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암 표영삼 저작선 02
표영삼의 동학혁명운동사
■ 이 책은…
동학 연구가이자 천도교의 상주선도사로서 ‘최후의 동학인’ ‘걸어 다니는 동학’으로 평가받는 고(故) 삼암 표영삼(1925~2008) 선생의 저작선 제2권이다. 저자가 평생에 걸쳐 전국의 동학사적지를 일일이 답사한 바탕 위에 당대의 핵심 사료를 바탕으로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을 충청, 전라, 경상, 경기 등의 각 지역별로’ 논구해 나간 글들이다. 체험과 답사와 비교 연구를 통해 얻은 동학혁명사론이 특유의 이야기 투의 문체 속에서 생생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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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동학을 사랑하는 눈으로 본, 동학혁명운동사"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이 사상적, 문화적 영감을 주는 것처럼 동학은 한국 근대사의 출발점이면서, ‘개벽(開闢)’과 ‘생명사상’이라는 화두로써 미래로 열린 사상(思想)과 실천(實踐)의 보고가 되어 준다. 최근 전 세계적이 주목을 받으며 혁명(정권교체)에 성공한 ‘촛불혁명’의 기원도 바로 동학혁명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진단이 적지 않게 나온 바 있다. 그것은 동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새롭지 않은 동학’ 이해란 동학을 단지 ‘혁명이나 전쟁’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에 반해 ‘새로운 이해’란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동학 탄생[昌道] 당시부터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이며, 소수의 사람일지언정 면면히 그 이해와 실천의 계승이 이루어져 오고 있던 바다.
이 책의 저자 표영삼 선생은 동학을 혁명(革命)이나 전쟁(戰爭)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서도 평생에 걸쳐 동학은 혁명(革命)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삶의 틀을 개벽하는 가르침’(宗敎)이라는 신념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동학(천도교)의 본령임을 연구로써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으로 실천궁행함으로써 증명해 보인 분이다. 단지 동학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동학을 ‘살아가신’ 분이기에, 그의 동학(혁명) 이야기는 오밀조밀하고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생략과 거두절미를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읽는 재미를 더하는 중요한 문체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평생에 걸쳐 일구어 놓은 동학혁명사 연구 가운데서, ‘지역별 동학혁명운동’이라는 관점으로 쓰신 것을 모은 것이 이번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한마디로 ‘동학(혁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들여다 본 역사라는 점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대로, 표영삼은 동학을 사랑하는 그 눈으로 전국 구석구석의 동학혁명사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러므로 삼암장이 동학혁명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남과 같지 않다. 한마디로 동학혁명사 이해를 편안히 따라갈 수 있는 안내서 역할을 해 준다.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동학답사’ 안내를 맡았던 이력이 녹아든 덕분일 터이다. 이런 내공 덕분에 같은 사료를 근거로 하더라, 삼암장이 서술하는 동학혁명운동사는 남다른 대목도 적지 않다. 삼암 표영삼은 사실(事實, 史實)을 도외시하지 않되, 그의 눈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역사의 진실(眞實)’이어서 그렇다고 본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단지 사료나 역사적 정황(情況)에 의존하여 써내려 간 글이 아니라, 그가 수십 년 동안 현장을 답사하며 촌로(村老)와 동학군 후손(後孫)들로부터 들었던 생생한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그 위에 사료로부터 얻어지는 정보를 추가하여 동학혁명사를 재구성해 나간다는 점이다. 표영삼이 동학 답사를 시작하던 때는 극히 일부 사람들이 한정된(전봉준, 김개남 등의 동학 거두들) 역사적 맥락 외 지역 곳곳의 동학 사적(종교 사적 + 동학혁명 사적)을 찾아다니면서, 그때까지 생존해 계시던 1890년대 전후 출생자들과 후손 중에서도 제1세대에 속한 분들의 증언을 비교적 다수 청취하면서 축적된 내공이 바탕이 되고 있다(이러한 史蹟 탐방의 성과는 별도의 저작선(03)으로 근간 예정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단사(인물사)에 해박한 장점을 살려, 각 지역의 연원(淵源-동학교단의 인맥계통)에 대한 지식을 사료 해석이나 역사 이해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을 배가한다.
그리고 삼암 표영삼은 그 이야기들을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이 책에는 수많은 원전 인용되었음에도, 그것을 평이한 현대문으로 번역하였으며, 자료의 행간에 숨어 있는, 혹은 자료가 누락된 이야기(역사)의 지평을 때로는 추리와 때로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일목요연하게 풀어나간다. 이 책의 미덕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이야기성’과 그 생생한 묘사에 힘입어, ‘문자를 통해 그날 그곳의 전투 상황과 동학군들의 움직임, 그리고 그들의 마음까지’를 마치 그림으로 보듯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그 사람과 역사들은 삼암 선생이 그때 그곳에 이르러 발굴하고 채록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주 속의 먼지로 산화해 버리고 말았을 바로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나고 찾은 것들”(저작선 1권-‘표영삼의 동학이야기’ 서평 중에서)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이미 간행된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동학2-해월의 삶과 생각>에 이은 표영삼의 동학 3부작 시리즈 제3권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표영삼은 <동학3>의 원고를 탈고하여 출판사에 맡겨 둔 상태인데, 현재까지 출간되지 않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표영삼의 동학혁명운동사>는 <동학3>의 출간용 원고의 저본(底本)이라고 할 수 있는 원고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것이 ‘동학혁명사론’이라는 데는 차이가 없다.
삼암 저작선을 통해 ‘동학’의 진면목이 재조명되고, 부활하여 다시개벽의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데에 일조할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 삼암(三菴) 표영삼 이야기
일찍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자, 80이 되도록 ‘청년’으로 살다가, 위대한 종교인의 모습으로 환원(還元)하신 표영삼 선도사(宣道師).
표영삼 선생은 1925년 평북 구성에서 출생하여 조부(표춘학) 대부터 신앙하던 천도교에 아버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몸담게 됐다. 특히 해방 직후부터 활발하게 교회 활동을 전개하던 중 6.25가 발발하자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1952년 말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그 무렵 부활된 천도교청년회에서 문화부장 겸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회 활동을 재개했다. 1961년 이후 10여 년간 노동 현장에 투신해 체신노조, YH노조 설립 등을 지도했다. 1977년 다시 천도교로 돌아와 신인간사 주간, 교화관장, 상주선도사, 교서(교사)편찬위원 및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30여 년간 천도교 연구에 매진했다. 교리, 교사, 유적지 조사 부문으로 대별할 수 있는 선생의 업적은 특히 동학의 성지, 사적지 발굴 조사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초기의 저술은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과 <천도교월보>를 통해 주로 발표했다. 2000년대 들어 대외적인 발표를 시작하면서 <동학1> <동학2> 저술을 남겼다(최종권인<동학3>은 출간 준비 중이다). 선생의 연구, 조사, 저술의 성과는 대체로 교리 부문, 교사 부문, 동학 유적지 조사 부문 등이다. 말년에는 당신의 연구 성과와 평생에 걸친 조사 결과를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관심과 애정을 갖고 강의와 답사 안내에 매진하던 중 뜻밖의 병을 얻어 2008년 향년 84세로 환원하였다.
■ 삼암 표영삼 저작선은?
삼암 표영삼 선생은 생전에 저서 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여러 지면에 걸쳐 다양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만년에 그러한 성과들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 일을 미처 마치기 전에 환원하였다. ‘삼암 표영삼 저작선’은 그러한 선생의 뜻을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발표된 글들의 결을 살려가며 차례대로 발간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화석화된 형태로서의 유고전집이 아니라, 표영삼 선생의 생생한 목소리가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성을 기울이고자 한다.
- 저작선 제1권 : 『삼암 표영삼의 동학이야기』(2014.11.10. 간행)
■ 책 속으로
● 경기지역 동학혁명운동
경기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전라도와 충청도에 비해 왕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수도와 인접한 지리적인 관계로 관의 지목이 심해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동학도인 수가 적은 데 비해 9월 재기포 이후 항일전에서는 다른 지역에 뒤지지 않았다. 경기도 동학혁명운동은 충청도 북부 지역 혁명운동과 아울러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기포 후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에 밀린 경기도 동학군은 충청도 북부 지역 동학군과 합류하여 혁명운동, 즉 항일전에 나섰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본문 44쪽>
● 충청도 서부지역 동학혁명운동
충청도 서북부 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6월에 기포하여 도소를 설치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여러 도소에서는 관아 습격을 자제하면서 많은 악질 양반과 토호들을 응징했으며, 대부분의 양반들은 이 때문에 피신해야 했다. (중략)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월등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나타나자 동학혁명운동은 여지없이 좌절되었다. 홍주성 공격 때 수백명의 결사대로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막혀 물러서야 했다. 더욱이 그들은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해 많은 접주급 지도자들은 철저히 색출, 총개머리로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본문 70-71쪽>
● 충청도 금산 동학도의 초기 기포
1894년 동학혁명운동 때 금산과 진산지역 동학군은 일찍 기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보다 보수 세력과의 공방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특히 1894년 11월부터는 일본군과의 항전도 끈질기게 전개했으며, 12월에 이르러서는 대둔산에 산상도소까지 설치하여 1895년 1월 하순(음)까지 항쟁을 계속하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곳이다. 이 지역도 초기에는 동학 세력과 보수 세력 간의 대결구도였으나 어느덧 동학 세력이 강한 진산지역과 보수 세력이 강한 금산지역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동학 세력과 보부상 세력 간의 대결 구조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본문 74쪽>
● 충청도 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
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진산 동학군이 주축이 되어 조재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 및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고산, 금산의 여러 접주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초기 기포는 무장 당산과 태인 지금실 기포보다 8일 내지 6일이나 빨랐다. (중략) 이 지역의 혁명운동은 동학혁명 전체의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다. 최초의 기포에서부터 집강소 활동기와 10월 소리니재 전투에서, 그리고 최후의 항쟁에서 일체감과 연대성과 저항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군과 경병에 의해 동학군이 고전할 때 이곳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북접 주력과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대둔산과 염정골을 근거로 끝까지 항쟁하였다. <본문 115-116쪽>
● 전라도 남동지역 동학혁명운동
1894년 6월 전라도 전역에 동학 집강소가 설치될 때 순천지역에는 영호대도소嶺湖大都所가 설치되었다. 대접주인 금구 김인배가 내려와 순천의 유하덕과 김이갑, 광양의 박정주와 김학식, 낙안의 이수희와 강사원, 보성 동부지역의 안귀복, 흥양의 유복만과 송연호 등과 손잡고 대도소를 세운 것이다. 이들은 7월에는 순천, 여수, 광양, 낙안, 보성 동부 지방, 흥양 등 지방 관아를완전히 장악하는 한편 경상도 하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경 상도 서남부인 진주, 사천, 고성, 곤양, 남해, 하동까지 세력을 뻗쳐 나갔다. <본문 162-163쪽>
● 전라도 서남부지역 동학혁명운동
『동학당정토기』에 의하면 “장흥·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이는 소관 한 사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공사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장흥 근처에서는 인민을 협박하여 동학도에 가담시켰기 때문에 그 수가 실로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래서 진짜 동학당은 잡히는 대로 죽여 버렸다.”고 하였다. <본문 190쪽>
● 전라도 나주지역 동학혁명운동
나주를 점령하지 못한 동학군은 최경선이 이끄는 많은 동학군을 이곳에 주둔시켜야 했으며, 10월에는 손화중 대접주 휘하의 동학군까지 투입하여 북상 계획에 적지 않은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10월 하순부터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하면서 나주 수성군은 오히려 역습으로 나왔다. 침산 전투, 용진산 전투, 고막포 전투 등 전후 6차례의 공방전이 있었으나 동학군 쪽이 점점 몰리게 되었다. 11월 23일에 동학군은 나주성을 최후로 공격하기 위해 함박산까지 진격했으나 무기도 턱없이 부족하였고 강추위까지 몰아쳐 제대로 전투 한번 못해 보고 돌아오다가 도리어 수성군의 기습을 받고 무너지고 말았다. <본문 198-199쪽>
● 전라도 남원지역 동학혁명운동
『오하기문』에 의하면 “흥양접만은 기율이 있었으며 접주 유복만劉福滿은 무리를 잘 다스려 이름난 부자나 교활한 서리들을 찾아내어 고문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나머지 평민들은 일체 불문하였다.” 한다. 유복만은 11월 28일에 남원성이 박봉양에게 점령되자 흥양으로 내려와 1천여 명을 거느리고 12월 20일까지 활동하고 있었다. 유복만과 함량진은 당시 회룡총回龍銃과 모슬총毛瑟銃을 갖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동학군의 무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2월 15일 장흥에서 동학군이 대패하자 사기는 떨어졌고 보수 세력들은 날뛰었다. 결국 12월 25일경에 민보군이 조직되어 대접주 유복만과 오준언을 비롯하여 27명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본문 280쪽>
● 전라도 장흥지역 동학혁명운동
장흥·강진 지역 동학도들은 4월부터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군과 합류하여 황룡천 전투를 비롯하여 전주성 함락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6월부터 내려와 도소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10월부터는 항일전을 위해 기포하여 북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흥 부사 박헌양이 벽사, 강진, 병영의 병력을 동원하여 탄압하려 하자 지방 보수 세력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힘이 부족하자 금구 김방서 대접주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12월 초부터는 벽사역·장흥부·강진군·병영 등을 모조리 공격하였다. 뒤이어 그 여세를 몰아 영암·해남도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출동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다. <본문 309쪽>
● 경상도 남서부지역 동학혁명운동
경상도 남서부 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진주를 중심으로 싹터 올랐으나 전라도 동학군의 절대적인 지원 아래 전개되었다. 6월 이후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에 자극되어 동학군의 봉기에 적극 호응했고, 더욱이 민씨 일족인 진주병사 민준호도 은밀히 지원하였다. (중략) 결론적으로 이 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충경포를 배경으로 하는 진주의 손은석과 영호포를 배경으로 하는 하동의 여장협에 의해 주도되었고, 일본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투쟁은 타 지역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본문 334-335쪽>
● 손병희 통령과 동학혁명운동
1894년 3월에 시작된 동학혁명운동은 황해도를 제외한 여타 지역에서는 12월 중순에 이르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전라도에서는 12월 17일에 장흥 죽전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충청도에서는 12월 24일 금왕 되자니 전투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의암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동학군의 사실상 최후전투는 12월 18일에 벌어진 보은 북실 전투라 할 수 있다. 이 싸움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어 되자니 전투에서 일찍 무너졌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비롯하여『 토비대략』,『 소모사실』,『 천도교회사초고』 등에 이곳 북실 전투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문 338쪽>
우리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이 땅에 온 우주적 존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여기까지 온 길이 다 다르고 모두가 개성을 가진 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온 존재들은 우주의 운행 원리인 음양(陰陽)이 사회적 질서로 해석된 이기(理氣)의 조화 속에서 살게 됩니다. 태초의 시작인 하늘과 물이 상호 작용하듯이 음양(陰陽), 건곤(乾坤), 이기(理氣)는 모두 서로 살리고 살립니다. 이론과 실천, 마음과 정성, 나아감과 물러남, 유위와 무위,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가 제각각 분리된 것 같지만 이 세상이 자리 잡고 변화 발전하도록 서로 돕는 길입니다. 세상은 크게 봐서 하나입니다. 선하고 악한 것에 지나치게 매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큰 긍정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55~56쪽>
■ 차례
경기지역 동학혁명운동
충청도 서부지역 동학혁명운동
충청도 금산 동학도의 초기 기포
충청도 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
전라도 남동지역 동학혁명운동
전라도 서남부지역 동학혁명운동
전라도 나주지역 동학혁명운동
전라도 남원지역 동학혁명운동
전라도 장흥지역 동학혁명운동
경상도 남서부지역 동학혁명운동
손병희 통령과 동학혁명운동
■ 저자 및 감수자 소개
저자 표영삼:
본명 應三, 호 三菴, 1926~2008. 동학 연구가이자 천도교의 상주선도사.
동학의 성지 사적지 발굴 및 동학시대의 역사를 조사하는 데 대부분의 생애를 바쳤고 후학들에게 전수하였다. 그 스스로도 동학의 진리와 가치를 체화한 모범적인 동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평안북도 구성 출생. 천도교청년회 문화부장, 총무부장, 중앙위원,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장, 종의원, 교서교사편찬위원 등 역임. 천도교서울교구 교화부장, <신인간> 주간, <천도교월보> 초대 주간, 전주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 관장을 맡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활동 방향을 더욱 대외적으로 확장하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사적지 조사 및 동학농민혁명참여자(후손) 실사(實査) 등을 지도 및 자문하거나 각 지역별 동학 프로그램(방송 등) 안내, ‘모심과살림연구소’의 연속 강연과 동학 성지·사적지 순례 등을 이끌어 나갔다. 향년 84세(2008.2.13)로 환원하였다.
감수자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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