. 첫째는 3.1운동 이후 변화된 정세 속에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천도교청우당이 동학농민혁명과 갑진혁신운동, 3.1운동 등 동학의 근대화, 자주화 운동의 성과 위에 조직되고 그 운동의 이념과 지향을 계승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단지 일제강점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투쟁적, 소극적 의미를 넘어, 자주독립 이후 신 국가 건설을 위한 비전과 동력을 마련하는 창조적, 적극적 의미의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이는 주로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에 기반하여, 새롭게 건설되는 국가의 비전을 밝히고 있다. 셋째 천도교가 동학농민혁명과 갑진개화혁신운동, 3.1운동으로 이어오며 부단히 전개한 ‘신문명운동’, 즉 동학-천도교의 후천개벽운동을 전개한다는 측면이 있다. 즉 동학-천도교의 운동은 시대환경에 따라 일국적 관점(자주독립)하에서 진행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 시선은 세계보편사적 흐름의 문명사적인 전환, 즉 ‘개벽의 지평’을 향하고 있었다. 천도교청우당은 7대 부문운동(청년, 여성, 학생, 어린이, 노동, 농민, 상인)을 통해 인간의 정신개벽과 민족개벽, 사회개벽 등의 개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 지구상에 진정한 평화세계가 건설될 것을 희망하고, 믿고, 추구하였다.
천도교청우당(천도교청년회)의 대표적인 운동들
(1) 어린이날과 어린이운동 : 오늘날 5월 5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은 ‘천도교청년’ 방정환을 비롯한 천도교청년회의 산하단체인 ’천도교소년회’의 지도위원들(천도교청년회원)이었다. 방정환 등은 어린이날 제정 외에 잡지 『어린이』지 간행과 전국 순회공연 등을 통해, 미래의 희망이자 독립국가의 동량으로 어린이를 양성하고, 그들의 인격적 해방을 추구하였다.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는 그 이듬해 방정환 등 천도교청년회(소년회)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여, 범사회적인 운동으로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개벽』, 『신여성』, 『별건곤』 :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 가장 대표적이고 다대한 성과를 남긴 『개벽』지와 여성잡지 중에서 돌올한 『신여성』, 그리고 풍속교양 오락잡지로서 삼천리와 쌍벽을 이룬 『별건곤』 등은 모두 천도교청우당 산하 <개벽사>에서 간행한 잡지들이다. 천도교청년들은 당시의 암울한 민족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민중의 계몽과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잡지 간행을 통해 사상적 토대를 굳건히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개벽』은 72호를 발행하는 동안 36호가 발매금지, 중지, 압수를 당하고 그 밖에 수많은 삭제조치 등을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김소월, 현진건 등 수많은 문학가를 배출하고, 당시 세계 사조를 소개하고, 민족문화조사사업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정책에 맞서는 발군의 성과를 거두었다.
(3) <신간회>운동 참여 :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 좌우 합작조직인 <신간회> 결성 당시 천도교청년당은 사회주의 계열 제 단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최대 단체로서 핵심적인 연대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천도교의 민족운동 사상이 사회주의와도 무리 없이 연계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전국의 지부조직을 갖춘 최대규모의 단일 운동조직인 청년당의 조직력과 활동력은 단연 손꼽히는 민족운동 연대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간회>는 결국 중도에 해산하고 말았지만, 그 경험은 해방 이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계승되었다.
천도교청우당(청년당, 청년회)의 신사상 운동 – 삼대개벽운동
3.1운동 이후 청년 운동은 새로운 사회(공화국 건설을 통한 새로운 국가, 신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사회)를 지향하며 약진하였다.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주의를 요구하였고, 새로운 사상용어를 요청하였다. 서구에서 유래한 많은 신문명어들이 주로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지만, 그 개개의 용어들을 살펴보면, 당대 신청년들이 특히 한국적 상황 그리고 한국전통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이러한 근대적 사상, 철학 용어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측면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근대사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이 책에서는 특히 천도교 청년운동가들이 이를 천도교(동학)이라는 사상적 기반 위에서 재해석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구 신사조-개조주의를 참조하되 이를 동학 고유의 개벽사상으로 재해석하고 재조명하여 ‘삼대개벽운동’(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으로 제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천도교청우당(청년당), 한반도와 만주에 이르는 순회강연 활동
당시 청년운동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천도교 청년활동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방법론은 서울과 지방(순회) 강연 활동이었다. 청년 강연은 계몽적인 내용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특히 일본 유학생들의 귀국 순회강연 활동을 통해) 세계의 신사조와 신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민지와 문명의식을 개발하여, 자주독립을 위한 인적 기반을 조성하고,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국민(시민)의 위상을 제고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강연은 청년은 물론 여성, 어린이 등으로 특화되기도 하고, 순회강연을 넘어 강습회와 야학 운영이나 학교 설립으로 진전되기도 하였다. 또 한반도를 넘어 만주에까지 지부 조직을 두고, 순회강연, 선전, 교양활동을 전개하면서, 때로는 만주 근거의 무장 항쟁 조직과도 연계하기도 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의 통속운동, 시민운동의 뿌리가 되다!
오늘날 시민운동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1980년대의 사회변혁운동 이후 사회운동이 일상화되고 시민사회 속으로 파고들면서 시민운동이 성장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7, 80년대의 변혁운동이나 9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도 그 뿌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90년대 이후 시민사회운동도 일제강점기 ‘통속운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통속운동은 일제강점기 국내에서의 신문화운동, 교육운동, 민족유일당(신간회) 등을 통한 자주독립운동과 달리 사회 일반민중의 생활상의 개선이나 풍속개량과 같은 계몽운동의 성격을 띤다. 천도교청우당(청년당) 역시 이 통속운동을 전개하여,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장기적으로 민중의 의식과 생활수준을 고양하여, 개벽운동의 전위, 민족혁명(자주독립)의 근거로서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다.
『근대 신청년과 신문화운동』(성주현 지음)의 성과
명칭과 성격을 달리하며 1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천도교 청년단체의 설립 배경과 시기별 조직 체계와 운영 양상 그리고 특히 1930년대 천도교 청년단체의 조직 운영 방식의 변화의 시대적 대응 양상, 대표적인 운동인 부문운동에 대한 분석 등을 다룬다. 이를 위하여 일제 당국의 각종 정보문서와 청년당 입당원서와 당원성적일람표, 천도교 청년단체 발간자료, 일제 강점기 신문, 잡지 등에서 방대한 사료를 발굴/발췌하고,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통계로 작성(표)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학문적, 민족사적 성과이다.
천도교청우당 100년, 살아 있는 민족운동 역사
천도교청우당(현, 청년회)는 올해 9월 2일로 100주년을 맞이한다. 전국규모 조직으로서 1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직은 기독교청년회(YMCA) 등 손에 꼽힌다. 더욱이 천도교청우당(청년회)와 같이 한국 근현대사의 고비마다 중심에, 핵심에, 선두에 서서 피흘리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또 민족의 독립, 민족의 통일을 위해 전심전력한 조직으로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천도교청우당(현, 천도교청년회)은 북쪽에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라고 하는 ‘뿌리와 역사가 같은’ 형제 조직을 갖고 있는 유일한 조직이기도 하다. 1980년 대 이후 침체일로를 걸어온 천도교청년회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책의 발간과 더불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이 책에 실린 역사와 천도교청년운동의 이념 들은 ‘오래된 미래’로서 ‘예언된 헌장’으로서, 개벽세상, 통일세상, 평화세상으로서의 한반도, 동아시아, 세계의 새로운 차원을 기약하고 있다.
■ 차례
제1장 서론
제2장 1920년 전후 천도교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1.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의 창립과 활동
2. 천도교청년회로의 개편 조직의 확장
3. 천도교청년회본부와 지회의 활동
제3장 천도교청년당의 창립과 조직체계
1. 천도교청년당의 창립과 특성
2. 천도교청년당의 지도이념과 조직체계
제4장 1920년대 중후반 천도교단의 분규와 천도교청년당의 대응
1. 천도교단의 분규와 천도교청년당의 분화
2. 1920년대 중후반 천도교청년당의 조직 활동
제5장1930년대 천도교청년당의 조직 변화와 당세 확장
1. 1930년대 천도교청년당의 조직 변화와 당세 확장
2. 천도교청년당의 당세 확장과 해산
제6장 천도교청년당의 민족운동론과 대중운동
1. 천도교청년당의 민족운동론
2. 천도교청년당의 ‘통속운동’
제7장 천도교청년당의 부문운동
1. 부문운동의 배경
2. 부문단체와 부문운동의 전개
제8장 결론
보론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부활과 활동
부록
부록1 천도교청년당 당헌(1928)
부록2 천도교청년당 당헌(1932)
부록3 천도교소년회 규약
부록4 천도교청년회 규약
부록5 천도교내성단 규약
부록6 조선노동사 규약
부록7 천도교청년당 1936년 하반기 입당자 현황
부록8 천도교소년회 지방조직 일람
부록9 천도교내수단 지방조직과 주요활동 일람
부록10 천도교청년당 지방부의 접 조직 현황
■ 책 속으로
● 3·1운동 이후 창립되기 시작한 청년단체는 1920년대 초반 집중적으로 조직되었는데, ... 청년단체가 1920년에 350여 개, 1921년에는 670여 개, 그리고 1922년에는 무려 760여 개에 이르렀다. 이중 종교계 청년단체는 1920년에는 98개에 불과하였으나 1922년에는 271개가 조직되었다. (13쪽) ... 천도교청년당은 조직상의 규모나 활동 역량으로 보면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와 견줄 만한 단체였다. 1927년 2월 민족주의 운동세력과 사회주의 운동 세력의 연합전선에 의해 설립된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소될 때까지 전국적으로 120~150개의 지방조직과 2만~4만 명의 회원을 가질 정도로 거대한 조직이었다. 천도교청년당은 1919년 9월 설립되어 1939년 4월 해체될 때까지 전국적으로 120개 정도의 지방조직과 2만~4만 명 정도의 당원이 있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천도교청년당은 민족주의 운동 세력 및 사회주의 운동 세력의 연대 또는 대결의 대상이 되었다. <13~17쪽, 서론>
● 천도교는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이 일로 인하여 천도교의 지도자와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천도교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청년단체의 결성을 통한 문화운동의 전개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919년 7, 8월 무렵부터 청년단체의 조직을 준비해 나갔다. ... 1919년 9월 2일 정도준, 박달성, 손재기, 박용회, 황경주, 김옥빈, 박래홍, 최혁 등 8인의 발기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天道敎靑年敎理講演部, 이하 ‘교리강연부’)가 창립되었다. <26~27쪽, 제2장 1920년 전후 천도교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창립 8개월여 만인 1920년 4월 25일 시의에 따라 좀더 구체적, 적극적으로 운동으로 나아가고자 명칭을 천도교청년회로 변경하였다.(36쪽) ... 천도교청년들은 .. 천도교리(天道敎理)의 연구와 선전은 물론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 이를 위해서는 지식열의 고취, 교육 보급, 농촌 개량, 도시 중심의 계몽 활동, 전문가 양성, 사상 통일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 청년들은 문화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37쪽, 제2장 1920년 전후 천도교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 동경지회는 도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는데, ... 방정환을 지회발기인 대표로 하여 1921년 ... (발회식이) 4월 5일에 있었다. 식장 입구 한쪽에는 ‘천도교청년회동경지회발회식장’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발회식은 회장 방정환의 개회사, 학우회장 김종필·동우회장 김봉익·동아일보특파원 민채원·매일신보특파원 홍순기·여자흥학회장 윤영준 등 10여 인의 축사를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어 지회 설립을 의결함으로써 동경지회가 설립되었다. <43쪽, 제2장 1920년 전후 천도교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일제의 감시와 회유 그리고 독립운동의 실패로 인한 민중의 외면이라는 양면으로부터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 특히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서 조선 민중들의 기를 꺾으려 하였으며, 천도교가 동학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보아 예의주시했다. 때문에 3·1운동 직후 더욱 철저하게 감시, 탄압, 예비검속, 미행, 간섭, 회유, 방해공작과 여론조작, 집회 금지 등을 통해 일상적인 종교 활동마저 어렵게 몰아갔다. 일제는 앞으로 식민지 동화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천도교에 대한 특별 감호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65쪽, 제2장 1920년 전후 천도교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 목하 천도교는 비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언필칭 동학란을 계승하여 일본을 이 나라에서 축출해야 잘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우리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고 조선인에게 행복을 계속 추구케 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종교, 특히 천도교 등에 관해서는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큰 낭패에 빠져 들어갈지 모르니 각별 주의하기 바란다. 손병희를 위시하여 중진들의 움직임을 우리는 게을리 하지 않았던가. 천도교의 본부와 지부의 비상 움직임을 미연에 차단하지 않으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하기 어렵다. 다시는 3·1운동 같은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엄중 문책하겠다. <65~66쪽 / 일본 총독부가 제국의회에 보고한 내용 중에서>
● 강연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 하나는 종교적인 내용으로 현시대에 입각한 신종교, 즉 천도교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년계몽을 통한 문화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종교적인 것으로는 ‘세계평화와 천도교의 본래주의’, ‘세계 진(眞) 평화는 인내천’, ‘현대사조와 인내천(천도교)’, ‘시대의 천도교’, ‘인생과 종교’ 등이다. 이중 이돈화의 ‘현대사조와 천도교’는 “시대 개조에 처한 우리는 타(他)를 숭배하며 타(他)를 의뢰치 말며, 자아(自我)를 숭배하며 자아를 의뢰하고 조선 사람은 조선을 위하여 일하자.”는 것을, 박사직의 ‘인생과 종교’는 “인생과 종교는 불가리(不可離)할 관계이며 천도교가 가장 조선인에게 적합하다.”는 내용이다. <80~81쪽, 제2장 1920년 전후 천도교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 당헌(黨憲)에 의하면 청년당을 “천도교의 주의·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코자 이에 시종(始終)할 동덕(同德)으로써 한 개의 유기체(有機體)를 조직하여 그 명칭을 천도교청년당이라 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천도교청년당은 운동이 청년운동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청년당은 7개 부문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청년당은 다음과 같이 청년당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첫째, 당원 훈련이다. ... 둘째, 포덕운동이다. ... 셋째, 교리의 연구 천명 및 선전이다. ... 넷째, 대중조직이다. ... 다섯때, 문화운동이다. ... 여섯째, 체육운동이다. 일곱째, 정형연구와 통속운동이다. <132~133쪽, 제3장 천도교청년당의 창립과 조직체계>
●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의 보급과 다양한 계층의 이념과 운동론으로 ‘주의’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 ... 천도교 청년당의 주의는 천도교의 목적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즉 천도교의 목적인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인내천의 원리 하에서 보국안민(保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는 것”으로 청년당의 주의를 이론화하였다. 그런데 청년당의 핵심 이론가인 이돈화는 주의에는 ‘사상, 신념, 역량’의 세 가지 요소가 있으며, 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춘 단체가 ‘민족을 살리는 단체’라고 밝히면서 ‘수운주의(水雲主義)’를 내세웠다. <139쪽, 제3장 천도교청년당의 창립과 조직체계>
● (천도교의 종통 계승 문제로 분립하였던) 신파와 구파는... 1930년 12월 24일 신구 양파의 합동대회가 있은 후 청년당과 청년동맹은 ... 1931년 2월 16일 합동대회를 개최하였다. ... 양 단체(천도교청년당/천도교청년동맹) 해체를 선언하고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 이하 청우당)을 창립하였다. <194쪽, 제5장 1930년대 천도교청년당의 조직 변화와 당세 확장>
● 청년당은 (최린의 시중회 활동과 별도로) 비밀결사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조선 민족의 절대적 독립을 목적으로 1923년 천도교청년회가 경성을 중심으로 불불당(不不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1929년 말에는 이 조직이 오심당으로 전환하였다. 이어 당의 쇄신을 도모하여 동지와 자금 모금 등에 노력하는 한편 1932년에는 ... 청년당원 중 핵심당원으로 조직된 오심당은 1934년 9월 230여 명의 당원들이 검거되면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 이 오심당사건으로 청년당의 활동은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다. (223쪽) ... 청년당은 1939년 4월 3일 총회에서 “천도교가 이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한 이상 별개의 조직체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어 즉시 해소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223~226쪽, 제5장 1930년대 천도교청년당의 조직 변화와 당세 확장>
● 청년회는 본격적으로 천도교 교리와 자신들의 운동 논리를 정립하는 한편, 천도교의 이상을 사회적으로 실천할 중심세력으로 청년회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또 이들은 개인의 종교적 구원보다는 식민지 상황에서 사회문제 등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 방법론으로 청년단체는 ‘민족운동중심세력론’ 또는 ‘민족운동중심단체론’을 제기하였다. ... <229~230쪽, 제6장 천도교청년당의 민족운동론과 대중운동>
● 일제강점기 천도교청년당에서 전개하였던 통속운동 역시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간접으로서의 필요성’을 갖는 것으로 직접적인 포교운동과는 달리 보편적인 취향이나 사회적 문제를 그들과 함께하는 일상적인 운동으로서) ... 일반 민중과 가까이 하며 함께 호흡하는 일반적인 운동이었다. 청년당의 통속운동은 청년당의 본질적 운동이 아니지만 천도교와 청년당의 근본운동을 일반 민중에게 선전하고 민중과 같이 호흡하며 간접적으로 청년당이 나아갈 길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사회운동이었다. 즉 일반의 취미, 기호, 친목, 풍습 등에 관한 극히 보편적인 취향이나 문제를 민중들과 함께 공부하는 일종의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250쪽, 제6장 천도교청년당의 민족운동론과 대중운동>
● 천도교청년당은 1926년 8월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유년, 소년, 학생, 여성, 청년, 농민, 노동 등 7개의 부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사회운동은 각 부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청년당은 이들 각 부문을 총괄해서 지도 감독할 수 있는 단일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청년당은 이러한 인식 아래 청년당의 단일지도로 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 <273쪽, 제7장 천도교청년당의 부문운동>
● 청우당이 제시하는 건국이념은 ...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지향하는 조선적 신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민주정치는 자본가 전횡의 자유민주주의도, 무산자 독재의 프로민주주의도 아닌 조선에 적응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의미한다. (336쪽) ... 민주문화는, 동귀일체의 신사회 생활에 적응한 민주주의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민주문화는 봉건사회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문화 또는 기형적 문화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신시대 신생활에 적응한 민주적 신문화를 재수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파악하였다. ... 민주윤리는 사인여천 정신에 맞는 새 윤리 ... 인간 상호간 평등적 입장에서 인격을 표준하고, 공동사회, 공동생활을 표준하여 이에 상응되는 도덕을 수립하는 것이다. <336~338쪽, 보론: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부활과 활동>
● (해방 후 부활한 천도교청우당은) 조국의 완전독립과 자주통일국가를 건설을 목적으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추구하던 청우당의 정치이념은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그리고 현실 인식을 통하여 수립되었다. 그러므로 청우당 활동의 목적은 민족개벽과 사회개벽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으로 표출되었다. 즉 무침략·무압박·무착취·무차별의 진정한 평등 자유의 세계인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의 건설이며, 강령은 사인여천의 정신에 맞는 새 윤리와 동귀일체의 신생활 이념에 기한 경제제도 및 국민개로제를 실시하여 일상보국의 철저를 기하는 새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책은 완전한 독립의 민족해방과 자본주의 개혁을 통한 무산계급해방이었다. <367쪽, 보론: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부활과 활동>
■ 저자 소개
성주현 _ 한양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근대사를 전공했으며, 동학·천도교와 민족운동사,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사)한국역사문화원 대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실무위원 등을 맡고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자료실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부천대학교 겸임교수,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실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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